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스물 아홉. 참 지독한 아홉 수다.
올해는 왜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가..
생각해보면 핑계가 되어줄만 한 것이
아홉 수 라는 것 뿐이다.
첫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새해를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않아 아이가 어린이집
졸업을 하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아이와 함께 나도 적응하느라
바빠져서 남편보다 같은 학교 아이엄마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나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사회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말보단 글이 편한가보다.)
1:1로 대화하는건 그나마 편하지만 여럿이 모여
이야기 할때에는 뒤로 한발짝 물러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편이다.
그래서 더 모임에 자주 나가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동네에 몇몇 아줌마들과
친해졌다.
그러던 중 내 아홉 수의 첫번째 사건이라
단언할 수 있는 사건이 생겼다.
대통령이 국정농단과 각종 비리에 얽혀 임기도 얼마 안남기고 불명예스러운 끝을 본 사건이다.
국민들에게 지금이라도 알려져서 참 다행이였다.
나도 분노와 박탈감을 느꼈지만
그 만큼 이제는 세세한 것까진 아니더라도
정치면에서 큰일이 나면 기사는 한번씩 보게 되었다.
어느당이 보수인지 어느당이 진보인지 조차
알지 못하던 내가 빨간건 보수 파란건 진보
뭐 이정도는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장미대선이 있기 전 날.
그 날은 어버이 날 이였다.
"OO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라고
사촌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몇번이고 되물었었다.
"누가? 통영에 계신 우리 할머니가? 거짓말하지마..
확실한거야? 저번 처럼 다치셔서 응급실 가신게
아니라 돌아가셨다고? 진짜로?" 믿기지 않았다..
90세 나이에 치매가 오셔서
그렇게 10년을 더 사시다 세 자리수 나이까지 사셨다.
충분히 예상 했을법한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작년 말쯤에 요양원 침대에서 낙상사고까지
있으셔서 많이 다치셨었다. 나이탓에 전신마취를 하면
깨어나시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
부분마취로 다리에 수술도 하셨었다.
가보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핑계를 대자면..
난 그곳에 계신 아버지와 새어머니라는 이상한여자와
친척들과 사이가 좋지않다. 가면 어색할 뿐이다.
그리고 어차피 중환자실에 계셨고 하루 면회 인원이
제한되어있었다. 그리고 나름 아이의 입학준비로
바쁘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러면 안돼는거였다.
그렇게 생전 마지막 모습은 기억 나지도 않는..
후회와 눈물의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와서도 한참을 정신 못차리고 울다가
또 모임에 가서는 웃다가..
그렇게 괜찮은 척 지내다보니 괜찮은것 처럼 되어가던
어느 날..
모든 인간의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도 그런일이 생겼다.
별로 떠올리고싶지 않지만..
뭐 결정적인 사건은 내가 몸이 안좋아
집에서 쉬고있던 날이였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다른집 아이가 그사람의 아이와
너무 놀고 싶다고 징징대서 우리집으로 오라고 했단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남의 자식 둘이서 갑자기 자기들의 친목을 다지는데
우리집을 쓴다는 말 아닌가?
놀라고 당황스러웠지만 이런저런 준비도 도울꺼고
지금 우리집으로 오고있다는 말에
일단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래나 저래나 집에 누군가 온다고 하니
위생상태가 걱정이였다.
돕겠다는 사람은 도착해서 우리집 티비로
지난 드라마 다시보기를 하고 나만 정신없이 치우고
마당에는 아이들용 텐트도 만들어두었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가기 직전
나 나름의 이건 아니지 않은가 라는 생각에
몇마디 건냈더니 이유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은체
왜 나쁜사람을 만드느냐는 식으로 이야기 하길레
아.. 이 관계는 여기서 끝내는게 맞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인간관계 하나를 끝내고
우울증으로 집안에만 박혀 지냈던거 같다.
가끔 친구들 만나 커피도 마시고 술도 한잔하고 했지만
그것 말고는 필요한 외출만 했다.
그러다 주말에 남편이 바람이나 쐬자 하며
아이와 나들이를 가는 도중에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다.
내생에 접촉사고든 뭐든 차사고가 난것은 그것이 처음이였다.
사고날 당시 우리차는 정차한 상태라
약간 자세를 옆으로 하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가 사고가 나서 너무 놀라고 아프기도 했다.
아이가 조금 놀라 이틀간 구역질을 간간히 했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사람은 없고
상대방이 순순히 과실을 인정했고
보험처리로 상황은 종료 되었지만
틀어진 자세로 충격을 받았던 허리가 통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한참을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한달쯤 지났을까?
여느 날과 같이 퇴근시간이 늦은 남편은 따로 상을
차려주기로 하고 딸과 둘이 저녁을 먹고 있었던것 같다.
아이의 밥을 먼저 챙기느라 나는 늦게까지 밥상 앞에 앉아있었다.
