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 기혼 여자입니다.
지난주 화요일 친정아빠께 연락이 왔습니다.
엄마 몰래 국민연금을 조기수령해서 5년 동안 매달 50만원씩 받아썼다. 이제 진짜 수령할 나이가 되어 부족한 금액을 회사 사장이랑 친구한테 빌려서 메꿔왔다.
더이상 메꿀 수도 없어서 엄마에게 솔직히 털어놓으려 한다.
하십니다.
(조기수령하면 수령기간이 늘어나는 대신 금액이 30%씩 줄어듭니다. 저희 아빠는 원래 70씩 받으실걸 조기수령으로 매달 20만원씩 적게 받으시는 거구요.)
계산해보니 아빠가 5년간 받아쓰신 돈이 3000만원이더라고요.
엄청 화를 냈습니다. 저희 아빠, 이번이 처음이 아니시거든요.
저 고등학교 때 엄마 몰래 주식하시다가 빚까지 져서 1억을 날리셨어요. 그때 엄마가 건강보험부터 제 학자금까지 모조리 해약하고 이모한테 빌리기까지 해서 다 갚으셨어요.
그 외에도 회사 분들이랑 야유회겸 강원랜드 갔다가 가진 돈 다 쓰시고 빚지신 일,
엄마 몰래 체크카드로 돈 조금씩 쓰신 일 등 말하자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어디다 쓰셨나 여쭤보니 로또와 토토에 쓰셨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아주 오래전, 저 어릴 때부터 도박을 하셔서 엄마가 쫓아다니면서 말리시던 기억이 있거든요.
제가 대학 가면서 독립하고부터는 시시콜콜한 사정을 못 들었지만 로또는 매주 꼬박꼬박 사시던 걸 알았어요. 그래서 가망없는 일에 돈 쓰지 마시라 말씀 드리면서도 그게 유일한 취미시니 적당히 하시겠지 믿고 있었는데. 3천만원을, 그것도 두분 노후자금인 연금을 미리 받아 쓰셨다고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짜 욕 빼고는 할 수 있는 비난을 다 쏟아냈네요 전화로.
저한테 얘기 들은 동생이 직장에 휴가를 내고 부모님댁에 갔습니다.
엄마가 충격이 크실 것 같아서요.
맘 같아선 제가 가고 싶었는데, 저는 결혼을 했고 작년에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님 두분 모두 남편이 사실을 알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구요.
엄마가 처음에는 덤덤하게 얘기를 들으셨는데.
다음날 동생앞에서 우셨다고 하더라구요...
우실 만도 해요. 저희 엄마 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청소일 하시면서 저희 둘 키우셨는데. 아픈 할아버지 병수발 다 하시고 아버지 이런 류의 사고 칠 때마다 수습 다 하셨거든요. 맏며느리 노릇 다 하셨는데.
이제 저도 결혼하고 예쁜 손주 낳고 동생도 착하게 직장 다니고 있어서 좀 행복해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버지께 제대로 뒤통수 맞으신 꼴이 됐으니까요.
어제 밤에는 엄마가 주무시다가 갑자기 일어나셔서
코골며 주무시는 아빠를 마구 때리셨다고 해요. 동생이 말렸구요.
글을 쓰면서도 엄마가 너무 안쓰러워서 눈물이 나네요...
아무튼 엄마는 많은 상처를 입으셨고.
이제 더 이상 아빠와는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30년 넘게 산 동네 떠나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사하시겠다고 했대요.
(엄마는 저랑 동생을 끔찍이 생각하셔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는 하나도 안하셨어요. 지금도 저 걱정할까봐 괜찮은 척, 별일 아닌 척 말씀하십니다. 동생은 집에 갔으니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보고 있구요.)
문제는 아빠입니다.
지금 직업이 있으시고 10년 정도는 더 일하시려고 마음 먹고 계세요.
최저임금이지만 혼자서 생활하시는데는 큰 어려움 없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일확천금의 꿈만 버리신다면.
하지만 35년간, 어쩌면 그 전부터 해오셨을지도 모르는 도박(? 토토도 도박이라고 하더라구요)을 멈출 수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아빠는 크게 반성한다기 보다 엄마에게 혼날 것을 더 두려워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너무 암담해요. 마치 철없는 초등학생을 대하는 기분입니다. 이번만 넘어가면 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라고 생각하는.
아빠가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박중독치료센터에 연락해 유선으로 상담을 받았고, 아빠도 치료센터를 방문해 상담을 받으시기로 일단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아빠 공인인증서로 제가 틈틈이 재정상태, 대출여부 등을 챙겨보려고도 합니다.
아빠가 변하시리라는 희망을 아직 저는 버리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도 제 아빠니까요.
하지만 엄마는 돌아설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제가 같이 센터에 가서 치료해보면 어떻겠냐고 여쭤봤더니 펄쩍 뛰시더라구요. 왜 엄마가 같이 가야 하느냐며... 이해합니다. 저라도 같은 상황이면 그럴 것 같거든요. 35년동안 용서하고 다시 뒤통수 맞고를 몇번이나 반복했으니까요.
이 글만 보면 아빠가 정말 별로인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이 문제만 빼면 좋은 사람입니다.
동네 어르신들께도 잘하시고요. 친할머니가 어린 시절 돌아가시고 새할머니께 별로 예쁨 받지도 못했는데도 지금까지 새할머니 꼬박꼬박 챙기세요. 친할머니 돌아가시고도 아빠의 외가쪽 친척들 명절 때마다 찾아뵙기도 하시고요.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도리를 잘 하시는 편이에요.
두분 저희 대학까지 다 보내시고 뒤늦게 돈 모으기 시작하셔서 별로 모아둔 돈도 없으시고요.
집도 지방에 있는 주택이라 팔아서 나누고 말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마 이혼하시면 엄마가 가지고 계신 돈으로 생활하시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상황이 엄마의 발목을 잡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남편도 수입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는 지원해드리고 싶어요. 물론 결혼을 하고 남편이 있으니 눈치가 조금 보이긴 합니다.ㅠㅠ
마음 같아서는 엄마가 저 있는 곳으로 이사를 오셔서 같이 생활하면 좋겠는데, 남편 입장에서는 꺼려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직 얘기도 못했구요.
부모님은 남편에게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저는 오늘 저녁 얘기할 생각입니다.
남편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네요.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는 문제구요.
너무 막막해서 얘기가 두서 없네요. 아무튼...
엄마의 행복을 위해서 두분의 이혼을 도와야 할까요.
아빠를 한번 더 믿어주자고 엄마를 설득해야 할까요.
며칠째 이 고민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비슷한 경험 있으신 분들 의견 좀 주세요.
60대 아버님 어머님들 의견도 들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