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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떠나고 혼자 남은 사람의 이야기.1

안녕 |2017.11.24 16:17
조회 144 |추천 0
* 아 이거 체널이란 걸 해야 글이 그쪽으로 가는구나... 몰랐네
 이곳이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이라 글을 남겨본다. 혼자 짊어가기엔 너무 큰 짐인거 같아서.
 모두 다 가명이야.

 지금 나한텐 세명분의 일기가 있어, 그리고 그들이 남긴 여러가지 기록들이 있지. sns나 뭐 편지나 사진이나 가지각색이야.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이젠 알수가 없어. 죽은 친구도 있고 연락이 되지 않는 친구도 있거든. 그래서 나는 곰곰히 생각했어. 아 왜 윤은 그런 행동을 했을까. 시은은 지아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럴 수 밖에 없던걸까? 최대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싶더라고.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지. 완벽하게 알고싶진 않았어. 그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잊어가고 있고, 굳이 상처를 꺼내서 보기 싫으니까. 그저 잊어감과 동시에 궁금증만 남게 되었지.
 점점 괜찮아지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때 쯤에, 친구가 드라마를 보고 있더라고. 영상물은 러닝타임 기다리는게 시간낭비라 생각하는 지라 나는 드라마를 안봐. 그래서 물었지. 무슨 내용이냐고. 차피 안볼꺼니까 스포일러도 괜찮다고. 그러니까 이야기 해주더라고. A와 B의 관계 B와 C의 관계, 그리고 뒤통수, 내연녀, 알고보니 자기 딸 등등.
 맞아 아침드라마 내용이야. 무언가 뻔하고 자극적인 내용들. 하지만 그 내용들이 전부다 극속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야. 웃기게도, 그런 자극적이고 흔한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 속속히 숨어져있어. 모든 불행들이 한 곳에 뭉친 형태라기 보다는, 그런 불행이나 문제들이 우리 주변사람들에게 하나씩 있다는 이야기야.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지.
 맞다, 윤도 그랬어.
 문득 윤의 생각이 나서 고향집에 돌아가 박스를 하나 열었지. 거기서 윤의 일기를 먼저 찾았어. 성인되서 쓴 일기장 두권이 있더라고. 하나는 내가 선물해 준 거였어. 첫페이지를 여니까 바로 졸면서 쓴건지 휘갈겨 쓴건지, 2013년초에 쓴 글이 있더라고.
 '나는 아버지가 싫다. 아이들은 본 것을 배우며 자란다. 아이들은 부모를 닮아간다. 나는 이 말이 싫다. 그렇지만 내 모든 행동의 면죄부기에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이 글이 첫번째였어. 맞아 윤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어. 윤의 어린시절에 내가 모르는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모르는 어떤 과거가 쌓여왔길래, 지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걸까. 윤 뿐만 아니라, 시은도 지아도. 모두 다 궁금해졌어. 나는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을 모두 만나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어. 그들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를 말이야. 그리고 한데 묶고 정리해 나가며 그 사건에 파생된 그들 각자의 삶을 정리해 나갔어.
 그 사건은 일단 시은의 자살이야.
 그럼 그 사건에 얽힌 각자의 이야기를 그 친구들의 시점으로 정리해 나가볼께. 글이 조금 소설같아지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되긴 한다. 물론 내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픽션을 섞어서 적을꺼야. 100% 사실은 아니라는 이야기지. 그리고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적을꺼야. 맞아 어떤 의미론 소설이긴 하지.
 이 이야기를 적는 이유는 간단해. 엄청난 비극이고, 이 비극을 누군가가 봐서 아파했으면 좋겠는게 아니야. 뭐, 처음 적었던 것처럼 내 짐을 덜고 싶긴 하지만... .... 내가 친구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쉽게 나온 결론은, 내 주변에 두번다시 이러한 비극이 없었음 좋겠기 때문이야.
 여담인데 덤덤히 적어나가고 있다.
 먼저, 윤의 이야기 부터 적어나갈께. 윤은 심각한 우울증이 있었어. 조울증이라고 진단을 받긴 했는데, 내가 볼땐 그냥 우울증이야. 윤은 사실 자기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 남들도 자기랑 비슷한 고민을 하고 산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알턱이 없으니, 일단 나만 봐서는 윤은 나랑 많이 달랐어. 아마... 심각한 정신병이 있었다고 해도 맞을꺼야. 물론, 겉으로 보기엔 전혀 문제가 없었지. 일반 성인남자랑 다를바 없었으니까. 학생때도 그냥 게임 좋아하는 급식으로 보였고... ... 하지만 윤이 남긴 기록들을 보고, 내가 윤이었다면, 아마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을 것 같아.
 1. 윤의 이야기.*2016년 말 겨울 (추정) 꿈을 꾸었다.
항상 똑같은, 무지개를 보는 꿈을.
 
