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 - 존비(尊卑어) - 삭제에 관하여
쓰니
|2020.08.28 04:35
조회 93 |추천 0
=> 본문에 앞서
이 글은 한국어에 있는 존비어 체계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글이 아니야. 다만 갑질, 경직적인 사회 분위기, 고부 갈등 등 불평등이 가시화된 많은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라는 거지. 물론 빈부 격차에 의한 문제는 따로 빼 놓고 말이야. 지금 나는 자본주의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니니까.
"나보다 어린 놈이 반말이라니!" 하면서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한번 읽어 봐 줘. 본문은 A4 한 장에도 들어가게끔 최대한 내용을 줄여 썼어.
알다시피 현대의 한국어는 이미 예전에 비하면 존비어의 수직성을 많이 잃었어. -합쇼, -거라, 하오 같은 종결 어미를 현실에서 쓰는 사람은 이제 없잖아? 언어의 구조가 평등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모든 언어가 단어의 수가 증가하고 문법이 단순화되는 경향을 띄는 것처럼.
혹자는 영어에도 please, would you mind - 같은 표현이 있고 그게 존댓말이라고 주장할지도 몰라. 근데 아니야. 저건 "정중함"의 문제야. 그에 반해 존댓말은 "정중함"보다는 "높낮이/서열"의 문제고. 네가 상대에게 존댓말을 했는데 상대가 반말을 하면 기분 나쁜 이유는 존댓말/반말(존비어)이 서열을 설정하기 때문이야. 예를 들어, "-ㅂ니다"체는 화자의 서열을 낮추고 청자의 서열을 높이는 반면, "해"체(반말)는 화자와 청자의 서열을 그대로 두거든. 따라서, 한쪽이 반말, 다른 한쪽이 "-ㅂ니다"체를 사용할 경우 둘 사이에 두 단계의 서열이 발생하는 거야. 참고로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요"체는 화자의 서열을 그대로 두고 청자의 서열만 올리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많이 쓰이고 있지.
영어는 알다시피 2인칭 대명사의 thou/you 구분이 사라졌고, 프랑스어 같은 경우는 tu/vous로 구분하고 있어. 다른 인도유럽 어족의 언어도 비슷한 경우를 많이 찾을 수 있지만, 예의와 격식에 관한 건 호칭과 2인칭 대명사의 구분 정도가 끝이야. 인도유럽 어족만 그렇다고? 아니야, 중국어도 똑같아. 아직까지 존비어가 존재하는 나라는 손에 꼽을 수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 중에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있어. 일본어는 어찌 보면 한국어보다 심한 존비어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압존법/일인칭 대명사의 다양함 등),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라지고 있는 추세야. 뭐, 아직은 난장판이지만. 근데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맞아, 예전에도 일본이 먼저 변화를 받아들이고 바뀌는 동안 한국은 보수, 쇄국 부르짖다가 망했었잖아.
서양 것이 무조건 좋다는 사대주의가 아니라, 존댓말의 삭제는 어쩔 수 없는 언어 진화의 과정이야.(언어도 진화해) 사실, 가만히 생각해 봐, 우리 생활 속에서 소위 "한국적"이라는 것을 얼마나 찾을 수 있어?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는 진작에 바뀌었는데 언어가 그 변화의 속도를 못 따라간 것 뿐이라고.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사회 전체적인 운동과 국가 차원의 교육을 통해 바꿔야 한다는 거지. 가만히 있어도 존댓말은 어차피 언젠가는 사라질 거야. 다만, 그 시계 바늘을 빠르게 돌리자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야.
서문은 여기까지! 본문도 한번 읽어 봐 줘.
=> 본문
<한국어 개혁 선언 - 존비(尊卑)어 체계의 분쇄>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사고를 옥죄고 있는 사슬이 있다. 이 사슬은 세월에 침식되고 사슬에 얽매인 이들의 발버둥에 헐거워져 어느덧 강한 몸부림 한번이면 끊어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한국어에 잔존해 있는 시대에 뒤쳐진 부분을 수정하여 그 억제의 사슬을 끊고, 한국어가 진정 현대와 미래 사회에 걸맞은 평등함을 갖춘 언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언어 혁명을 일으킬 것을 주장한다. 하여, 그 첫걸음은 존비어 체계의 분쇄와 수평적인 친소(親疏)어 체계로의 전환이 될 것이다.
