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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감사드려요.
답글에 대한 답글도 다 달아놓았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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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직 수암은 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빨리 나왔나. 빼놓고 온건 없겠지?’
찬찬히 발끝부터 살펴봤다.
‘퍼펙트! 근데 이건 뭐야?’
주머니에 수상한 오징어다리가 있었다.
주머니와 손 안 가득 오징어 냄새가 풀풀 나고 있었다.
‘이런 게 언제 주머니에 들어간 거야?’
오징어 다리를 버리려는 순간 수암이 나타났다.
어쩔 수 없이 오징어 다리를 다시 주머니로 넣고 말았다.
“벌써 나와 있었네. 많이 기다렸어?”
“아뇨. 방금 나왔어요.”
“그럼 갈까?”
수암은 시내로 영화를 보러가는 보통의 차림이었다.
하늘색 스트라이프 남방에 청바지 그리고 액센트를 주는 썬그라스.
그러나 역시 수암은 보통으로 보이지 않았다.
보통 여자들이 한눈에 뻑이 갈 정도.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쩝.
그때 우리앞에 멈춰서는 진주빛 중형차.
‘꽤 비싸다는 승용차인데. 평소 꼭 타보고 싶었던 걸 알았나봐. 이런 걸 타고 다니나부지. 완전 백마 탄 왕자님이잖아.’
“타자.”
“네.”
나와 수암은 같은 뒷자석에 앉았지만 차 내부가 워낙 커서 가깝게 앉을 수는 없었다.
‘넓은 게 좋지만은 않군. 아쉽다.’
그러나 3분쯤 왔을까?
“내리자.”
‘벌써 내리라니? 여기 영화관 있다는 말은 못 들어 봤는데.’
“여기서요?”
“응. 시내까지 지하철 타고 가야지. 역까지 걸어오는 게 귀찮아서 탄 건데.”
편하게 갈 수 없는 게 조금 섭섭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백마는 없어도 왕자가 있으니까.
‘왕자 없는 백마가 무슨 소용이랴. 지하철을 타면 여자들이 모두 부러운 시선을 보내겠지. 헤헤.’
문제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계단이었다.
발육부진인지 계단에서 구른 게 몇 번이던가.
계단만 보면 겁부터 났다.
수암과 함께라면 가시밭길이라 해도 물러 설 수는 없는 일.
하지만 수많은 계단에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고 있었다.
“왜 그래?”
그런 나의 모습을 수암도 본 모양이었다.
“계단이 무서워서요.”
싱긋 웃는 수암.
“나 잡아. 그럼 괜찮지?”
‘그럼 괜찮고 말구.’
잡은 수암의 팔뚝은 보기보다 단단했다.
계단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수암 때문에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혜림아!”
그때 날 부르는 건?
뒤돌아보니 멀대였다.
당황스러웠다.
‘하필 이럴 때 마주칠 게 뭐람. 이젠 보고 싶지 않은데. 새 인생을 살고 있는 중이란 말이야.’
“맞다. 너 이 동네 살지. 이렇게 우연히 만나네.”
능청스러운 연기.
대단하다 강혜림!
영화 관계자가 봤다면 바로 길거리 캐스팅 감일텐데.
곧 수암과 함께 있을 때 마주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같이 이런 일로 복수했다는 생각이 들다니.
“잠깐 얘기 좀 하자.”
수암 선생을 한번 보더니 멀대는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려했다.
‘인기 많다는 것도 귀찮은 거구나.’
“너 왜 그래?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면 되잖아.”
손목을 뿌리쳤더니 멀대는 의외로 순순히 손목을 놔준다.
“잠깐이면 돼.”
수암에게 돌아가야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수암이 말했다.
“나 먼저 내려가 있을게. 얘기 끝나면 내려와. 오래 걸리지 않지?”
수암은 잡을 새도 없이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저 매너. 뒷모습만 봐도 흐뭇하다.
“뭔데 ? 빨리 말해. 나 시간 없어.”
“미안해.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잠도 못 잔 상태인데다가 안 좋은 일이 생기니까 짜증이 많이 났었나봐. 말로 사과한다고 될 일은 아니겠지만.”
“너에게 안 좋은 일이 맞아? 오히려 잘됐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고?”
나에게는 더 이상 멀대의 변명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이유도 없었다.
이젠 얼굴 마주 하는 것도 싫었다.
“네가 좋아.”
멀대가 말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고백을 해올 줄은 몰랐었다.
“난 싫어. 날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니까 말리지는 않을께. 미안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나 이만 가볼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 사람이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간다.”
‘이젠 그냥 내가 행복하길 빌어줘.’
이 정도면 멋지게 복수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아름다운 뒷모습만 보여주면 되는데.
쿠당탕.
계단에서 굴러버리다니.
아름답지 못한 뒷모습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