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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外] 영화 관계자와 양자가 말하는 장국영 비하인드 스토리

ㅇㅇ |2020.03.27 04:38
조회 1,368 |추천 12

[퍼옴]


뢰한 (패왕별희에서 데이의 제자인 소사 역을 맡았던 배우

패왕별희를 찍을 당시, 장국영은 출연진들 가운데서도 가장 거물 스타였지만, 내 기억 속에서 그처럼 철저한 프로 의식을 가진 배우는 본 적이 없다. 장국영이 처음 무대 위에서 우희를 연기하는 장면은 몇 번의 테이크 끝에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었다. 그러나 자신의 연기에 불만이 있었던 장국영은 계속 더 찍길 원했다. 결국 서른 몇 번의 도전을 하고서야 그는 겨우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뿐이 아니다. 사실 촬영 중 배우들이 대사를 잊는 것은 너무나 비일비재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장국영의 대본 준비에는 다들 혀를 내둘렀다. 광동어를 모국어로 쓰는 그가 모든 대사를 북경어로 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카메라 앞에서 대사를 틀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장국영은 자신에 대한 요구가 감독들의 기준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었다.
 


패왕별희 촬영이 있었던 1992년은 장국영이 최고의 청춘스타로 홍콩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을 들끓게 할 때였다. 그에 비하면 나를 비롯한 조연급 배우들은 그저 소품에 불과한 처지였다. 그런데 장국영의 태도에서 대스타로서의 오만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군중들 속에 섞여있는 엑스트라들에게조차 완벽하게 상냥했다

특히 내 기억이 남아있는 장면은 극중에서 데이의 양자인 소사가 데이에게 각자의 길을 가자고 하며 떠나는 장면이다. 사실 난 부드러운 성격으로 소사가 왜 그렇게까지 데이한테 하는지, 그 인물의 굴절된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고, 결국은 몇 번의 NG를 내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때 장국영이 내게 다가와 위로를 하며 말했다. “사실은 나도 꽤 부드러운 사람이야. 그런데 이 장면에선 감정을 폭발시켜야만 해.” 그리고 그는 내 대사를 직접 연기하며 시범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무사히 그 장면의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면 그는 항상 촬영장 주변에 몰려든 팬들에게 둘러싸였는데, 그와 대화를 하고 있던 나와 조연배우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장국영은 어린 여학생 팬들에게 우리를 소개하며 말하곤 했다. “너희들은 이 배우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돼. 나는 홍콩에서 왔지만, 이 사람들은 중국의 훌륭한 배우들이잖아.”

정말 매일같이 팬들이 찾아와 장국영에게 사인과 기념 촬영을 하자고 조르는 통에 그는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사진이나 사인을 거부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언젠가는 숫기 없는 팬들 몇 명이 찾아와선 차마 그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촬영장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장국영은 먼저 그녀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더니 사인과 기념촬영까지 해주었었다. 나에게도 항상 자상하게 신경을 써줬는데, 사부인 데이가 날 채찍으로 때리는 장면을 찍었을 때엔 오케이 사인이 나오자마자 나에게 달려와서 혹시 아프지 않았냐며 걱정해주었었다.

당시 중국 본토의 배우들은 촬영소의 숙소에 묵었고 장국영은 호텔에 묵었는데, 그는 종종 밤에 야식을 사들고 촬영장 숙소를 찾아오곤 했었다. 그리고 촬영이 없는 날에는 모두를 좋은 음식점으로 데려가 밥을 샀다. 매번 얻어먹기가 그래서 우리가 계산을 하려고 하면, 정색하며 계산서를 빼앗아서 재빨리 돈을 내러가곤 했었다. 나 뿐만 아니라 단역을 맡아서 촬영장에서 단 한번 밖에 만난 적 없는 배우조차 그는 모두 기억했다. 


그리고 98년 의 홍보를 위해 청도에 왔을 때엔 나와 몇 명의 배우들에게 전화를 해서 식사에 초대해줬다. 그 후 2000년에 그가 상하이에서 콘서트를 할 때에도 패왕별희에 출연했던 본토의 배우 모두를 콘서트에 초대해주었다.

내가 만난 장국영은 조금도 우울해보이거나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사에 너무나 완벽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니, 나는 그 이유를 함부로 추측하고 싶지 않다. 그저 정말 너무나 힘들어서 견딜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서극 (천녀유혼, 영웅본색 등의 제작자이자 감독 장국영의 평생 지기)

마지막 한 달, 레슬리(장국영 영어이름)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보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슬픔이 밀려온다.
 
만약 그가 그때 이미 인생에 작별을 고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는 친구들을 격려하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던 모양이다. 당시 홍콩은 SARS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홍콩의 거리는 역사상 가장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건강염려증에 시달리는 한 친구는 2주 동안 외출조차 하지 않고 끊임없이 손을 알코올로 소독하며 SARS(사스라고하는 2003년 즈음 홍콩에서 유행했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공포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를 걱정했던 레슬리는 틈틈이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공포심을 가라앉혀주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지 마음을 전했었다. 그랬던 그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는 대화를 나눈 뒤 몇 시간 후 우리를 남기고 영원히 떠나버렸다.

마지막 한 달 동안 우린 몇 번인가 만났었다. 그때마다 그는 너무나 부드러워 보여서, 나는 지금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충실한 나날인 것처럼 느꼈을 정도였다. 심지어 나는 그에게 "내가 널 안지 오래되었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널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었어.“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설명할 수가 없고,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친근하고 붙임성 좋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굉장한 슬럼프에 빠져서 위축되어 있던 시기에도, 그는 내가 어느 나라에 있든 나를 염려해 장거리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리고 기운차면서도 부드럽게 날 격려해주곤 했었다.
 
