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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30살(29)

리드미온 |2004.02.11 00:15
조회 57,632 |추천 0

눈을 떠보니 다행히도 내 원룸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정신없이 집에 들어온 탓인지 화장도 지우지 않았고

옷도 입은 채로 잠들었던 것 같았다.

아마도 프로젝트 실패와 은수와의 이별이 속상해서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그래도 아침에 눈이 떠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출근 준비를 하면 회사에 지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민준과 사랑이 끝났다고 하더라도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또 내가 아끼던 은수가 회사를 그만 둔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김없이 아침이면 눈을 뜨고 일상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일은 분명히 오늘보다 좋은 날이 되리라는 기대감은 버리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 모르는 민준이 아니라 내가 로또가 당첨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하려는데

식탁 위에 놓여진 커다란 포스트잇에 무언가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내가 밤중에 술이 취해 감성에 젖어 시라도 한편 써 놓은 걸까 라고 생각하며

포스트잇을 보니 낯선 필체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팀장님

    어제 술 많이 취하셔서 제가 집에 모시고 왔습니다.
    그리고 혹시 놀래셨을까봐 말씀드리는데 저 손끝 하나 안 건드렸습니다.
    일부러 오해실까 봐 옷도 안 벗겨 드렸습니다.^^
    눕혀 드리고 걱정돼서 조금 머물다 갑니다.
    엠피스리 플레이어가 굴러 다니길래 들어봤더니 최근에 업데이트를 안 하셨는지
    요즘 노래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컴퓨터에서 신곡 몇 개 받아서 넣어두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시면서 차에서 들으세요.
    기분이 한결 좋아지실 거예요.
     편의점에서 술 깨는 음료수 하나 사다놨어요.
     드시고 출근하세요. 
                                   정민


                              

나는 나중에 정민이란 이름을 보기 전까지 은수나 하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김대리라니.

그럼 대리가 내 원룸에 들어왔단 말인가?

세상에나....

내가 술이 정말 많이 취했던 것 같았다.

대리 운전을 부른 후에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김대리가 걱정되었는지 집에까지 같이 온 모양이었다.

 

술 취한 나를 데려다 주고 음료수까지 남겨둔 김대리를 생각하니

리츠칼튼 프로젝트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원망스러웠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도 없었다.

 

김대리도 노력한 거니까.

오히려 김대리가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우리가 그 프로젝트를 따게 된 것보다는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김대리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왜 그 프로젝트에 열심이었고, 아버지 회사의 홍보를 하고 싶어 했는지...


어제의 술 탓인지 속이 쓰렸다.

나는 김대리의 메모대로 포스트잇 옆에 놓인 숙취해소라고 크게 적혀진 음료수를 마셨다.

어찌됐던 김대리는 내게 좋은 부하임에 틀림없었다.

이 정도의 배려심이 있는 것으로 평소의 썰렁한 농담을 참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수의 말대로 누군지 평생 그 농담을 듣고 살아야 할 여자는 불쌍한 일이겠지만.


나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꺼내고 오랜만에 엠피스리 플레이어를 차에서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대리 말대로 6개월이 넘도록 노래를 바꾸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최신곡이 나름대로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차에 타서 엠피스리 플레이어를 꼽고 시동을 걸었다.

김대리가 다운받아 넣었다는 최신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앓고 있죠
    사랑한단 뜻이예요

 

    이 사랑을 깨달은 순간은
    제 인생에 젤 힘든 날이었죠

 

    피할 수 없어 부딪힌 거라고
    비킬 수도 없어 받아들인 거라고

 

    하지만 없죠. 절 인정할 사람
    세상은 제 맘 미친 장난으로 볼 거겠죠

 

    바람이 차네요. 제 얘기를 듣나요.
    저 같은 사랑 해봤던 사람 혹 있다면은 

    절 이해할 테죠.

 

    단념은 더욱 집착을 만들고
    단념은 더욱 나를 아프게 하고

 

    어떻게 하죠. 너무 늦었는데
    세상과 저는 다른 사랑을 하고 있네요

 

    피할 수 없어 부딪힌 거라고
    비킬 수도 없어 받아들인 거라고

 

    하지만 없죠. 절 인정할 사람 
    세상은 제 맘 미친 장난으로 볼 거겠죠

 

    담배도 없네요. 달도 쓸쓸하네요
    저 같은 사랑 시작한 사람 혹 있다면은 도망쳐요


귀에 익숙한 노래였다.

