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품이 큐티 ^ ^
{마가복음 4:30 ~ 32}
[참 쉼이 되신 우리 예수님]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원어사전:
왕국 kingdom:
basileiva(932, 바실레이아)
3. 신약성경의 용법(1).
명사 바실레이아는 신약성경에서 16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왕권, 왕정'(눅 1:33 눅 22:29 눅 19:12, 눅 19:15 행 1:6 고전 15:24 히 1:6 히 11:33 계 17:12 등)
(b) '왕국, 왕토'(마 4:8 마 12:25 마 24:7 막 3:24 막 6:23 막 13:8 눅 11:17 눅 21:10 등)
(c) '하나님의 왕국(나라)'
① '하늘나라'(마 3:2 마 4:17 마 5:3, 마 5:10, 마 5:19).
② '하나님의 나라'(마 12:28 마 21:31, 마 21:43 막 1:15 눅 4:43 눅 6:20 요 3:3 행 1:3 행 8:12 롬 14:17 고전 4:20 등).
③ '아버지의 나라'(마 13:43 마 26:29).
④ '인자의 나라'(마 13:41 골 1:13).
⑤ '주의 나라'(딤후 4:8 벧후 1:11).
"천국" 곧 '하늘 나라'는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한 인간으로 인간 역사 안에 들어왔을 때 시작하였다.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마음에서 통치하신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삶을 주관하도록 허락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게 되며 믿음으로 그 최종적 완전한 실현을 기다린다.
그러나 천국은 세상에 있는 모든 죄가 심판을 받아 제거될 때까지 완전히 실현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초림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후일 승리자로서 온 세계를 다스리는 왕과 심판자로 재림하실 것이다. 그의 재림과 더불어 천국의 최종적 완전한 실현이 올 것이다(참조: APB. DSB).
깃들일 만큼:
kataskhnovw(2681, 카타스케노오)
장막을 치다, 살다, 거주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타스케노오(X. 이래)는 카타(katav, 2596)와 스케노오(skhnovw, 4637: 천막을 치다, 살다, 거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장막을 치다, 장막에 들어가다, 진을 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카타스케노오는 70인역본에서 약 66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칸 또는 샤켄(7931: 정착하다, 거주하다, 머무르다; 민 35:34 왕상 6:13 대상 23:25), 야샤브(3427: 앉다, 남아있다, 머무르다, 거주하다; 대하 6:2 겔 25:4)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카타스케노오는 주로 오랫동안 머무는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민 14:30 신 33:12 시 16:9 잠 1:12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이다. 미 4:10의 요지는 도시보다 시골에 사는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카타스케노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온다.
(a) 막 4: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만큼 되느니라"(병행구, 마 13:32 눅 13:19 참조: 단 4:12 단 4:21). 본 절의 개념은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가는 정도가 아니라 가지에 깃드는 것이다. 이 비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안전과 평화의 통치를 암시한다.
(b) 행 2:26(시 16:8 이하 인용),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여기에서 소망은 거하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두어도 무방할 장소에 있다. 그러므로 카타스케노오는 부활 때에 완성될 '살아가다'라는 절대적 의미를 지닌다.
# 이전엔 복음이 왕성하게 자라나는 능력을 이삭에 비유하였습니다. 이번 본문에는 알곡이 아닌 연약한 새들에게 쉼을 주는 가지와 잎이 있는 겨자나무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적 자연문화는 잘은 모르고 책이나 잠시 여행을 다녀온 분마다 다르게 이야기하여 겨자나무가 어떠한 나무인지 잘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겨자나무 사진을 보면 열매는 없지만 쉼을 주기에 충분한 높이와 넓이의 크기입니다.
