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초 백수 남자 입니다.판은 몇년 전 부터 눈팅만 했었는데 이 나이 먹어도 하소연 할 친구도 적고 매번 하소연 하면 저만 병신 같고 해서 판의 올립니다.이 채널에 올려도 되는건지 모르겠는데 글을 써보겠습니다.저를 아는 사람이 보면 저인지 알겠지만 답답한 마음이 너무 크니 솔직히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제 인생을 크게 바꾼 첫번째 사건이 아홉살 무렵에 일어납니다.서울역 기준으로 1시간30분 정도 거리의 지방 도시 좁은 단칸방에서 ,
그날 엄마가 저녁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부모님을간략히 설명 해 드리면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시고 폭력전과로 감옥을 들락날락 하셨던 분입니다.고집도 강하시고...본인은 아버지로써 의무를 다하지는 않지만 자식들이 애비 대접 안 하면 미치시는 분입니다.술,담배는 당연히 하시고요..어머니는 기억이 나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제가 엄마였어도 아빠 같은 인간이랑은 못 살거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그렇게 엄마의 부재속에서 아빠,나,동생 이렇게 남자 셋이 단칸방에서 삶을 이어갔습니다.엄마가 있다 없으니깐 적응이 안 되더군요.며칠동안은 현관문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돌아올까봐..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역할 없이 엄마의 대한 분노가 가득하셨죠.참 아버지는 남탓을 많이 하십니다.저와 제 동생에게 형제간의 우애가 제일 중요하다 늘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당신 형인 큰아버지에게는 예전의 속상한 일이 있다고 해서 쌍욕과 형 대접 안 하는 사람입니다..이러면서 우리보고는 우애가 최고다..모순이 대단하신 분이죠..
하여튼 가뜩이나 콩가루 집안인데 엄마 까지 없으니.. 제 초등학교 졸업앨범 사진만 봐도 머리는 떡져있고 옷도 거지 같은게 딱 보입니다.어깨는 쳐저서 성격과 지능이 많이 발달 되어야 하는 시기였는데 저는 사회부적응자 FM코스를 밞아나가고 있었네요.당연히 가정상황이 최악이니 저희는 기초수급대상자였습니다.당시 식권이 나왔는데 어린 제가 직접 동사무소 가서 수령 하러 다녔죠.어린 나이였지만 제가 거지여서 받는다는걸 알고 있습니다.이때도 아버지는 차가 있으셨는데 직접 식권을 수령 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쪽팔린건 다 제 몫이었죠.x같은 기억입니다.."식권 나왔다"이 말 들을때 그 기분은 글로 표현이 안되네요..아빠가 가라는 말이 목 깊은 곳에서 부터 늘 나오려다 말았죠..아버지는 직업도 없으셨는데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 늦게 들어오셨습니다.하루에 당시 돈으로 4천원 정도 주셨던거 같습니다.이돈으로 오락실 가고 빵 사먹고 하는거죠.저녁은 식권을 가지고 시내에 버스타고 시에서 정해준 갈비탕 집에서 먹어야 하는데 동생 손 잡고 밥 먹고 식권 내는거였죠.제 기억으로는 그 식당분들은 그렇게 기분좋게 저희를 받아주시지는 않았습니다.초등학교 다녀와서 7시쯤 되면 버스정류장 가서 버스타고 시내에 나가야 하는데 7시가 가까이 되면 왜이리 가기 싫던지요.. 안 갔습니다 언젠가부터..동생도 싫어했고요..아빠한테는 저녁 가서 먹었다고 했죠..잘 기억은 안나지만 확실히 배 쫄쫄 굶는게 꾀죄죄 하게 식당 가서 개쪽 당하는 거보다 낫다 봤습니다..이런 가정환경이었지만 저와 제 동생은 공부는 안 했어도 교우관계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그런 반복속에서..시간은 흐르더군요 중학생이 되어서 중학교 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모르는 아이들과 생활하는데 있어서 저는 더 의기소침으로 변하더군요.초딩때는 인싸 까지는 아니여도 잘 놀았는데 중딩 때는 찐따 취급 받다가 인문계로 고등학교 진학 했습니다.여전히 그 단칸방이고요.식권으로 먹을 때도 있고 아니면 아빠 지인들이랑 저녁 먹을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아빠 아는사람 인데 미리 얘기 해 났다고 어디,어디 가서 밥 먹으라고 시키셨죠.동생이랑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눈치밥을 먹으러다니죠.. 단칸방은 취사 하기에는 힘든 시스템이였습니다.안에 음식물 가득 있는 채로
냉장고 전원이 나갔는데 그 음식물 쓰레기도 1년 뒤에나 버렸으니깐요..9년 동안 돌아가지 않던 통돌이 세탁기 안에는 몇년 됐는지 모를 세탁물도 있고요..고등학교는 남녀 공학 이었습니다.당연히 저도 여자애들한테 관심이 많았죠.관심도 끌고싶었고...여름 교복이 흰색이었습니다.
