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리 많이 아파요...
이젠 가을이 오려나?
아침, 저녁으로 해가 짧아졌다.
전에는 6시면 주변이 환해서 잠을 청하기가 어려웠는데 요즘은 7시가 돼도 어둠이 남아있다.
또 나에게 시련의 계절이 다가 오는가?
올 가을은 더 슬퍼지면 어떡하지?
그는 요즘 머리스타일을 바꾸었다.
다소 긴 머리에 웨이브가 지는 머린데 너무 잘 어울린다.
정말로...
쭉 뻗은 다리에, 웨이브 진 머리, 거기에 어울리는 가을 느낌의 옷차림...
와! 정말 멋져요. 감동예요!
오늘은 일요일이고 정말 시끌벅적한 강좌가 남아 있다.
전에 소장이 말했던 아이들을 위한 방학강좌가 인기가 있어서 주말에 강좌를 열었더니 수강생이 장난 아니게 많다.
많기도 한데 말들도 안 듣고 시끄러워서 아주 진땀이 난다.
오늘도 한 여자애가 남자애랑 싸우고 울면서 집에 갔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얼굴에 글쎄 흙을 집어 던져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래도 주말엔 선배가 같이 나와서 거드니 다행이다.
하여튼 정신 없는 강좌를 끝내고 집에 도착하니 오후가 되었다.
어? 민혁 인 없나?
나갔나 싶어 그의 방을 노크했는데 기척이 없다.
확인 차 문을 열었는데 민혁이가 자고 있다.
커튼도 쳐놓아 어둑한데...
가만 근데 자는 게 좀 이상한데...
어디 아픈가...
가까이 가서 그의 얼굴을 보니 열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다.
이마를 집어보니 열이 장난이 아니다.
이런~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 더니...
큰일이네...
" 민혁아, 일어나. 병원가야지"
그가 깼다.
" 오늘 병원문 안 열어. 일요일이잖아 "
" 아, 그렇구나. 그럼 어쩌지? 그럼 약국에 가서 약이라도 사 와야겠다."
"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 몰라, 요즘 유행하는 감긴가봐. 열이 많고 몸살기가 있어. 몸은 춥고 누나 두꺼운 이불 좀 없어?"
" 있어, 잠깐만 "
난 그에게 두꺼운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물수건을 머리에 얹어주고는 약국으로 향했다.
우리동네는 가까운 데 약국이 없어서 큰길까지 가야 했다.
근데 또 약국이 다 문을 닫았네.
아 그렇지?
처방전 없이 약을 지을 수 없으니 문을 닫겠지...
그래도 혹시나 싶어 돌아다닌 끝에 허름한 약국 한 곳이 문을 연 것을 발견했다.
부랴부랴 약을 지어 집으로 왔더니 그가 더 아파 보인다.
일단 약을 먹이고 열이 너무 높아서 열을 내리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에 물수건을 계속 해주었다.
열이 다소 내렸는지 그가 편안하게 잠들었다.
난 또 잠든 그의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물수건을 바꿔주면서 그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한번 닦아주고, 그의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 주었다.
그의 볼, 이마, 코, 입술...
내 맘대로 그의 얼굴을 만질 수 있다니!
그에겐 안됐지만 아파 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밤새 그를 간호하면서 그의 옆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가 문득 깨어 눈을 뜨니 그가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날 바라보고 있다.
"언제 일어났어?"
이마를 짚어 보았더니 열이 많이 내렸다.
" 다행이다. 열이 많이 내렸네"
" 고마워 누나 "
" 넌 맨 날 고맙다니..."
" 자 일어나, 저녁 안 먹었잖아. 밥 먹고 약 먹 구 자면 좀 더 많이 좋아질 꺼야."
" 그냥 잘게 "
" 안 돼, 일어나"
억지로 그를 일으켜 밥을 먹이고 약을 먹여 재웠다.
그 다음날 그는 미열이 약간 남은 상태로 출근을 했고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병원에 가기를 거를까봐 전화를 여러 번 해서 확답을 받았다.
그래서 인지 그는 남들이 그렇게 오래 앓는 다는 독감을 3일 만에 끝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근데 독감이 유행은 유행인가 보네...
우리 문화센터에도 지금 독감 걸려 돌아다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조심해야겠는데...
옮으면 어떡해요.
그래서 나는 될 수 있으면 독감 걸린 사람들과는 정면에서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안 그런 것 같아도 좀 까탈 스런 대가 있나?
어쨌든 우리 생활도예 아줌마 한 명이 아들에게 옮았다며 얼굴이 벌게 질 때까지 기침을 해대며 앉아 있는데...
