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구경만 하다가 오늘은 푸념 좀 하고 싶어서 써봐요.
저흰 만난지 500일 좀 넘은 동갑내기 커플이에요. 알고 지낸지는 4년정도 됐고 그 세월동안 이 사람은 제게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연인이 되어줬어요. 연애 초기 때는 정말 많은 것들을 했고 돌이켜보면 주변에 자랑할만한 경험도 기억도 이 사람 만나고 많이 해봤어요. 그런데 연애 기간이 길어지면서 예전엔 좋았던 것들이 이젠 힘들고 그러네요. 제게 권태기가 온 건지 이 사람한테 권태기가 온 건지 모르겠어요.
저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라요. 가장 안 맞는건 온도 차이에요. 저는 추운 게 너무 싫은데 남친은 더운 걸 엄청 싫어해요. 같이 낮잠이라도 자려고 하면 선풍기를 틀고 끄는걸로 매번 실랑이가 생길 정도에요. 여름 휴가때 놀러가도 이걸로 부딪히고 크리스마스 여행을 가도 이 문제로 꼭 한 번씩은 다퉈요. 저는 더울 때 바다도 놀러가고 수영장도 놀러가는걸 좋아하는데 남친은 여름에 나가서 노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아요. 제가 조르고 졸라서 어쩌다 한 번 놀러갈 때면 다 포기한듯 맞춰주는데 그럼 보는 제가 다 기운이 빠져요. 올 여름엔 코로나 때문에 실내에서 자주 만났는데 날이 더우면 밥도 먹는둥 마는둥 표정도 안 좋고 그냥 제가 만나자 놀자 하니까 맞춰주기만 하는 느낌이에요.
제가 배움이 짧은 편이 아닌데도 이 사람이 저보다 배운 게 많아요. 공부 쪽에 일가견이 있고 굉장히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공부해온 분야가 그렇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그런지 어떨 때는 굉장히 냉소적이고 아닌건 아니다, 싫은건 싫다고 바로바로 표현하는 편이에요. 그에 비하면 저는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80퍼센트정도가 마음에 들면 좋다고 표현하는 성격이에요. 웬만한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게좋게 넘기면서 기분 좋게 살자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맛있는걸 먹으러 갈 때 정말 맛있지 않으면 남친은 바로바로 표현해요. 여긴 파스타가 좀 별로네, 생크림이 밍밍하네, 양이 많네... 가끔은 저도 동감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만나서 데이트하는 동안은 그런 말 안 해도 되잖아요. 저는 이 사람이랑 마주앉아서 디저트를 먹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이 사람은 맛 평가를 하려고 절 데려온 것 같아요. 영화나 대학로 연극을 보러가도 그래요. 제가 무뎌서 그런지는 몰라도 끝나고 나올 때면 신나서 남친한테 오늘 보러오길 잘했다, 재밌었다, 등등의 말부터 꺼내는데 남친이 그러는 날은 정말 드물어요. 영화 하나를 봐도 저 감독은 약자를 어떻게 했고 저 시대적 배경이 마음에 안 들고 그런 말들을 많이 해요. 그냥 즐겁게 볼 수도 있는데도요... 그래서 같이 먹을 식당을 고를 때도 같이 보러 갈 영화를 고를 때도 어떻게 해야 남친이 기분 좋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스트레스 받는 날이 많아요.
대체로 맞는 말을 해요. 남친이 맛이 없다는 파스타는 정말 맛이 없을 때가 많고, 문제가 많다는 영화 감독은 정말 문제가 많아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중점은 먹는 음식의 퀼리티나 보는 영화의 완성도보다는 저희가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점인데 그걸 이 사람한테 기대하기는 어려워요.