어느 작은 언덕 위에 올라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초원 중앙에 자그맣게 솟아있는 그런 언덕.
옆을 바라보니 벚나무 하나가 늙은이의 손가락처럼 위태로이 놓여 있었다. 오래된 줄기들은 대부분 벗겨져 있었고, 몇몇 가지들은 꺾어진 채였다. 검은 줄기 곳곳에는 흰 무언가가 덮고 있었고, 그건 벚나무가 죽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무는 자기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렸다.
뿌리내린 언덕위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을까. 못다 피운 벚꽃을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벚나무와 마주보았고, 곧, 그것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시린 겨울에 지쳐,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벚나무는 죽은 몸뚱아리를 언덕위에 두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어디로 간 걸까?
고민하며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았다. 갈 수 있을만한 곳은 없었다. 평지 위는 온통 초록색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나 바위나 이렇다 할 무언가가 전혀 없었다. 녹색 세상 위에는 작은 언덕과 죽은 벚나무와 나뿐이었다.
거리감을 잴만한 대상이 없기에, 평원 한군데를 콕 집어 바라보아도 그곳이 얼마나 먼지 알 수 없었다. 더 멀리 있는 지평선도 마찬가지. 그건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것 같기도 했고, 영영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이기도 했다.
별과 같다고 생각했다. 맑은 밤하늘에 수놓인 그것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 몇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책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기에, 한 천정위에 별이 붙어있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에 수긍할 수 있었다.
미풍이 불고 촉촉한 풀냄새가 났다. 고개 들어 바라본 하늘에는 놀랄 만큼 큰 무지개가 지평선 너머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무지개다.
흐린 말이 세어 나왔다. 무지개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손을 뻗어 잡아보려 했지만, 손바닥 위에 남은 건 옅은 손톱자국 뿐 이었다.
손가락사이로 세어 나오는 무지개를 보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모든 것이 익숙했다.
물기 머금은 풀냄새. 죽은 벚나무뿐인 언덕. 그리고 떠있는 무지개.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확신했다.
왜일까? 기분 탓일까?
벚나무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는 무지개를 가리켰다.
“무지개를 본적 있어?”
내 물음에 그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저건, 거리감이 전혀 없어. 넌 저게 얼마나 멀리 있는지, 혹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 수 있겠어?”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곁에 조심스레 다가가 나란히 섰다.
“땅에 맞닿아 있는 무지개를 보면 달려가 잡아보고 싶기도 하지. 뭐, 애초에 땅에 닿아있지 않을 뿐더러 엄청 멀리 있지만. 아니,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지개는 그저 물방울이 분산시킨 빛일 뿐이잖아? 저곳에는 무지개 따윈 없어. 빈 공간에 물방울만 떠다닐 뿐이지.”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무지개만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불안했다.
“저게 아름다워 보여?”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아름답다고? 저건 그냥 물일 뿐 이라니까? 컵에 담긴 물이랑 다를 바가 없어. 그런 걸 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야. 같은 것인데 저렇게 보일 뿐이잖아? 같은 거라고 ... ... 같은거. 본질은 같아. 수돗꼭지를 돌려 나오는 물줄기를 잡으면 무지개를 잡는 거고, 그 물로 세수를 하면 무지개로 세수를 하는 거야. 마시면 무지개를 먹는 거고! 저건 네 주변에 어디든 있어. 무지개는 절대 아름답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야.”
그가 쓰고 슬픈 웃음을 지었다. 다가가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무지개로 갈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무지개로 가고 싶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츰 무지개 쪽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더니 곧 달리기 시작했다. 무지개 속에서 무언가를 찾은 듯 했다. 그는 점차 작아졌고 자그마한 점이 되어 무지개 속으로 사라졌다.
무지개가 그를 잡아먹었다.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울며 본, 그가 떠나간 자리엔 그의 발자국 외에도 수많은 발자국이 있었다.
누구의 발자국 일까.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발자국일까. 우리의 친구들의 발자국일까. 우리가 마주쳐온 누군가의 발자국일까. 그에에 호소하듯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없다.
이젠 그가 없다. 대신, 작아지는 발자국 끝에 형형색색의 찬란한 무지개만 있을 뿐이다. 일곱 가지 색이 망막 속에 가득 차올랐다.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가까워 보였다. 무지개가 내 발목을 잡아당기며 나에게 속삭였다. 너라면 이곳으로 올 수 있다고. 네가 원하는 것은 이 속에 있다고.
어느새 나는 무지개를 향해 걷고 있었고,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무엇을 찾아가는 걸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저 곳엔 무엇이 있을까?
 
