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화가라는 것이 전무 했던것은 아니었지만. 공식적으로 화랑에서 거절을 당한다거나 클럽의 맴버로써
조차 받아들여 지지 않았던게 오만한 남성 우월적 화랑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큰 임팩트를 가진 부류는 아니었지만 마이너로써 꾸준히 예술혼을 불태웠던 여성 화가들 ,그중에 30명의
여류화가들 하나들이로 묶은 양장본 화보가 아닌, 당당히 자신만의 화보집을 펼쳐 낼수 있는 인기 절정의
여류화가 두명을 이곳에서 소개 해 볼까 합니다. 동시대에 활동한 경우 이지만 삶과 작품에서도 판이하게 다른 자취를 남긴 두 캐릭터의 이야기.
폴란드 바르샤바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마리아 고르쉬카(maria gorska)였으나 결혼후
남편의 성을 따라렘픽카로 개명 합니다. 스위스에서 사립학교를 나오고 여름이면 프랑스의 호화 휴양지
리비에라에서 휴가를 보냈습니다.
볼쉐비키 공산당혁명이 일어났을때 그녀는 파리로 망명하게 되었고 그림을 배우기시작합니다.
그녀는 사교계의 꽃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를 닮았는지, 사교계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며 파리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떠오릅니다.
그와 함께 그녀의 타고난 예술성은 어디를 가나 박수를 받게 됩니다.
피카소와 앙드레 지드, 장 콕도등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돈독한 우정을 쌓았으며 그녀의 독특한
아르데코(art-deco)스타일의 화풍또한 소프트 큐비즘(soft cubism)이라는 찬양과 함께 새로운
예술 장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녀의 타고난 미모는 그녀의 명성을 보다 장미빛으로 장식했으며 동성애적 성향으로 남성과
여성 애인을 두고 자연히 남편과 떨어진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밖에 없던 딸이던
키젯(kizette)또한 할머니의 손에 맞겨저 소녀시절을 보냅니다. 두번째 남편은 커프너(baron kuffner) 남작으로써 그녀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고,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전세계를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대 공황의 여파에서 멀리 벗어나 부유한 삶을 살았습니다. 직감적으로 전쟁이 일어날것을 안 렘픽카 부부는 유럽보다 안전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베벌리 힐즈에서 오랜 휴가를 보내다 결국엔 정착하게 됩니다. 그녀는 그 기간동안에도 미국에서 여러 전시회를 열었고 화려한 개성미를 자랑하는 아르데코 물결의선동자가 됩니다. 1980년 맥시코의 켈르나바카 에서 82세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유해는 화산속에 뿌려지게 됩니다.
처음 자신도 전쟁 난민이었던 그녀였고 러시아 혁명에 떠밀려 내려온 동지들을 그리긴 했지만 얼마
안가 사교계의 화려한 삶을 영위하게 된 그녀는 스폰서로써 처음 만났던 커프너 남작을 비롯해 스페인의
알퐁소8세,그리스의 엘리자베스 여왕등 화려한 상류층의 인물들을 화려하고 유혹 적인 화풍으로 표현한
그림을 주로 그리게 됩니다. 그녀의 그림의 주제는 언제나 데카당트 한 퇴폐적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녀의 죽음 이후 소멸해 갈듯했던 그녀의 파워는 마돈나의 뮤직비디오 vogue로 되살아 나게 됩니다.
보그의 뮤직비디오 세트 디자인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아르데코 스타일 흑백 지오메트릭 스타일로
꾸며 졌으며 마돈나 자신도 그녀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네요. 스스로 예술과 사교계에서 디바였던 그녀는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는 삶에서는 승리한 인물이라고 볼수
있겠네요. 그녀가 어떻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으나 표면적으로 볼때 굶주림의 고통도, 육체적인 괴로움도
그녀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아르데코 시대의 화려한 상류사회와 자신의 정체성(그녀는 양성애적인 성향의 이미지를 작품에 많이 담았습니다.) 을 나타내는 그림들, 아래 그린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그녀의 대표작 중의 하나 입니다. 최고의 유행 패션과 최고의 인물들, 그녀의 그림에서 잘 나타나내요.
