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이 백정 같은 놈아."
"백정만도 못한 놈."
만약 오늘날 이런 욕을 듣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몹시 화를 낼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백정은 소나 돼지를 잡는 천한 신분의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백정은 일반 양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 간호사를 '백의'의 천사라고 한다. 또 우리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도 한다. 이때 '백의'란 흰색 옷을 말하는데 원래는 색깔이 없는 옷이란 뜻이다. 즉 백(白)은 '없다' 또는'아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백정(白丁)'은 '정(丁)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 '정(丁)'은 무엇을 뜻할까?
고려시대에는 16세에서 59ㅅ0ㅔ까지의 평민 중에서 군역의 의무(지금의 병역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정인(丁人)이었는데 백정의 '정'은 바로 정인을 의미했다. 따라서 백정이란 '정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고려시대의 백정은 농업에 종사하지만 군역의 의무가 없는 평범한 신분을 일컫는 말이었다.
대신 소나 돼지를 잡는 도살업자를 일컫는 말은 따로 있었다. 양수척(楊水尺)이나 화척(禾尺)으로 불리는 잗르이 그들이었다. 고려에는 북쪽에서 흘러들어와 정착하며 살았던 말갈인이나 거란인들이 꽤 있었다. 이들 말갈인이나 거란인들은 주로 도살업 등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이들이 바로 양수척이었다. 양수척은 시간이 지나면서 화척으로 그 말이 바뀐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조선시대에 와서는 백정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양수척에서 백정으로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일반 농민을 의미하던 백정이 왜 조선시대에는 도살업자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게 되었을까?
조선시대의 백정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이 주로 도살업, 유기(껍질을 벗긴 버들가지나 대오리로 만든 옷상자)제조업, 고기 판매업 등에 종사하는 천민을 뜻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좃너시대의 백정을 고려시대의 백정과 구분하기 우해 신백정(新白丁)이란 말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도살업자 등을 백정 또는 신백정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세종 5년(1423년)의 일이다. 반면에 고려의 백정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평민, 양민, 촌민, 백성 등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백정의 의미가 조선시대로 오며 바뀌게 되었을까?
그것은 국가의 재정을 보다 더 많이 확보하기 의한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새로운 왕조로 조선이 출범하면서 중앙 정부는 할 일이 많았다.
각종 공사 등을 벌이면서 자연 돈 쓸 일도 많아졌다.
특히 나라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정이 튼튼해야 했다.
그래서 세금이나 지방 특산물을 거둬들이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반 평민을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왜냐면 일반 평민만이 세금이나 공물을 바치고 나라가 추진하는 공사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등 각종 부담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여기서 우리는 조선의 참으로 어이없으며 비합리적인 개뼛다귀 같은 면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일반 평민을 많이 확보하여 '세금'이란 명목의 국가재정확보를 꿰하며 동시에 많은 노동력 또한 확보하려고 '화척'이라 불리던 자들에게 '백정'의 칭호를 쓸 수 있게 한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일반 '백정'(그러니까 당시 '원조'평민)들이 자신들을 '백성, 양인, 평민' 등 으로 칭하며 '백정'을 천시하는 풍조가 생긴것이다.
내용출처 : [기타] <책 : 영화처럼 읽는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