지평선의 끝자락에서 뒤돌아보니 언덕까지 발자국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 만개한 벚나무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손을 들어 올리며 높이 뛰어 무지개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꼭 쥔 주먹은 허공을 가를 뿐.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을 보지만, 좀 전의 뛰어오른 들판은 없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
계속해서 떨어지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벚나무가 죽지 않은 것을 알았더라면, 떨어지지 않았을 텐데 라고.
 
+
 
“푸하.”
폐 속에 얽힌 공기를 토해내며 잠에서 깼다. 묵직한 솜이불을 걷어내며 침대에 걸터앉는다. 옆에 누워있는 예지는 아직 잠들어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해가 막 떠오르려는 참에 방이 붉게 물들어 있다. 단색으로 물든 모든 것들이 정적을 넘어, 죽어있는 것 같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소리조차 내 움직임에 나는 바스락거림 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생기 있을 만큼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방에는 두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와 테이블 하나, 책상, 그리고 옷장이 전부다. 하나뿐인 옷장에도 대부분이 예지의 옷들이고 책상위에도 그녀의 화장품만 가지런히 있을 뿐, 내 물건 따위는 없다. 내 옷들은 두 박스에 담아 옷장위에 두었다.
그녀는 항상 그게 불만스러운 듯 했다.
“그런데, 짐은 언제 풀려고?”
어느 날 아침식사를 하다 예지가 물었다.
“짐이라니, 박스 말하는 거야?”
“응. 무슨 이유라도 있어?”
“이유?”
상자 속 짐들을 풀지 않고 그대로 두는 이유라, 딱히 없었다. 단순히 상자속 옷들을 꺼내어 정리하기 귀찮았을 뿐이었다. 필요한 옷이 있을 때, 꺼내어 쓰고는 입지 않을 때는 빨아서 넣어두면 그만이니까.
예지한테 말하니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거랑 옷장에 넣어두는 거랑 무슨 차인데?”
“차이? 차이는 없어. 그냥 저 짐들의 크기가 커지는 게 싫을 뿐이야.”
예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겠어.”
“내 느낌일 뿐이야. 짐은 작으면 작을수록 좋아.”
일도 그렇고 라며 말끝을 흐리니, 이상한 사람이야 라고 예지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넌 우리가 같이 살기 전부터 저렇게 박스채로 두었잖아. 침대는 커버 없이 메트리스 그대로였고, 이불은 속 알맹이 그대로였지.”
“그랬었지.”
“냉장고도 텅 비어 있었고, 식기구도 그릇 몇 개가 전부였어. 그 당시에 왔을 땐 도무지 사람 사는 집으로 보이지 않았지.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패트병 두 개 정도 였을 거야.”
둘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득 찬 옷장과 생기 있는 침대. 그리고 접시와 머그컵이 정렬된 주방이 보였다.
“이젠, 사람 사는 집 같지?”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대부분 내 물건이잖아. 봐봐. 네 물건은 하나도 없어. 저기 있는 박스 두 개랑 가방이랑 노트북 정도가 끝이야. 만약, 다른 사람이 와서 본다면 혼자 사는 집이냐 물을 걸? 둘이서 산다고 말하면 장난치는 줄 알거나 여자 둘 인줄 알거야.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면, 박스를 열어 보여주던 가 화장실에 있는 네 면도기를 보여주는 방법밖에 없겠지.”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예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여길 떠나고 나면, 네 흔적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거야. 이곳에 살아 숨쉬었다는 느낌이 하나도 없어. 완전히 없는 사람이랑 같지. 너가 지금 ‘나는 귀신이야’라고 말해도 믿어버릴 정도야.
... ... 그냥, 그냥 그게 아쉽다는 거야.
너에겐 여기가 집이야?”
“그럼, 집이지.”
“아니, 잘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밖으로 나갔을 때, 돌아가고 싶은 곳을 말하는 거야.”
돌아가고 싶은 곳.
“당연하지.”
눈 돌려 식탁위의 젓가락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행이야. 저것 봐. 저렇게 쌓아둔 짐을 보면, 떠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아. 그렇게 어느 날 훌쩍 저걸 들고 떠나버리는 거야. 나는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네가 없어졌다는 걸 깨닫겠지. 너무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널 기다리며 침대에 홀로 누워있다 문득 알게 되는 거야. 네 짐이 없어졌다는 걸 말야. 그리고 나는.”