전화가 울렸고 다급한 목소리로 남편이 "작은형수가 돌아가셨어. 지금 충주로 가야할꺼 같은데 당신이랑 OO이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무슨말인지 또 못알아 들었다.
일단 어딘가 가야하니 준비해라 라는 소리 같아서
그대로 밥상을 치우고 급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신랑이랑 통화하기전 통화를 하고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 하니
아이를 돌봐주겠다 했다. 다음날 학교도 가야하고..
슬픔이 최고조인 장례식 첫날에 아이를 데려가긴
쉽지않다. 데려가서 그 슬픔에 잠긴 사람들 앞에서
어른들이 보기에는 눈치가 없을 수 밖에 없는 아이를
케어할 자신이 없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돌아가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작은형수..? 내가 아는 그분인가?
아니면 그냥 아는 지인분의 와이프가 돌아가신건가?
남편에게 챙겨야 할 물품을 확인할 겸
다시 전화를 걸어
"내가 아는 그 충주에 계신?..." , "응."
"경찰이신?.." , "응. 맞아."
"성함이 피OO 되시는 작은형님이 맞아?"
했더니 그렇다한다..
운전중이라 자세한 이야기를 못하니
기사를 검색해보라 했다.
이 표현은 볼때마다 참 진부하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분명 나는 안전한 우리집 거실에 혼자 가만히 서
있는데 무언가 쎄게 아주 쎄게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때부터 눈물이 났다.
기사를 봤다.
자꾸 눈물이 흘러서 아이가 볼까봐 마당에 나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평소에 울 일이 있어도 소리내어 우는 일은 잘 없다.
근데 그 밤에 마당에서 나는 꺼이꺼이 소리내어 울었다.
그러고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남편이 왔다.
마당에 앉아 우는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남편이 어차피 자신은 다음날 출근을 해야해서
지금 갔다가 새벽에는 다시 집에 올테니
다음날 퇴근하고 함께 가자고 했다.
다음날 아이의 등교문제도 있고
충격과 스트레스에 약한 나를 잘 알기에
배려해준 것이리라..
남편이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장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또 마당에서 울고 있었겠지.
그래도 그정신에 잘 다녀오라 운전 조심히해 라는 말은
잊지 않고 해주었다.
남편이 나가고 얼마되지 않아 친구들이 왔다.
친구들을 보니 마냥 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재워놓고 술이나 한잔 하자
해서 한잔 마시는데 자꾸 속에서 뭔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더니 심박수가 빨라졌다.
단언컨데 술을 많이 마셔서도 아니고
취해서는 더더욱 아니였다.
(자랑은 아니겠지만 나는 술이 꽤나 쎈편에 속한다.)
한참을 혼자 친구들에게 티내지 않을려고
심호흡하고 신경을 딴데 돌려보려고 설것이를 하는데
뭔가 또 나를 후려쳤다.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아서는 과호흡이 올때까지
계속 가쁜 숨만 쉬었다고 한다.
놀란 친구는 우리집 우편물을 찾아가며 119에
"제 친구가 숨을 쉬지않아요.. 빨리 와주세요." 라며
신고를 하고 (119가 도착했을때 호흡이 돌아와서 구급대원들은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내 남편에게도 전화 하고
뭐.. 그렇게 나는 3년만에 공황장애 발작이 다시 왔다.
다음날 친구들이 날 그냥두고 갈수 없다며
신랑이 오기 직전까지 함께 있어주었다.
여러가지 챙기고 (자꾸 멍해져서 간단한 짐을 챙기는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충주를 향해 차를 타고 가고있는데도
심장이 혼자서 100m 전력질주하듯이 뛰어댔다.
그리고 무언가 열심히 해서 지쳐 쓰러지듯
차에서 잠시간 눈을 붙혔던거 같다.
건국대학병원 장례식장 특실.
복도를 따라 화환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끝에 천장에 매달린 티비에 작은형님께서
환하게 웃고 계셨다.
멍하게 바라보다 내손을 이끄는 아이를 따라 들어가
정신없이 절을 했다. 그리고 도망쳐 나오듯이
분양소에서 나와 상에 앉았다.
앉자마자 주책맞은 눈물이 또 터졌다.
숨이 가파져 오는데..
이곳에서 어제처럼 또 정신을 잃을 순 없는 노릇이다.
지금 누구보다 이자리를 없던 것으로 만들고
떠나 버리고 싶으실 상주이신 아주버님도
저 자리에서 버티고 계시지 않은가..
그 장례식장에서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같다.
상주의 아버지 되시는 큰아버지께서 울고있는 나에게
먼저 오셔서 손을 잡아주셨다.
오히려 울고있는 나를 위로해 주셨다..
자신도 어제는 많이 우셨다고..
근데 눈물이 말랐는지 이제 눈물도 나지 않는다
하시며 나를 걱정해주셨다.