마지막 한 달, 나는 장국영의 새 영화를 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 달로 인해 우리가 함께 구상했던 모든 영화들은 일순간 허공중에 흩어져 버렸다. 그는 나에게 인생이란 어쩌면 한 달만큼 짧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 한 달로 인해 우리는 이제 애정이 넘치는 레슬리의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 언제나 아이처럼 맑았던 그의 얼굴도 천사 같은 미소도 다시는 볼 수가 없다.

암울했던 2003년 4월(장국영 사망일)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2003년 4월이 내 인생에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거듭 한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도 레슬리에게 전화해서 그의 즐겁고 활기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그는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꿈이다. 

레슬리는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영원한 존재가 되었다.

임뢰 (풍월에서 충량의 아역을 연기한 배우, 그 후 장국영의 양자가 됨)
 

 
1995년,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영화 의 오디션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카메라 테스트를 하는 동안 그가 나를 가리키며 “나랑 많이 닮았네.”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출연하는 장면이 없었기 때문에 촬영에 들어간 뒤로는 촬영장에서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우연찮게 우리는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다. 그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촬영장에 돈은 얼마나 가져왔니?” 나는 200위안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긴 촬영기간 동안 그 돈으로 어떻게 지내려고 그래?” 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며 꼭 필요할 때 쓰라고 했다.
 
그 후, 여배우를 교체하게 되어서 촬영이 중단되었고 우리는 자유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고작 중학생인 나와 스스럼없이 놀아주고 나의 고민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나는 그에게 집안 사정과 부모님과의 문제 등 여러 가지를 털어놓았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나의 아픔에 공감해주었고, 항상 자상하게 나를 다독거렸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서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가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어요.”

쑤저우에서 촬영을 할 때 그는 나에게 일본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내가 없다고 말하자, 그는 한 시간이나 차를 몰고 상하이에 있는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줬다. 가끔 그가 기분 나쁜 일이 있는 날에도, 결코 내 앞에서 티를 낸 적이 없었다. 다만 그의 따뜻한 미소가 조금 줄어들었을 뿐, 언제나처럼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었었다.

  


그는 풍월을 촬영하는 내내, 일에 몰입해 있었다. 식사 중에나 이동 중에도 늘 낮은 목소리로 대사를 연습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높은 요구를 하는 완벽주의자인 그에게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 사춘기였던 나는 스스로가 만든 방에 갇혀 안정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을 찍고, 그와 친하게 지내면서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고, 성격도 밝아지고 사교적으로 변했다. 첸 카이거 감독도 내 연기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좋아지고 있다고 칭찬해줬었는데, 그건 모두 그의 덕분이다.
 
그러나 나의 촬영 분량이 모두 끝나고, 베이징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큰 소리로 울었다. 당시 나는 어렸고, 그와 헤어지는 일이 견딜 수 없이 슬펐다. 그와 보낸 시간이 모두 꿈만 같았고, 몇 달 동안 내내 우울감에 빠져 지냈다.

그런데 그 해가 끝나갈 무렵,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며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풍경과 그의 따뜻한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그는 웃으면서 말했었다. “너는 나의 양아들이야.” 라고... 그때의 충격과 감동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아버지는 베이징을 방문할 때마다 언제나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었다. "아들아, 뭐 하고 있어? 날 만나러 올 시간은 있어?" 그는 너무나 자상한 아버지였다. 우리가 함께 식사를 하는 날엔 언제나 열시가 되면 교통비를 내손에 쥐어주며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라고 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불만이 많았던 나에게 “아들아, 부모님을 사랑해드려야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분들은 네 부모님이야.”라고 타이르기도 했었다.
 
나는 그가 매우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일거수일투족이 대중과 언론의 시선에 노출되어있는 스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그리움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방해가 될까봐 한 번도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를 생각하고 있었고,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는 편지를 썼었다. 그는 종종 홍콩에서 전화를 걸어와 나의 근황을 물었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고 잔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동안 나의 감정을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걸 아프게 후회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더 많이 표현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홍콩에 나는 북경에 살고 있었고, 정기적으로는 일 년에 한 번 설날 때마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나는 그날만을 기다리고 그를 그리워하며 지냈다. 때로는 그리움이 힘들고 상실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상실감으로 힘들어할 때나, 혹은 다른 일로 비뚤어졌을 때마다 그는 전화를 걸어주거나 마법처럼 내 앞에 나타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항상 자신이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내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버지 덕분이다. 나의 좋은 점은 모두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는 나를 정말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그의 사랑은 더 좋은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나를 바꿔놓았다. 그의 영향으로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많은 모순들을 극복하고 인생을 용감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4월 1일 저녁, 나는 친구로부터 아버지의 소식을 알리는 메일을 받았다. 믿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간단한 뉴스가 떠있었다(장국영의 사망 소식). 그래도 나는 믿지 않았다.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아버지는 그렇게 떠나지 않아. 내일 나에게 전화를 해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주실 거야.
 

다음날 친구가 신문에 확인 기사가 떴다며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아버지의 친한 친구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홍콩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여권도 홍콩 비자도 없었다. 당장 홍콩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조차 지킬 수가 없었다. 사실을 믿기 싫어 아무런 뉴스도 보지 않았다. 머리를 모두 깎고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말고는 지금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를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고, 그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친부모님에게서 조차 받지 못한 사랑을 모두 그에게서 받았다. 그가 있어서 내 인생은 너무나 행복했고, 그 고마움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며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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