하필 오늘 전기 물레로 만든 녹차 컵에 굽 만드는 거 하는 날인데.
굽이란?
찻잔이나 도기 아랫부분을 보면 약간 턱이 있지 않은가, 그 부분을 얘기하는 것이다.
굽을 만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 데 하나는 그 굽 모양대로 흙을 말아 붙이는 것이고 하나는 기존 도자기의 흙을 굽 모양대로 깎아내는 것이다.
오늘은 깎아내는 작업을 해야하는 날이다.
일단 저번 주에 다들 녹차 잔을 만들어 놓고 일주일은 비닐을 살짝 씌워 말려서 적당히 잘 말랐다.
그걸 뒤집어 전기 물레에 올리고 물레를 돌리면서 굽을 깎는데 이 아줌마들 전기 물레 처음이라 당황할 거다.
발로 살짝만 밟아도 막 돌아 가거던..
굽 깎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 잡는 일이고 중심을 잡고는 중심부위에 칼을 대고 살짝 힘을 주고 있으면 사과 껍질 깎듯 깎인다.
그렇게 하면 되는데 다들 잘 못해서 그릇이 물레에서 떨어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아줌마도 있고 난리도 아니다.
근데 이 독감 아줌마 자꾸 어떻게 하는 지 잘 모르겠다고 직접 도와달란다.
에이~ 그래서 아줌마 손잡고 옛날 영화 '고스트' 에서 했던 것처럼 도와드렸다.
옛날에 그 뚱보 아줌마들은 이 재미에 남자선생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그 아줌마들 생각나네...
다들 뭐하시나...
그 수업 끝나자 마자 난 손 씻고 가글하고 철저하게 대비했다.
제가 너무 하다 구요?
결벽증 아니냐 구요?
전 몸이 아픈 건 정말 싫어요.
어렸을 적에도 매 맞는 건 정말 싫어했었던 것 같아요.
누구나 그렇다 구요?
그런가...
이상하게 머리가 띵하네.
이젠 다 끝났다.
데스크 아가씨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 데 소장이 날 찾는단다.
똑! 똑! 똑!
" 네, 들어와요"
" 어머, 경자씨! 어서~와요."
호들갑! 반가움! 친절!... 민혁아! 고맙다!
근데 우리 소장 얼굴을 감싼 저 마스크의 정체는?
그 큰 얼굴에 눈만 빼꼼히 나와있고 그의 심벌인 핑크빛 볼연지가 그 마스크위로 정확하게 딱 반이 나와있다.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부채꼴의 호의 길이 구하는 문제 중에 본 것같이 딱 180도가 된 반원.
" 경자씨, 나 우습지?"
" 웬 마스크를 하셨어요?"
" 요즘 독감이 유행이잖아. 나 두 독감 걸렸지 뭘 "
으~ 뭐라 구요!
세상이 나의 안위를 허락하지 않는가?
덤벼라~ 세상아~~~
' 근데 왜 보자고 한 거지...'
" 요즘 내 말대로 일요일 날 아이들 강좌 수강생 많죠?"
" 네, 덕분에"
" 도예의 폐강위기를 넘기게 했으니 한 턱 쏴야 하는 거 아냐?"
하여튼 절대 믿지 고는 못사는 스타일이라니까.
" 아니, 뭐 그래서 부른 건 아니구"
" 저 이제 날도 점점 선선해지는데. 이제 수술날짜 좀 잡아 보려구"
" 아, 네"
" 언제가 좋을 까?"
" 일단 독감 나으시거든, 얘기해 주세요"
" 다시 한번 민혁이한테 가서 상의해야 하지 않겠어요?"
" 그래야 겠지?"
민혁이를 다시 본다는 생각 때문일까? 예뻐진다는 생각 때문일까?
정말 좋아하네.
아! 그리운 나의 집.
아! 피곤.
한 참을 누워서 잠을 잤는데 밤두 지나구 벌써 새벽인가?
일어나려구 했는데 몸이 으슬으슬, 머리가 지끈지끈~
아! 춥다.
왜 이러냐?!!
윽~~ 호~ 옥 시, 도~ 옥 감이 옮은 것 아냐?
우리 소장, 아니 그 아줌마~, 이 사람들이 진짜~~
어떡해~~
아이구 오늘 출근 이구 뭐 구 다 틀렸다.
꿈쩍 두 하기 싫으네.
근데 민혁인 벌써 출근 했나?
아직 새벽인데...
깨우기는 싫고, 어디 날 얼마나 생각하나 봐야지.
그를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가 출근 할 때 보라 구 나가는 현관문 그의 눈 높이쯤에다가 메모를 붙여놨죠.