주말에 직접 손빨래 해서 월요일에 입고 나갔는데 다리미질이 안 되있으니 잔주름이며 목뒤의 까만 때가 지워지지 않더군요 제가 사는 단칸방 처럼.. 저를 화나게 했습니다..빳빳 하고 깨끗한 친구들의 교복을 볼 때..그게 뭐라고 정말 부럽더라고요..그래서 저도 빳빳 해 지고 싶어서 방법을 찾았는데 다리미가 없어서 생각해낸게 냄비를 달궈서 그 열기로
다리미를 대신 하려고 했죠..흰 교복 주름의 냄비를 가져다 되니 검게 얼룩이 생기더라고요.냄비 밑은 지저분 했던 겁니다..흠 그럼 그렇지 그날 부터 그냥 지저분한 교복을 인정 하고 입고 다녔습니다..여자친구도 사귀어보고 싶었죠.
좋아했던 이쁜 친구랑은 고등학교 3년 동안 열마디도 못 해 봤던거 같네요..지금 드는 생각은 저는 그 친구를
하지만 이성적으로 좋아했던 것도 있었지만 편하게 대화만 할 수 있었어도 좋았을거 같다라는 생각이 강하네요..
인문계 고등학교 여서 학업을 진행 했어야 했지만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평생 저와 다가올 미래를 그렸던 사람이 없었거든요..아빠는 건강만 하면 된다 하시고 이렇게 사는것도 감사한거다... 저의 학업이나 미래의 대해서는 대화를 나눈 시간이 1분도 안될겁니다.저도 상의 할 사람이 없으니 혼자 판단 하는 외골수로 변하더군요..공부하면 뭐하냐 대학도 못 가는데 ..이런 생각으로 살았습니다..한명이라도 학자금 대출이나 대학의 필요성을 알려줬다면 학업을 쉽게 손 때지는 않았을 겁니다..그렇게 공부 한것도 아니고 제대로 논것도 아니고 어리버리하게 고등학교 생활도 끝납니다...
대인관계 폭도 적었던 저였는데 친한 친구들이 다 대학으로 떠나고
그 한겨울이면 양말 신어도 발이 시려운 단칸방에서 많이 외로웠습니다...컴퓨터로 영화나 드라마 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습니다...왠만하면 주인공이 아무리 힘들어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그런 미디어를 보면서 ..작지만 희망을 가지며 살았습니다.그러다 주유소 알바를 하다가 군대의 입대 하게 됩니다.아빠는 여전히 직업 없이 꾸준히
1일1병 소주를 계속 드시고요..군대에서가 제 인생 최고의 전성기였습니다.훈련병 때나 이등병 때 까지는 힘들었지만 적응하니 제 성격이 나오더군요..그곳에서는 빳빳 한 교복과 지저분한 교복이 나뉘어지지 않았으니깐요..
분대장도 하고 특급전사도 하고 후임들을 많이 갈궜지만
공정하려고 노력했습니다.군생활 잘하고 못하고는 분명히 존재 합니다. 군생활 못 하는 친구들한테는 욕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그러다 군생활 중 겨울의 휴가를 나갔었는데 내무실 보다 추운 그 단칸방에서 동생 혼자 있더라고요..벌벌 떨면서 ..아빠는 어디 친구네 식당인지 뭔지 창고 같은데에 야전침대 하나 갔다놓고 지내시고 안 들어온지는 좀 된거 같더라고요.이유는 그 단칸방 월세가 20이었는데 10달이 밀렸다고 합니다.주인집에 얼마나 눈에가시였을까요..아버지는 또 도망가신겁니다 동생만 두고
아버지는 그런 분이십니다.문제점이 보이면 맞서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렇게 평생 피하시는 분이였습니다. 휴가 나와서 그 내무실 보다 추운 단칸방에서 자는 동생 옆에서 많이 울었습니다..꼭 성공 하겠다고 복귀도 하고 입대를 한거니 제대도 했습니다.집에 돌아오니 임대아파트가 당첨이 됐나 그랬나 해서 깔끔하게 옮겼더라고요.
여전히 제 방은 없었지만..얼마 안 이따가 식당에 취직을 해 일을 했습니다.제 인생을 바꾸는 두번째 시점인데
먼저 전역한 선임이 용인 에버랜드에서 일한다고 오라는겁니다.저야 혹했죠..평생 집을 떠나는게 반 소원이었으니깐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 다단계 사업이었습니다.
