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에 눈을 떠 핸드폰의 부재중 전화가 있는지 살펴보고 어떤 통화기록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혹시 민준에게서 회신이 오지 않았을까 해서였다.
아니다. 민준에게서 메일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새 메일함에 민준의 다른 이름인 '이영만'으로 온 메일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너무나 기다림에 지쳐서 기쁘기 보다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우야.
나도 너 만나고 싶다.
미안하다. 그 동안 바빠서 연락도 잘 못하고.
오늘 저녁에 시간 비워놓을게.
너도 괜찮지?
전화할게.
보고 싶다. 사랑해.
여전히 변함 없는 민준의 메일이었다.
잠시 연실이 보낸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연실을 믿고 싶었다.
내가 연실과 만났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처럼 연실도 말하지 않고 민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오늘 저녁에 민준을 만난다면 나는 일생일대의 두 개의 일을 한꺼번에 맞딱드리게 되는 거였다.
한 가지라도 내일로 미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한꺼번에 겪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내일이면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프리젠테이션 성공으로 일 년동안 회사에서 어깨 피고 다니며 더 이상 야근까지 해가면서 시달릴 필요도 없을 테고, 또 민준과 연실의 스캔들 따위로 신경쓰지 않으면 민준과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그 반대가 된다면?
그렇다면 회사에서 1년 동안 다른 팀과 비교당하며 눈치 보며 살아야 할 것이고, 이번 건을 만회하기 위해 다른 일거리를 찾아 다녀야 했다. 그리고 민준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몇 년 동안 남자를 멀리하며 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일은 일어날리도 없고 그 때 가서 대처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즐거운 미래를 상상하며 행복해 하는 것이 여러 모로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오랜만에 세팅을 하고, 무슨 옷을 입을까 생각하다가 김대리 말이 생각나서 '베이지색 정장'을 입기로 했다. 내가 '베이지색 정장'을 가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김대리가 내가 '베이지색 정장'을 갖고 있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다. 그렇게 민감한 성격은 아니었다.
헤어스타일이 바뀌어도 이삼일 지나서 '팀장님 머리 바뀌셨네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김대리는 내가 베이지색 정장이 없었다면 사 입으라는 것이었을까?
프리젠테이션을 위해서 옷 한벌을 사라고?
김대리가 정보 수집에 뛰어난 것은 인정한다. 그리고 서글서글한 성격 탓인지 발도 꽤 넓은 편이다.
여자보단 남자에게 더 인기가 많은 스타일의 남자니까...
그래서 만난지 얼마 안된 리츠칼튼호텔의 홍보 사원하고 벌써 친해져서 살짝 우리 컨셉을 알려주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다고 했다.
농담은 썰렁해도 일에서만은 열정적이고 진지했다.
그래서 아버지 생일 잔치를 리츠칼튼호텔 분위기 알아본다고 일부러 그곳에서 했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본 내가 리츠칼튼호텔에서 쓰러진다는 건 일 외에 다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다 자기가 아는 것, 생각하는 방법대로 타인을 보니까...
그러나 이렇게 무책임한 발언은 정말 용서할 수 없었다.
만약 베이지색 정장이 없어서 못입었다면 하루 종일 얼마나 기분이 찝찝했을까...
나는 정성들여 화장을 마치고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한지우~ 넌 잘 할 수 있어.'
속으로 외치며 미소를 지워 보았다.
거울 속에는 스물 아홉살 보다 더 예쁜 서른 살의 내가 있었다.
오후 2시, 리츠칼튼호텔 연회장에서 우리 팀의 프리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김대리가 준 사전 정보에 의하면 우리 보다 앞에 오전 11시에 발표한 팀이 반응이 별로 안좋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감도 있었다.
"저는 리얼 인터내셔널 홍보부의 차장 한지우라고 합니다."
라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늘 저희는 리츠칼튼호텔의 홍보 컨셉, 방법 효과 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쪽 보조 의자석에 있는 김대리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김대리는 그쪽에서 노트북으로 파워포인트 문서를 실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설명에 따라 시기적절하게 페이지 넘김을 해주어야 했다. 페이지 넘김이 별일 아닌 것 같지만 호흡이 잘 맞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프리젠테이션 효과는 반으로 줄어들 수도 있었다.
나와 김대리는 연습한대로 무사히 설명을 마치고 나는 질문이 없느냐고 물었다.
"여성 고객을 공략한다고 하는데 구체적 방법이 어떤 건가요?"
김대리가 준 정보에 의하면 마케팅 부장이 틀림 없었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나면 제일 먼저 질문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경우 계속 말꼬리를 잡고 질문한다고 했다.
"여자들에게는 그런 심리가 있습니다. 똑같은 남자라도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보인다는 거죠.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길거리에서 보는 거랑 리츠칼튼호텔에서 보는 거랑 다르다는 겁니다......"
나는 여성 고객 공략법의 배경을 서두로 꺼낸 후에 방법을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마케팅 부장은 만족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젠테이션 제목을 '백마 탄 왕자가 기다리는 곳, 리츠칼튼'이라고 했는데 이벤트에서 직접적으로 홍보하는 방법이 없네... 백마라도 몇 마리 데려다 시승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김대리가 말한 '베이지색 정장'을 좋아한다는 사장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저런 엉뚱한 발언을 하는 바람에 엄숙한 분위기에서 나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백마 탄 왕자가 기다리는 곳이라고 백마를 가져온다는 것은 정말 단순한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곧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에게 직접적으로 개념이 다가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다른 제안을 했다.
"말 대신 마차는 어떨까요? 왜 신데렐라에 나오는 호박이 마차로 변했다는 거요. 여자들에게 그곳에서 사진도 찍게 하고요."
"마차라, 그거 좋군. 백마보다 돈도 안들고 관리도 쉽고..."
사장의 그 대답에 다들 얼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 후에 몇 개의 질문이 이어졌으나 잘 대답했고 다들 만족해 하는 얼굴이라서 기쁜 마음으로 프리젠테이션을 마쳤다.
오늘 같은 날이면 김대리를 비롯해 하연과 은수에게 같이 저녁을 먹고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해야 될 테지만, 나는 민준과의 약속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김대리가 셋이 함께 자축파티라도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혼자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가서 잠시 음악을 들으며 민준의 전화를 기다렸다.
민준은 약속대로 전화를 했고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리츠칼튼에 있다고 말하기 싫어서 회사에 있다고 했더니 회사로 데리러 온다고 했다.
어차피 나도 차를 회사에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회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민준은 예전에 만났을 때처럼 패라리를 몰고 나타났다.
차에서 잠시 내려 조수석 쪽의 문을 열어주는데 모델 훈련을 받아서인지 전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전에 쓰던 향수가 바뀌었는지 향기도 달라져 있었고
헤어 스타일도 굵은 웨이브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3년 전의 아르바이트생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김미나의 약혼자로 못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저 남자 모델인가봐'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잘 있었어?"
내가 차에 타자마자 민준은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내 몸을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던 손길이었다.
"응."
나는 가슴이 떨려서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 얼마나 보고 싶었어?"
민준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여전히.
"...."
나는 좋으면서도 오늘 해결해야 할 일이 생각하니 머리 속이 복잡해서 금방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양평갈까? 시내는 이제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응."
나는 민준이 가자고 하는 곳이라면 지옥도 갈 수 있었다. 단 그의 마음이 진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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