' 누나가 많이 아프다. 독감 인가봐. 흑흑~ '
이렇게요.
그것두 떨어질 까봐 초강력 테이프로 단단히 붙이고 재차 확인했죠.
그리곤 유유히 올라와 침대에 누워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얼마나 놀라고 맘 아파할까?
약 사들고 오려나?
이런 생각을 하니 아픈 게 조금은 가시더라 구요.
근데 그리구 얼마를 기다린 거야..
지금 여기가 어딘가?
꿈속인가?
저 나비는?
저 나비는 꿈속의 나인가?
아니면 내가 나비고 꿈속에서 사람인가?
꿈과 현실이 완전 엉망이 되고 시간 관념 두 없구...
그리곤 또 오래...
자다가 깨길 여러 번 반복한 것 같은 데...
근데 그가 왔나봐요.
그의 손길이 느껴져요.
그가 내 이마에 손을 짚고는 안타까워하는 것 같아요.
그리곤 내 머리를 쓸어서 가지런히 해주고 물수건을 올려주고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 같은
데 이때 눈을 떠야 하나?
아~ 고민되네...
한 동안 아픈 거고 뭐고 감전된 것처럼 숨도 못 쉬고 있었는데...
연기력도 부족하고 숨 참기도 힘들고 해서 몸을 뒤척이는 척하고 눈을 떴는데...
이게 뭐야?
너~ 누구야~
너 개판이~~~
" 어머. 개판 씨가 남의 방에 웬일이 예요?"
난 잔뜩 경계심을 품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 사람이 지금 어떻게 남의 방에 와 있는 거야?
도대체~ 왜~ 어떻게~
이거 지금 꿈 아냐~
볼이라도 한 번 꼬집어볼까?
저 눈빛은 또 뭐야?
지 딴엔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 같은 데 내보기엔 음흉한 눈빛.
난 정신을 빨리 가다듬고 사태 파악에 나섰다.
지금 이 악몽이 엄연한 현실임을 깨닫고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 저 개판 씨, 개판 씨가 어떻게 여길 들어왔어요? "
" 네? 저 문이 열려 있길래. 아무도 없는 줄 알구. 근데 현관에 아프다고 붙여놔서 내가 약 좀 사 가지고 왔는데..."
" 어휴, 이 열 좀 봐 얼른 일어나요. 제가 물 떠올게요."
뭐야~ 시이~
" 여기 물이요.아니 아직 약 두 안 먹 구 병원 두 안 가구 이렇게 누워만 있었던 거예요? "
" ..."
민혁인 뭐 하냐 구 물을 래다가 물을 기분도 아니라 묻지 않았다.
" 자, 경자씨, 일어나요. 얼른 병원 갑시다."
개판이 놈이 보기보다 그래도 싹싹하네.
난 그렇게 개판이의 손에 이끌려 가까운 병원에 갔다.
그리곤 개판 이가 죽도 사주고 해서 그거 먹고 자고 있다. 지금.
개판이 한텐 진짜 고맙다고 여러 번 얘기하고 자꾸 간호한다는 걸 부담스럽다며 보냈다.
아~ 슬프고 아프다...
다 포기...
또 깼다.
지금은 몇 시지?
그는 오지 않았나?
그가 무심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데...
자꾸 그가 그 메몰 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개판 이도 그렇게 잘 보는 메모를...
아니면?
무슨 급한 일이 있을 거야.
아니면?
아니면 뭐야?
뭐 긴 뭐야?
경자야! 너 미쳤니?
그에게 뭘 바라니?
초심 으로 돌아가?
초심?
그래 결혼 조건.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기.
그에게 특별히 바라는 거 없었잖아.
그는 오늘따라 이렇게 늦는데...
헛물켜지마...
다짐 또 다짐.
지금도 너무 아프거든요.
몸도 마음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요.
그리구 또 잤나봐요.
누군가가 내 눈물을 닦아주나요...
꿈 일거예요.
잘 깨어지질 않아요.
아련한 것이 엄마 같은데...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고 멀리 빛 속으로 사라져요.
엄마...
가지 마세요...
꿈속에서조차 마음이 아련한 게 눈물이 나요...
또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아요...
누가 또 내 눈물을 닦아주나요...
누구지?
눈을 떴어요.
그가 날 바라봐요.
내 눈에서 또 눈물이 흘러요...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흘렸던 눈물인가 봐요.
그가 또 내 눈물을 닦아줘요...
그도 슬픔이 많은 사람인가 봐요.
그를 알아갈수록 그가 슬픔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누나, 많이 아파..."
...
...
응, 누나가 많이 아파, 그래서 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