예지의 말이, 그 끝이 갈 길을 잃었는지 뚝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머그컵 위에서 티스푼을 휘휘 돌리며, 그 말의 끝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바꾸려난 듯 했다. 그녀는 빙글 빙글 도는 크레마의 꼬리를 바라보다 -아마도, 슬플 거야.- 라고 말을 흐렸다.
“커피, 타줄까?”
“응.”
예지가 내온 커피는 그저 쓸 뿐이었다. 너는 여기가 돌아오고 싶은 집이야? 그녀에게 되묻고 싶었지만, 쓴 커피 탓에 입을 다물고 웃는 모양새 밖에 취할 수 없었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그래도 확실한건, 나는 너를.
“그럼, 짐 풀어둘게.”
“그래?”
예지가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그녀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고, 짐을 풀면 안 되는 마땅한 이유도 없었기에, 겨우 커피를 비우고 박스를 열었다. 박스에서 나온 건 계절에 맞는 두툼한 상의 몇 벌과 흰 셔츠, 청바지와 검은 면바지가 끝이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풀 짐도 없다.”
“그러게.”
예지는 감탄 아닌 감탄을 했고, 나는 아무 의미 없이 웃었다.
같은 옷장에 둘 때, 내 냄새가 그녀의 옷에 베이는 것이 싫지 않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자긴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걸?’ 이라 할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옷에 내 퀘퀘한 냄새가 배지 않을까 걱정했고, 내 옷에 그녀의 향수 냄새가 배는 것이 싫었다.
그래, 섞이는 것이 싫었다. 가끔 그녀의 물건과 내 물건이 섞여있는 방을 보고 있자면, 이유 없이 머리가 지끈거리곤 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짐들이 모두 박스 속으로 되돌아갔다. 입고 빨아서 개어 놓다보니, 어느새 모든 옷들이 박스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원래대로 되돌아갔네?”
예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붉은 방 속에서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한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두통이 심하다. 어떻게 집에 왔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걸 보니, 필름이 끊겼던 것 같다. 씻기 위해 옷을 벗어 던지고 거울을 보니, 왠 괴한이 서있다. 덥수룩한 머리와 퀭한 얼굴 속 짙은 다크서클, 그리고 마른 몸. 정말 볼품없어 보인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를 다스리며 손바닥으로 뺨을 두어 번 두드린다. 다 괜찮아졌을 텐데 왜 이런 모습일까. 거울에 서있는 녀석은 상품으로 따지면 불량품. 도저히 팔 수 없는 상품이다. 이런 자신을 예지가 왜 사랑해주는지 이해 할 수 없고, 이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동정이나 연민 위에 있는 얄팍한 애정이 아닐까.
씻고 나오자 예지가 깨어나 솜이불 속에 몸을 동그랗게 말곤 눈을 깜빡이고 있다.
“일어났나 보네.”
“응. 물소리가 나서 말이야.”
예지가 눈 비비며 손바닥으로 침대를 두드리곤 이리오라 한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앉아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다.
“눈이 부어도 예쁘네.”
“알아.”
아무 감정 없는 말에, 그녀가 베시시 웃고는 내 목을 감싸 안으며 키스를 한다. 나는 바지춤을 움켜쥔다. 인상을 찡그렸을지도 모른다. 차가운 입술에 따뜻한 기운이 맴돈다.
그렇게 더 이상 따뜻한 느낌이 들지 않을 때까지 키스하고 나서야 그녀가 내 목을 놓아준다.
“차가워.”
“머리를 덜 말려서 그래.”
그녀의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닦아주고 옆에 나란히 눕는다.
“어제 바다에 갔었어?”
“응. 어떻게 알았어?”
“들어올 때 너한테서 바다 냄새가 나더라고. 싫진 않았어.”
“그래?”
새벽에 깨어있었나 보구나.
“어제 비도 왔는데 무슨 일로 간 거야?”
베개 속에 얼굴을 묻는다. 어떤 일? 목 끝까지 말이 올라왔다가 물에 빠진 사람마냥 숨이 턱 막혀 버린다.
“그냥. 바다에 가고 싶었어.”
“혼자?”
“응.”
“술도 마시고?”
“응.”
“오늘 나랑 같이 갈까? 나도 가고 싶어.”
예지가 대끔 물었다. 오늘? 예지와 함께? 잠시 고민한다. 가게 되더라도 광안리 해수욕장만 가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오늘, 일 끝나고 저녁에라도 갈까?”
“좋아.”
예지가 기뻐하며 웃는다. 소리 없이 배게 속에 긴 숨을 내뱉는다. 매번 말하고 싶은 것을 왜 말하지 못할까. 작은 일조차 사실되게 말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내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하지 못하고, 내 머릿속에 누가 있는지도 말하지 못한다. 또, 내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차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않고 숨긴들, 거짓으로 말한들 무슨 상관일까. 반대로, 진실을 모두 말하는 것도 무슨 상관일까.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달라진다 한들, 나는 달라지는 것이 두려울까?