존비어 체계는 윗사람과 상위 계급을 향한 존경의 의미를 표하는 것과 수직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구시대에는 정보의 불평등이 심하고 사회의 규모가 매우 작았기 때문에 이러한 봉건적인 언어 체계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으나, 이후 언어와 사람들의 사고에 완전히 뿌리내려 물신화한 존비어 체계는 생활 속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언어는 대중에 의해 형성되지만 개인의 사고방식은 언어에 의해 형성되는 법이다.
나이는 더 이상 지식과 경험의 잣대가 되지 못하며, 수많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고, 다양한 이들과 자유로운 의견 교류를 해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존비어 체계는 우리의 사고를 수직적인 계급 속에 옭아매는 반면, 현대 사회는 점차 수평적인 사고를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는 인지부조화를 겪게 된다. 또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갑과 을의 상하 계층 구조를 끝없이 형성하여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합리화한다. 이는 사회적 계층 간의 차이를 크게 하고 가시화할 뿐만 아니라, 가장 단순한 의사소통을 할 때조차 상하 관계를 설정하고 계층 정보를 교환해야 하는 불편함을 낳아 개개인을 고립시킨다.
존비어 체계는 더 이상 우리의 아름다운 관습이 아닌, 우리가 타파해야 할 악습이다.
개인의 가치관, 이념적 성향에 상관없이 사회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리고 존비어 체계는 그 모든 종류의 변화의 갈림길에서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본 언어 개혁의 당위성이다. 적어도 두 세대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본 언어 개혁의 조속한 실행과 범국가적인 협력을 촉구하는 바이며, 이하의 수정 요구 사항을 나열한다.
1. 반말, 존댓말의 용어와 의미 변경 : 여기서는 각각 편한말, 격식말로 한다. 이 용어들은 수정의 여지를 남긴다.
2. 수직적인 존비어 체계를 분쇄하고 수평적인 친소어 체계를 적용한다. 친소어 체계 하에서 인간 관계는 다음 두 가지로 분류한다 : '소원한 관계(먼 관계/격식 필요)', '친한 관계(가까운 관계/격식 불필요)'.
소원한 관계에서는 상호 간에 격식말을, 친한 관계에서는 서로 편한말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단, 사회 통념 상 부모 자식과 사제 관계, 군대의 경우는 예외로 하여 상호 비대칭적인 격식말-편한말의 사용이 가능하다.
3. 모든 어미(語尾)의 계층 구조를 획일화 : '요', 'ㅂ니다' 등 현재 '존댓말' 로 분류되어 있는 모든 어미(語尾)를 사어화(死語化)한다. 또한 현재 '반말' 로 분류된 모든 어미(語尾)를 모든 인간 관계에서 사용할 수 있다. 즉, 모든 어미(語尾)는 격식말/편한말로 구분할 수 없다.
4. 선어말어미 '-시' 를 사어화(死語化)한다.
5. '들다/잡수다', '네' 등 동일한 의미를 가진 일반 표현이 따로 존재하는 높임말을 사어화(死語化)한다.
6. '저', '제가' 등 자신을 낮추는 단어를 사어화(死語化)한다.
7. '당신' 의 일부 의미 삭제 : 이야기되고 있는 대상을 높이는 표현으로서의 '당신' 의 의미를 사어화(死語化)한다.
8. 2인칭 대명사 '너' 의 사용처 확대 : 편한말. 소원한 관계가 아닌 모든 상대를 '너'로 이른다.
9. 소원한 관계에서 사용할 2인칭 대명사를 새로 조어(造語)한다 : '님'을 제안한다.
10. 모든 3인칭 대명사는 격식말/편한말의 구분이 없으며, '걔', '그' 등으로 이를 수 있고 모두 성 중립적이다.
11. '야' 의 사용처 확대 : 편한말. 친한 관계에 있는 상대는 누구나 '야' 로 호칭할 수 있다.
12. 소원한 관계에서 상대방을 부를 때 사용할 호칭 명사를 새로 조어(造語)한다 : '님' 또는 '선생님'을 제안한다.
13. 가족적 호칭 언니/오빠/형/누나 등의 사용 용도 제한 : 가족적 호칭은 가족에게만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타인에 대한 호칭은 11, 12항을 참조한다.
14. '님' 의 사용 용도 제한 : '선생님' 과 같이 이미 하나의 단어로 인정된 경우를 제외하면 어떤 단어와도 '님' 을 결합하여 사용할 수 없다.
15. 선배, 후배는 대화 상대나 제삼자를 호칭할 때 사용할 수 없다. 해당 단어들은 '2학년 선배' 와 같이 한 대상이나 집단의 특성을 표현할 때만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