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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30살(26)

리드미온 |2004.02.07 02:58
조회 13,648 |추천 0

민준은 서울에서 빠져 나와 양평 쪽으로 달리다가 사람들 인적이 드문 강가에 차를 세웠다.

 

검은 강물이 차 바로 옆에서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강물이나 바닷물을 보며 바다색이라고 하지만

결국 그건 하늘의 빛깔을 닮아 있는 거다.

맑은 날에는 파란색, 흐린 날에는 회색, 밤에는 검은 색으로 하늘을 따라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늘은 하늘 색, 바다는 바다 색이라고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각각 볼 때는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하늘 색이

상대방의 바다를 물들이며 바다 색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 사이라면 상대방에 따라 기분, 취향, 심지어 가치관도 바뀌게 된다.

나와 민준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걸까.

 

“미안하다. 이젠 내 입장이 카페 같은 데도 마음대로 못 가게 되어버렸어...”

 

“괜찮아.”

 

굳이 옛날 영화 ‘러브 스토리’에 나왔던 ‘사랑은 결코 미안하단 말을 하지 않아.’ 라는

대사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사이라면 굳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그까짓 카페 같은 데 못 가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 단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너한테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벌써 민준은 두 번이나 미안하단 말을 하고 있었다.

‘민준, 난 너에게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란 말야.’ 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차분히 내가 묻고 싶은 말을 했다.

 

“김미나하고 어떤 사이인지 말해 줘. 그래야 나도 마음 정리할 거고....”

 

“음...”

 

내 기대와 달리 민준은 머뭇거렸다.

민준은 내가 만나자고 한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걸까?

단순히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김미나와 약속한 대로 민준의 선택을 듣고 싶어서였다.

 

“미안하다....”

 

민준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너 지금 5분도 안 돼서 나한테 세 번째 미안하다고만 하고 있어. 대체 왜 그러는데?”

 

“글세...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저 말은 1월 1일 민준에게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또 연실이 내게 민준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될 때의 서두였다.


“너도 서른이지? 나도 올해 서른이다. 이십대 초반에는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

이십대 후반에는 사랑만으로 살 수 있을까...고민하다가 서른이 되면

사랑만으로 세상을 살 수 없다는 진리에 확신을 갖는 나이 같아.”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사랑만으로 살 수 없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은 추상적인 개념의 사랑이 아니라

같이 밥먹고 잠자고 대화를 나누는 구체적인 사랑인 것이다.

머리 속의 사랑은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것이며

일상 생활에서의 사랑은 우리가 직접 부딪히며 가슴으로 느끼는 사랑인 것이다.


“남자 나이 서른이면 많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기반에서 앞으로 별로 변하지 않지.

정말 로또가 아니라면 일상의 변화는 없다고 봐야할 거야...”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 나도 마찬가지다.

로또가 아니라면 지금처럼, 혹은 지금보다 못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난 메일에도 썼지만 이대로는 버티기 힘들어.

세상에 온통 너희 둘이 나오는 기사 투성이야. 한 번이라도 내 기분 생각해봤어?”

 

민준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날 이해한다는 뜻인가?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뜻인가?

 

“지우야. 내 마음은 너에게 있어. 늘 너를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하고...

정말 미국에서도 성공하면 널 찾아가려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했었어.”

 

민준이 말하는 중에 ‘내 마음은 너에게 있어’ 라는 말이 기쁘기보단 염려로 들린다.

그렇다면 마음 빼고는 어디에 있다는 걸까?

 

“참 이상하지? 널 만나려고 열심히 산 건데...어느 날 내 인생에 김미나가 나타났어.

그리고 내 인생은 또 바뀌게 되었어...”

 

갑자기 스스로도 나와 연실이 비교되었다.

내가 민준에게 해 준 것은 몇 마디 충고에 지나지 않았다면

연실은 민준에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해주고 있다.

 

“나를 나쁜 놈이라고 욕해도 좋아. 정말로 널 사랑하지만 지금 김미나가....필요해.