요즘 1위를 한다는 엠시더맥스의 ‘사랑의 시’ 라는 노래였다.

매일 스치고 지나면서 듣기만 했지 이렇게 제대로 듣기는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김대리의 선곡이 마음에 들었다. 다음 곡은 무엇일까 생각하는 사이 전화가 울렸다.

나는 잠시 볼륨을 낮추고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은수다. 아마도 어제 취한 내가 걱정돼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응. 괜찮아. 근데 내가 어제 은수한테 막 뭐라고 했지?”

 

“하하하. 아니에요. 뭐 넌 나처럼 되지 말아라. 더 멋있게 살아라. 그 말만 계속 하셨어요.”

 

나는 혹시 은수에게 실수를 해서 김대리와 관계를 알고 있다고 말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오늘도 심심하면 회사 놀러와.”

 

“어제 얘기했었는데...기억 못 하시나 봐요. 저 유럽 가려고 지금 공항에 있어요. 인사드리려고요.”

 

어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은수가 회사 옮기는 잠시 동안 여행을 간다고 한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런...그랬어? 아무튼 잘 다녀오고...”

 

“네.”

 

은수의 목소리는 밝다.

그래. 은수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일도 사랑도 성공한 서른 살이 되어보라는 거다.


나는 오늘부터 민준과 사랑의 실패와 프로젝트 실패 같은 일은 다 잊고

음악도 듣고 여유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 곡이 무엇일까 하며 볼륨을 높였다.

 

‘노래 잘 들으셨어요?’

 

라고 시작하는 김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신 곡이라더니...자기가 노래라도 직접 부른 것일까?

아니면 노래에 대한 설명일까?

나는 무얼까 궁금해하며 볼륨을 조금 더 높여 보았다.

 

   
    이렇게 기계에 대고 녹음하려니 참 쑥스럽네요.
    처음 당신을 봤을 때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있었어요.

기억할지 모르지만....
   나도 우리 아버지를 닮았나 봐요.
   아버지도 어머니가 베이지색 정장 입은 모습에 반했다고 하던데...

 

언젠가는 고백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죠.
   

1월 1일 내 전화에 데이트한다고 대답해서 실망했고
   스키장에 같이 가고 싶어서 우리 팀 다 같이 가자고 말했을 때도 거절했고
   하지만 스키장 콘도에서 당신을 발견한 순간 뻔뻔하게도 함께 있자고 했지요.
   그 기쁨도 잠시였어요.
   다리가 다치는 바람에 생일날에 뮤지컬도 같이 보러 갈 수 없었어요.

뒤늦게 장미를 준비했는데 버렸다는 말을 듣고 실망했죠.

그러다 리츠칼튼 프로젝트가 들어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서른 살이 되면 아버지 회사로 들어가기로 했었는데 이래저래 미루고 있었거든요.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요. 
   

당신이 저와 연관된 일을 하면 내 애인이 되지 않아도 계속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했어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팀이 잘하니까

정정당당한 승부를 해도 자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제 생각이 틀렸던 거죠.
   이 부장에게 들었을 거예요. 우리가 왜 프로젝트에서 떨어졌는지...
   하지만 절 원망하지 않더군요.

고마웠어요.
   아마도 팀을 위해서일 거예요.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당신이 날 슬프게 했던 일도 있었어요.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나와 비슷한 이름의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르더군요.
   당신을 병원에 데려오고 간호하고 있는 사람이 나였는데...
  

하지만....
   나...오늘 결심했어요.
    이젠 여자나 사랑 컴플렉스를 극복해보자고요.
   

전에 내가 준 장미를 버렸다고 했는데 이렇게 책상 위에 잘 놓아두었네요.
   이 장미를 보고 용기를 내서 말할게요.
   오래 전부터 당신을 좋아해 왔고

요즘에 이 노래를 들으면서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놀라서 앞차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부딪힐 뻔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고를 낼 것 같아서 우선 차를 도로변에 세웠다.

김대리. 이렇게 달콤한 목소리가 정말 김대리 맞는 거야?

더구나 이런 말 어디서 보고 배낀 게 아니라 정말 날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이런 일은 김대리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눈가가 촉촉이 젖어드는 이유는 뭘까.

이런...지금 내가 울고 있는 거야?

김대리의 별로 멋있지도 않은 사랑 고백 따위에 울고 있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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