저는 인식이 없었거든요 뭣도 모르는데 일단 서울이였고 돈 천만원 번다니깐 혹 했습니다.x신 같은 선택이었고
30 먹은 지금도 매일,정말 매일 후회 합니다.가진게 젊음 뿐인 저는 다단계 사업의 제 밑천인 2년 6개월을 쏟아 부었습니다.지금도 제가 왜 그렇게 포기 못 하고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정말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고
내가 지금 희생하면 동생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형이 되고 싶었습니다.그리고 저 기간동안 제가 뭐하고 사는지
아빠는 관심도 없어지만요..아마도 동창,선,후배들한테 제 이미지는 매우 안 좋을겁니다.그렇게 만든건 제 실수가 명백한거니 다 인정 하고 24살에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피라미드 그만둔 이후에 집에 돌아와서는 편히 잠든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내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자책과 피해의식,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 했던 기억들.. 그런게 쌓이고 쌓여 지금도 불안장애 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오늘날 까지도 심장이 많이 뜁니다.각설하고 당연히 자격증 없는 고졸이 지방에서 할 수 있는거는 한정적이었습니다.더군다나 군대에서 쌓은 자신감이 1도 안 남았거든요.. 그렇게 미래를 준비하지 않던 사람들이 그렇듯이 시간은 무섭게 빨리 갔습니다.동생이라도 잘 됐으면 좋겠는데 이런 가정환경에서
뭐 달라질게 없었습니다.일용직 다니다 쉬다 그렇게 되더라고요..시간이 지나면서 이 x같은 운명을 바꿀 수 없다라는 생각이 점점 커져갔습니다.저는 아빠에게 가장 화나는 부분은 우리를 가난하게 살게 해서 그런게 아닙니다.못 살수도 있죠..중요한건 아버지로써의 태도 입니다
저희가 초등학생 때 부터 이런 ,엄마도 없는 환경인데 왜 조금이라도 미래를 바꾸려는 시도도 없이 이렇게 흘러가게 두었는지 정말 화가납니다.진짜 우리가 친아들이 맞나 싶습니다.살면서 아버지가 일하는걸 본 기억이 다섯손가락의 꼽습니다..글을 읽으시다보면 저에 대해서 이해 못 하시는 분들도 많으실겁니다.20살때 까지 그 좁고 지저분한 단칸방에서 생활은 저에게 꿈도 희망도 의욕도 다 없애 버렸습니다.좁고 지저분 했어도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다면 달라졌겠죠.사랑도 아니고 작은 관심이라도..왜 그렇게까지 방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언론에서 힘든 환경이지만 이겨낼려는 멋진 부모님들을 보면 부러워서 미치겠습니다.저랑 제 동생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이런 형벌을 받는건가요..아파트에서는 제가 밥하고,설거지,청소 ,빨래,장보기,세금 납부 제가 다 합니다...제가 안 움직이면 바닥에 쓰레기가 그대로 있는거죠.인력 뛰고 와서 몸 죽겠는 상황에서도 군말 없이 했습니다.그러다1주전
평생 미워 할 수도 없고 사랑 할 수도 없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습니다.제일 물어보고 싶은 건 한가지 입니다..
왜 버렸냐가 아닙니다.버리고 나간 건 괜찮은데 왜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냐 ..이게 제일 궁금합니다.제가 강아지를 키웠었는데 못 챙겨주면 그렇게 애가 타던데 엄마한테 저는 뭐였을까요.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어머니 초본을 뜯었습니다.부모 두분다 싸이코인게 별거한지 20년이 넘어가는데 법적으로는 부부 입니다..등본은 따로 나오는..
엄마 초본 뜯으니 거주불명자?? 이렇게 뜨네요.전입신고는 되있는데 그곳에 없다는 얘기더군요.x발 진짜
다 버리고 갔으면 좀 잘 살던가 어디 촌구석 끝에 들어가서 후.... 그래도 직접 가보기는 해봐야겠습니다 못 만나도....
흠 긴글이었는데 제가 제 정신이 아닌거 같습니다.밤에 잠이 안와서 뜬눈으로 아침 맞이하는게 며칠째 되네요.. 무책임한 아빠,모성애 없는 엄마,저 젊은날을 방에서만 보내게 해서 미안한 내동생... 생각할수록 심장만 빨리 뛰고..새벽 내내 소변 보러 나오는 아빠 문소리 들으면 소리라도 크게 질러버리고 싶습니다.사회부적응자 애비 한명이 사회부적응자 아들2명 만들고 아내는 거주불명자로 바꿨다고 생각하니 뭔 생각으로 결혼하고 출산하게 했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왜 버려져야만 했을까요 ..외가댁은 노량진 근처에
변호사 하는 외삼촌도 있다는데..저희 손 잡아줄 외가 식구 한명도 없었고...세상에 철저히 버림 받는게 무슨 느낌이신지 다들 알고 계십니까??
인생 출발점 다른 건 당연한건데 왜
그 재수 없는 운명이 저여야했죠??
신은 없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후 40여 분 동안 글 싸지르고 나니 좀 괜찮아졌습니다.
멀지 않아 또 발작 하겠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보겠습니다..
저보다 힘든 분도 계시죠??
누가
사람은 마음이 아프면 죽고싶고
몸이 아프면 살고 싶다 했나요..
생명이 있는 한..바뀌지는 않겠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긴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중간중간 거친 표현은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