차피, 나는 너를.
창 밖을 바라본다. 너머의 하늘은 붉은 빛을 차츰 잃어가고 있다. 붉은색과 남색의 경계선 상에 희미한 붓질이 되어 있는 듯하다. 자세히 바라보니 얇은 선 안에 세상의 모든 색이 담겨져 있다.
무지개 같다.
무지개라, 나는 달라지는 것이 두려운가?
“오늘 이상한 꿈 꿨어.”
갈라지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내게 기대어 있던 예지가 천천히 눈 뜨며 나를 올려다 본다.
“어떤 꿈?”
“무지개를 보는 꿈이야. 엄청나게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는 꿈. 그리고 내가 그 무지개를 향해 가. 있잖아, 너라면 무지개로 갈 것 같아?”
“잘, 모르겠어. 그런 꿈, 신경 쓰지 마.”
예지가 양 팔을 내 어깨에 걸치며 나를 안는다. 그녀의 대답은 맞는 말이었다. 왜냐면 나도 옳은 정답을 모르겠으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셔츠 위에 니트를 입고는 코트를 둘러 나갈 채비를 한다.
“오전 수업이지?”
“응. 너는 오늘 오후부터지?”
“맞아. 아침 안 먹고 가도 되?”
예지가 침대에서 일어나 다가온다.
“괜찮아. 가는 길에 사먹으면 돼.”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갈래?”
문 밖으로 나서며 대답한다.
“아니. 나, 커피 싫어해.”
천천히 닫히는 철문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고, 그 속에서 예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
한기가 스며든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간다. 빌라 입구 귀퉁이에 거미줄이 쳐져 있다. 중앙에 나비가 걸려있고 귀퉁이에 있는 거미가 나비 쪽으로 다가간다. 나비의 흰 날개가 움찔거린다.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네.
두어 번 고개를 젓는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무시하고, 외면하며, 무관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에겐 그들에게 관여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오래전 들은 말이 생각난다. 그게 옳은 일일까? 틀리다 하더라도 이 말을 한 시은은 맞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벙어리가 되었다, 그 말이 옳은지 틀린지 시은에게 말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서, 언젠간 그 답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미 한겨울의 흰 나비는 더 이상 의문할 것이 아니게 되었다.
‘윤, 너는 무지개로 가고 싶어?’
그 답도 시은에게 하지 못했다.
칼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목도리를 두르지 않은 것에 후회하지만, 몸은 이미 버스 정류장에 있다. 고개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온통 아파트뿐이고 하늘은 그것들 사이사이로 겨우 숨 쉬고 있다. 그 틈 사이로 붉은 태양이 떠 있다.
버스 두 대가 지나갈 동안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 결과 눈 앞에 잔상이 남았다. 검은 잔상은 눈을 움직일 때마다 빙글빙글 굴러다니고, 그덕에 어지러움을 느낀다. 손바닥을 펼쳐 잔상을 손 위에 올려 둔다. 잡아보지만, 이내 멍청한 짓임을 알고는 포기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둥실. 둥실.
검은 공들이 허공에 떠다닌다.
 
그건 그때 본 호숫가 속 불빛과 닮아 있었다.
그건 그때 본 바다 속 불빛과 닮아 있었다.
 
저것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가까이 있는 걸까.
멀리 있는 걸까.
 
비과학적 고민을 하며 삼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한다. 시은이라면, 이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차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는, 내 과거와 시은과 지아와 같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한다. 무지개로 가려고 해도 무지개조차 없는 내 인생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되는지 고민하며 가슴속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애타게 부른다.
애석하게도 내가 부르는 이들 속엔 예지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예지를.

그러니까,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사랑한적 조차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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