"페르난도, 너무 무서워. 우리 가족은 세비야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그러면 우리는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되겠지."
"수소나, 걱정하지 마.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나는 너를 따라가서 지킬 거야. 아버지에게 이야기해서라도 너만은 꼭 내 곁에 남게 할 거야."
페르난도와 수소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어 벌써 1년 넘게 남몰래 사랑을 속삭여 왔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넘기 쉽지 않은 장벽이 있었다. 페르난도는 가톨릭계 귀족인 구스만 가문의 아들이었고, 수소나는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인 쇼샨의 외동딸이었다. 가톨릭이 유대인을 박해하는 현실에서 종교가 다른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한참동안 어깨만 기댄 채 앉아 있던 두 연인은 늦은 오후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소나의 얼굴에는 자신들의 슬픈 운명을 한탄하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페르난도는 사랑하는 연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낸 뒤 그녀의 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수소나,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 혹시 긴급한 일이 생기면 지체하지 말고 내게 달려와서 알려줘. 그래야 우리 둘의 사랑을 지킬 방책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페르난도는 수소나의 두 손을 꼭 잡으면서 굳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수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꼭 그렇게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두 연인은 세비야 대성당 인근까지 손을 잡고 걸어온 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 봐 서로 다른 골목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갔다.
수소나도 발걸음을 서둘러 가톨릭계 스페인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유데이라 깊숙한 곳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작은 정원을 지나자 아버지와 어머니, 두 오빠가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소나는 몰래 집을 빠져나갔던 터라 부모에게 들킬까바 조심스레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아버지, 저희들도 내일 밤 무기를 들고 거사에 동참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시나고그에 가셔서 저희들의 거사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오기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래, 너희 같은 유대인 청년들의 어깨에 세비야 유대인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 구스만 가문 사람들과 호헤다 원장을 없애지 못하는 한 우리 유대인들은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아버지와 오빠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소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두 오빠가 내일 밤 무기를 들고 가 구스만 가문 사람들을 살해하겠다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페르난도도 목숨을 잃게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그의 머리를 스쳤다. 수소나는 이런저런 사정을 따져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집을 뛰쳐 나갔다. 그는 오른쪽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페르난도의 집을 향해 숨이 머리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 페르난도는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고, 대문 한쪽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수소나가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집에 돌아가 있어야 할 그녀가 밤에 가톨릭계 주민들이 사는 지역으로 달려오는 게 이만저만 위험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난도, 큰일났어. 유대인들이 내일 밤 구스만 가문 사람들을 습격해서 몰살시킬 생각이래."
페르난도는 수소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기치 못한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수소나는 집에서 들은 아버지와 두 오빠의 대화 내용을 페르난도에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난도는 수소나를 집으로 데려가 자신의 방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그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아버지 가르시아 데 구스만에게 그대로 전했다. 구스만은 수소나를 귀가하지 못하게 하라고 아들에게 지시한 뒤 세비야 시장과 구스만 가문은 물론 다른 여러 가문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쓴 편지를 돌렸다. 유대인들의 음모를 설명하고, 그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오늘밤 선공을 하자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다음날 새벽 무렵 구스만 가문의 정원에는 수백 명의 가톨릭 기사, 병사 들이 중무장한 채 모였다. 세비야 시장과 호헤다 원장, 가톨릭 신부들도 있었다. 그들은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새벽 거리를 행진해 유데리아로 걸어갔다. 모든 가정, 상점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가톨릭 기사, 병사 들은 10여 명씩 조를 짠 뒤 모든 유대인 가정을 기습해 각 가정의 가장과 청년들을 모조리 결박해 대성당 앞으로 끌고 갔다. 기습을 당한 각 유대인 가정의 남자들은 옷이나 신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마치 도살장으로 향하는 소, 돼지처럼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대성당에서는 하루종일 종교재판이 열렸다. 말이 종교재판이지 실제로는 고문을 동반한 취조나 다름없었다. 세비야 치안 관계자들과 신부들은 잡혀온 유대인들에게 '가톨릭 습격 음모'의 주범이 누구이며, 어떤 이들이 동참했는지를 캐물었다. 그 결과 유대인 원로 야후다는 물론 수소나의 아버지 쇼샨과 아도바, 수소나의 두 오빠 등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참수당했다. 음모를 알고 있으면서도 치안당국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다른 수백 명이 목을 잘렸다. 수소나의 어머니도 반역자의 집안사람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을 떠난 유대인들의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아무도 모른다.
페르난도는 '가톨릭 습격 음모'의 가담자 처벌이 끝난 뒤 수소나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녀에게 세상이 조금 더 조용해지면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그는 서둘러 유데리아를 빠져나갔다. 그날 새벽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는 수소나는 멀리 뛰어가는 연인 페르난도의 뒷모습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 뒤 콧노래를 부르면서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 두 오빠는 보이지 않고 시녀들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녀들은 뒤늦게 돌아온 수소나를 보고는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시녀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서야 수소나는 유데리아와 자신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리고 그런 일이 왜 발생했는지를 알게 됐다.
그 이후 수소나를 그녀의 집밖에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소나는 가족은 물론 수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연인 페르난도의 배신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평생을 집안에 갇혀 지내다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 시녀들에게 자신의 목을 잘라 머리를 집앞 대문에 걸어 놓으라고 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의 머리는 18세기 말까지 그곳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