이와같이 복음에는 능력이 있는 것을 봅니다. 저 사람이 또는 이 복음이 얼마나 남들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 의아해 하지만 지나고 보면 누구보다도 선한 마음과 행실로 남들에게 결과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자로 또는 교회로 복음으로 남 모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누구에게나 제약성을 두지 않는 것을 봅니다. 길거리의 거대한 겨자나무는 누구에게나 와서 그늘에 쉼을 얻을 수 있으며 강제성을 띠지 않아 그양 쉬고 떠나도 상관이 없고 아무 때나 다시와도 제한하지 않습니다. 새와 짐승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이든 헬라인이든 동양인이든 한국인이든 제약없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심으로 다 누구든 친구가 되어주며 주님과 함께 함은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를 찾아오는 새와 같이 새는 이곳에서 사람에서의 쫓김에서 가지와 잎새로 가리움을 받으며 그늘의 쉼을 얻듯이 복음이 있는 교회는 연약한 자에게 보호와 쉼을 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의 역할은 탈북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하면 강을 넘어 중국에 오면 제일 먼저 사람들이 십자가를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의미하며 그 곳에서 쉼과 양식을 무상으로 공급 받으며 일자리를 얻거나 한국으로 탈출 할 수 있는 루트와 사람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들이 실제 많은 선교사를 통해 한국에 보호를 받으며 넘어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나의 역할은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환란을 당한 자에게나 영혼육의 완전한 쉼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외면 당한자 배척을 당하자 괴로운 자가 교회나 우리게 찾아오면 우리는 마땅한 쉼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는 자랑스러우면서도 부끄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 역할을 하고 있는거 같아도 피곤하고 내가 부족할 때는 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짜증을 때론 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남에게 그 쉼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횟수는 크리스찬으로서 줄여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너무 이기적인 세상을 봅니다. 기사를 보다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혼하는 기사를 볼때가 있죠 혀를 둘러 기차다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가 바늘구멍 들어 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부자가 왜 어려운가 갑자기는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강화된 이기주의적 습성인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또는 부자의 기간이 오래 되면 너무나 쉽게 모든 걸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모든 물질을 얻듯 사람의 마음도 얻어 자신이 사람을 조종하고 사람의 주인이라는 착각을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쉼이 아닌 가시의 사람이 되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만 알게 되고 타인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사이가 나뻐지고 이혼이나 파면 또는 극단적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극단적 예를 들면 북한 독재의 숙청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은 많은 범죄를 범하고 하나님도 모르고 무시하며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여 남을 존중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인간을 이해하고 그 겸손 가운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얻고자 스스로 가난과 함께 낮아지신 분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고통 속에 인간을 알고 그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 속에 함께하고 대신 하시고 종국에는 죽음까지도 함께 하고 대신하시어 하나님의 완전한 겸손의 통치 속에 들어 가신 분입니다. 기독교는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고 이해하여 그들의 마음을 알고 적절히 보살피고 함께 살아가고 살리는 진리인 것입니다.
또한 복음이 있는 교회의 몸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보호자가 되시어 사단의 악령으로부터 보호함을 주시고 공의의 심판으로부터 아들 예수님의 제물되심으로 대신 속죄함을 받게하시는 보호를 누리게 하십니다. 아들 예수님의 보호아래 그늘 아래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 깃들이는 그늘은 깃들이는의 원어 뜻같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거주하는 것이고 종국에는 영원한 부활 후의 나라인 것입니다. 세상 어느 것보다도 가벼운 것이 예수님과의 멍에인 것입니다. 인내하시고 같이 예수님과 메고 동행하시어 보호와 대속의 용서와 천국처소에서 영생을 같이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쉼을 주는 나무를 생각하면 전에 우리 집 정원의 큰 나무가 생각이 납니다. 너무 잘 자라서 매년 가지를 잘라주고 때론 뿌리까지 잘라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잘 자라서 늘 우리 집에 그늘이 되어주고 온도를 낮추어주고 쉼이 되어주는 나무입니다. 비록 이삭같은 열매는 없어도 집에 고양이와 사람과 우리 집을 지나는 새와 나비등에도 좋은 쉼이 되어 줍니다. 누구든 이 나무가 쉼이 되어주듯이 저와 우리 모든 크리스찬이 복음 안에서 남들에게 쉼과 즐거움과 겸손과 온유를 심어 줄 수 있는 큰 그릇 큰 나무가 되어줄 수 있는 형제 자매님들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짐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큰 힘이 되어 도와 끌어 주시는 거대한 불도저와 같습니다. 같이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 주시는 성경과 기도 생활과 예수님의 몸이 되신 교회의 연합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인생의 이끌어 주시는 거대한 불도저요 죽은 뒤에 하늘나라 여행을 향한 거대한 항공기와 같습니다. 인생의 풍랑 속에 거대한 항공모함과도 같습니다. 짐이 아닌 우리의 발을 든든하게 하는 거대한 반석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처음 사랑은 분명히 발전하여 남에게 꼭 쉼이 되어질 수 있는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질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이 진리가 그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처움 주님을 사랑했을 때의 그 열정을 회복하고 그 열정을 지나 새로운 믿음의 도약으로 창대하게 성장하여 남에게 큰 쉼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발전에 큰 힘과 영광 되어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많습니까 세상적인 비교로 원망하고 하나님께서 셀 수 없는 은혜를 주신 것을 잊어 버리고 원망의 셈을 하고 살았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떠나려 했던 적을 얼마나 많았던지요 용서하여 주옵시고 주님의 온유함과 겸손의 그늘에서 떠나지 않케 하옵시며 늘 그 사랑안에 거하여 참소망인 영생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진리는 날선 검과 같이 살아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성장하게 하시사 남들에게 쉼과 유익을 주는 삶으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러한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가 되어서 사회에서 기쁨과 쉼을 모두 주는 명성과 칭찬이 가득한 모든 크리스찬들이 되어 주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