내 인생에 오는 마지막 기회인지 몰라...”

 

김미나가 필요하다?

그럼 연실의 순수한 사랑을 이용해 민준은 성공하려고 한다는 것인가?

갑자기 연실에게 동정심이 느껴진다.

연실은 진심으로 민준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러나 민준은 나에게 그저 김미나가 필요하다고만 말하고 있다.

아니다 나에게 미안해서 김미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 난?”

 

사랑한다고, 함께 있고 싶다고, 키스하고 어루만져주며 사랑을 고백하던 나란 존재는

민준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6개월만 기다려 줘. 나 곧 모델 데뷔할거야. 그리고 로스쿨도 들어갈 거고...

그리고 6개월 후면 김미나와 파혼했다고 해도 나나 김미나나 그리 타격이 있지는 않을 거야...”

 

그럼 전에 민준이 자주 날 만나지 못하니 이해해달라,

일이 정리되면 말하겠다는 게 6개월 동안 저런 음모로 연실을 속이며 지내겠다는 것이었던가.

 

나는 연실과 얘기를 할 때만 해도 민준이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연실과 나, 둘 중에 하나를 결정을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렇게 금방 자신의 계획을 말하다니....

 

지금 내가 6개월을 기다린다고 하면 민준과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과 명예와 돈, 모두를 얻기 위해 연실과 또 세상 사람들을 멋지게 한바탕 속이는

연극에 나도 조연으로 끼어 들게 되는 것이다.

 

진정 내가 민준을 사랑한다면 6개월이 아니라 천년만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민준은 지금 나쁜 일을 하는데 나더러 도와달라는 것이다.

물건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을 때리는 일만이 범죄는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고 배신하는 일은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더라도

신에게라도 들켜서 어떻게든 댓가를 치루게 되어 있다.


“생각해볼게...”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예전에 민준이 기다려 달라고 할 때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지우야. 넌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잖아.

진정 날 사랑한다면 이런 나의 선택을 이해하고 기다려 주리라 믿어.”

 

민준을 이해할 수는 있다.

올해 서른 살인 나도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니까.

어떤 좋은 기회라도 있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잡고 싶다.

그래서 나도 리츠칼튼호텔 프리젠테이션에 열심이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해한다고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민준과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쉽사리 어떤 결정도 못하고 있는 나는 민준에게 마지막으로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리라 생각했다.

내 질문에 민준이 솔직하게 대답해준다면 나도 공범자가 되어 6개월을 기다리리라...


“이거 돌려줄게. 그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런데 왜 카드 이름이 네 이름이 아니라 김연실이란 이름으로 되어 있는 거야?”

 

나는 지갑에서 민준이 스키장가라고 주었던 연실의 ‘어메리컨익스프레스 카드’를 꺼내며 물었다.

 

“아. 그거...우리 어머니 거야.”

 

민준. 네가 날 이렇게 실망시키다니!

그래도 난 너의 진심을 알고 싶었던 마지막 질문이었는데,

그 카드 주인이 김미나라고만 했어도 난 네 말을 믿고 6개월을 기다렸을 텐데...

 

허무하다.

서른 살에 시작한 내 사랑은 두 달도 되지 않아 이렇게 끝나버리는 걸까...

그러면 민준은 나에게 있어서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즐거운 데이트를 했던

이벤트 상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다...내 사랑을 폄하시키고 싶지 않다.

다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위안을 해본다.

 

나는 민준에게 서울로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멋있는 이별이란 것도 사랑해서 어쩔 수 없는 이별이란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별은 그냥 이별일 뿐이다.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는...

다만 이별 후를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 좋은 이별인지 나쁜 이별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민준을 처음 만났던 1월 1일처럼 파란만장하고 아주 긴 하루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달콤쌉싸름한 30살 27편 보기------------------------

추신: 오늘은 지은 죄가 많아서 주말 인사 생략합니다.

(지은 죄: 민준에 대한 처리...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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