큰아버지께서 애써 웃으며 하신 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들렸다..
그 뒤로도 정신 못차리고 멍해져있는 나에게
어른들이 먼저 오셔서 인사와 추도의 말을 건내 주셨다.
그리고 내가 앉아있는 상에 식사가 차려졌다.
목구멍에 뭔가 넘어갈리 만무하다.
자꾸 왜 안먹냐 먹어둬라 하는말에 마지못해
몇 숟갈 뜨고 내려놓길 반복하다
내가 앉은 상 반대편 끝쪽에 큰형님이 보였다.
먼저가 인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형님의 지인분들과 대화를 하시는 중이신것 같았는데..
표정이 너무 큰 슬픔에 짓눌려 괴로운 표정이셨다.
그래서 선뜻 다가설수 없었던것 같다.
그 곳에서 많은 가족들의 손을 처음 잡았다.
그리고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난 참 엉뚱하게도 이런게 가족이구나.. 느꼈다.
할머니께서 가셨을때, 서로 어색해 눈치만 보던
내 친정이 너무 비교가 되서..
잠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었던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내형님 생전 이야기를 하고 울고..
때로는 그 추억에 웃고..
가족들은 자주 만나지 못한 다른 가족의 안부를 묻고
너무 슬픈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새벽이 되니 많은 분들이 일상으로 가셨다.
분양소에 이불을 깔아 아이를 재우려는데
낯선 곳이라 그런지 도통 잠을 자려 하지않았다.
그러다 아직도 상주자리에 앉아 멍하니
영정사진을 보고 계신 아주버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 눈에 눈물은 고여 있었지만 흐르진 않았다.
오히려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러다 아무도 듣지못하는 입모양만의 말로 OO엄마..
하며 영정사진에 여러 말을 건내셨다.
그 순간 주책맞은 눈물보가 또 터지려고 해서
나도 그냥 함께 영정사진을 보며 잠들지 않은 아이만
토닥거렸다. 영정 사진속 형님은 너무 해맑게 웃고
계셔서 나도 모르게 따라 웃을뻔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혼자 분양소 안이 들여다 보이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영정사진만 뚫어져라 봤던것 같다.
저분이 우리 형님이 맞으신가? 내가 아는 그분이 맞나?
그 때도 나는 믿지 않았던것 같다.
발인 하는날. 난 이날을 떠올리면,
한장의 사진처럼 남아있는것이 있다.
화장장에 도착한 영구차 그뒤에 실린 형님의 관
앞에서 조카들과 함께 네모의꿈을 부르며
우리 이노래 부르면서 같이 놀러다니고 그랬잖아..
하시며 통곡하셨던 아주버님.
아이들이 큰소리로 부르던 네모의 꿈은 이제껏 내가 알던
어떤 노래보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펐다.
형님이 왜 그렇게 가셨는지는 아직도 형님만 아신다.
장례가 모두 끝나고 형님은 예쁜 하얀색 단지 속에
담기셔서 작은 상자 같은 곳으로 가셨다.
장례지도사는 "순서대로 배정을 받는데, 마침 눈높이에 있는 좋은 곳을 배정 받으셨네요. 다행입니다." 했다.. 뭐가 다행이라는건지.
아직 우리형님이 왜 가셨는지도 모르는데
뭐가.. 이깟게 도대체 뭐가 다행이냐 따져묻고 싶었다.
장례의 끝무렵이고, 어른들앞에서 행패는 부리지 말자
하고 그냥 들어 넘기려 애썼다.
그렇게 모두가 제정신이려고 애썼던 장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형님의 관련한 인터넷 기사가 여러차례 올라왔다.
댓글을 달고, sns로 공유하고, 여기저기에 글을 쓰고
남는 시간엔 집안일을 한다.
낮에는 그렇게 지내다 밤이 오면 아이를 재워두고 마당에 나간다.
그 밤에 꺼이꺼이 소리내 울었던 그자리에 앉아
아직도 나는 운다.
아직도 작은형님이 그 특유의 선하게 웃는 얼굴로 반겨 줄 것만 같다. 별도 잘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며
하루라도 빨리 형님의 억울함이 풀리길 바라고
잘못한 사람들이 벌을 받길 바라고
우리 가족의 눈에서 눈물 뺀 그 나쁜 사람들이
우리 형님 대신 죽었으면 좋겠고..
이런 생각만 하다가 하루하루가 다 간다.
나는 아직도 심장이 혼자 달리기하듯 뛰고 숨이 차다.. 다시 또 발작이 일어나면 그때는 병원에 가야한다. 스스로 완벽히 통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오던 것이
통제를 벗어나면 당황스럽고 분노가 치밀게 된다.
그리고 생각의 범위가 좁아지게 된다.
그러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왔는데..
조만간 병원에 예약하는 전화를 걸게 될 것만 같다.
내 길고 긴 아홉 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