비록 자신의 화려한 삶에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딸 키젯을 멀리 했었으나 키젯은 그녀의 예술에 부정할수 없는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림 가운데는 --잠을 자고 있는 키젯-- 강열한 아웃라인과 과장된 신체선.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백그라운드는 그녀 작품의 트레이드 마크 였습니다. 더이상 잃을것이 없다.(she had nothing to lose)----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공산당원, 남편의 외도로 인한 고통, 평생을 따라다닌 육체적 고통...그녀의 그림은 그림이라기
보다 그녀 일생의 일기장이라고 하는것이 맞을것 같네요.
맥시칸 최고의 심볼리즘,초현실주의 아티스트 프리다 칼로는 독일인 헝가리 혼혈 아버지와 맥시칸
스페니쉬 혼혈 오리진 (아...복잡한 과일셀러드 혼혈이네요..)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6살때 소아마비 증세로 인해 오른쪽 다리가 비정상 적으로 마른 후유증을 가졌던 그녀는 1925년 그녀가
타고 있던 버스가 트럭과 충돌하면서 척추,늑골,갈비뼈,골반뼈 파열, 그리고 12조각으로 파열된 오른쪽 다리,
뭉개진 오른쪽 발, 골절된 어깨 그리고 핸드레일이 그녀의 배를 뚤고 자궁막을 손상시키는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살아난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고통을 겪고 일어난 그녀지만 후에 그 사고로 인해
그녀는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고 35번이 넘는 재 수술을 받게 됩니다.
뱃속의 아이를 잃은 슬픔, 밤이고 낮이고 찾아오는 육체적 고통은 그녀의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으로
뼈저리게 표현 됩니다. 유러피언의 피겨에 가까운 미모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여인으로써의 과장된 미모를 부정하며 면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얼굴을 유지했으며, 그 결과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과 순악질 여사???????
를 떠올리게 하는 가운데가 이어진 짙은 눈썹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자랑스러운 맥시코인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현대적인 의상보다 맥시코 고유 의상을 고집합니다.
폭풍같던 결혼 생활 또한 그녀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당시 최고의 아티스트였던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의 아내가 됨으로써 세상에 코끼리와 도브(elephant & dove-디에고는 186cm에 139kg 이었고 그녀는 160cm44kg 의 몸집을 가지고 있었기에..)로 불려지게 되었으나. 행복한 결혼생활은 잠시.. 그녀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게된 리베라는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은 재결합을 하게되고 리베라는 그녀의 죽음까지 함께 하게 됩니다. 솔직히 바람을
핀 상대는 리베라 만은 아니었고 그녀 또한 여러 소문을 내긴 했습니다.^^ 부창부수???그녀 또한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로 기반을 다지던 초기의 그녀의 작품은 열렬한 공산당 지지자로써 미국의 글로벌리즘에 반대하는
작품들과 산업화에 노예가되는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그림들을 주로 그렸으나 그녀의 개인적인 고통은
사회의 문제거리보다 그녀를 더욱더 옥죄이게 했나봅니다.(그녀는 스탈린의 지배하에 있던 소련과 모택동을
공공연히 최고의 정치체재로 꼽기도 했다네요.)1954년 짧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는 따라다니던 골치꺼리였던 오른발을 잘라 내야만 했고 결국엔 폐와 혈관이막히는 폐색전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자살이었다는 루머도 있었으나 그녀의 시신에 대한 부검은 시행되지 않았고 그녀의 유해는 그녀가 사랑했던 일명 푸른집-la casa azul 에보관됩니다. 사후에 공개된 그녀의 일기장에는 "떠나가는것이 즐겁기를 바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네요.
평생을 고통속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굉장한 에너지를 발산하였으며 모든것에 열정
적이었다고 합니다.
꼴초이기도 하고 주당이기도 했고, 농담을 아주 좋아하는 톰보이 이기도 했으며 파티 에니멀 이었던
그녀는고통조차 자신인생의 필수요소로 만들어 버리는폭풍과 같던 삶을 살다 갔습니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약한 몸을 가진 자신을 처절하게 찢겨진 몸으로 표현한 작품. 작품안에는 자신의 부서진 골반과 자라다 사산된 태아,디에고가 선물한 시든꽃, 수술장비등이 표현되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들의 결혼, 코끼리와 비둘기로 표현되었던 그들의 자화상.
디에고에게 사랑받았던. 그리고 후에 버림받았던 자신의 자화상의 두명의 프리다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심장은 붉고 정열적으로 뛰고 있으나 또다른 심장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