남친은 저를 정말 사랑한대요. 그리고 그만한 표현도 많이 해줘요. 제가 무뚝뚝한 얼굴을 싫어해서 저를 보면 많이 웃어주고 제가 스킨십을 좋아해서 자주 안아주고 손도 잡아주고 맞춰주려고 해요. 그런데 그게 맞춰주려는 행동에서 나온다는게 연애 초기에는 너무 고맙고 좋았는데 지금은 진심이 아닌 것만 같아 서운해져요. 제 마음이 좁아서 그런가보다 하고 좋은 면모만 보고 싶어도 우리의 다른 점에 자꾸 지쳐가나봐요.
남친이 먼저 고백했어요. 사실 친구보다는 썸에 가까운 사이로 재밌고 즐겁게 지내다가 남친이 자기가 절 좋아하는걸 정말 모르겠냐는 식으로 물어서 그렇게 만나게 되었어요. 제가 여행 다니는걸 정말 좋아해요. 틈만 나면 모아둔 돈으로 친구랑, 혼자서, 어떨 때는 이 사람이랑 같이 놀러다녔어요. 그래서 사귀기 전에 당일치기로 같이 놀러가본 곳도 정말 많아요. 연애하면서 그렇게 여행 가는 횟수도 점점 줄고 제가 좋아하는걸 못 하니까 답답하기도 해요. 저희는 여행지에서 만났거든요, 그래서 연애하면서도 이 사람이랑 놀러다닐 곳이 많아질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요즘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잘 놀러다니고 신나게 여행하던 연애 전의 제가 그리워요.
이 사람을 정말 많이 사랑해요, 저도. 이 사람이 주는 사랑을 받는 일이 아직도 행복하고 없으면 괴로울 것 같고... 그렇지만 이 사람을 사랑하고 이 사람의 곁에 있어서 괴로운 것 같은 날도 많아요. 연애 경험이 많진 않아서 현남친이 가장 제대로 오래 만나본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서툰걸까요? 너무 기대하는게 많아서 그런걸까요? 나는 이 사람과 뭘 하든 즐거운데 그 사람은 마냥 그렇지 않은 것 같은게 속상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때에는 잘 대해주는게 너무 좋고 계속 사랑받고 싶다가 그래서 눈치보이고... 예전 같았으면 상반되는 성격도 신기하고 재밌었지만 갈수록 지쳐요. 제 앞에선 냉소를 내려놓았으면 좋겠고 맞춰주는 애정보단 더 진심인 애정을 원하고 그렇네요..
코로나가 괜찮아지면 전시회라도 가자, 당신이 좋아하는 인적 드문 임도로 드라이브 가자... 그렇게 어디 놀러가자는 말만 나오면 답장 속도도 현저히 느려지고 그러는게 문득 너무 속상해서 적어봤어요. 참고로 금전적인 문제로 다툰 적은 없어요. 둘 다 여행 경비는 충분히 넘치고 서로한테 돈 쓰는것도 아까워하지 않으니까요. 그냥 제가 정말 활동적이고 이 사람은 그만큼 활동적이지 않은 게 그래요. 달라도 너무 다르네요.
저는 여름이 좋고 영화가 좋고 여행이 좋고 과일이 좋고 말이라도 좋은 칭찬이나 감탄사가 좋고... 겨울을 더 좋아하고 책을 더 좋아하고 과일은 싫어하고 냉철한 평가는 숨기질 않는 이 사람. 달라서 즐겁고 재밌었는데 이제는 달라서 힘들어요. 더 만나다 보면 극복될까요, 우린.
--댓글 보고 추가해요. 그럼요 남친이 좋아하는게 뭔지 당연히 알죠. 저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요...이 사람은 책을 읽고 신문을 보고 정치 시사 흐름을 따라가는걸 좋아해요. 공부하고 일하는 게 그 비슷한 분야이기도 하고요. 남친이 좋아하는 서점이나 도서관이나 북페어도 자주 가고 인권운동, 시사 모임에도 종종 같이 가요. 드라이브를 좋아해서 국도나 서울 외곽을 다녀보기도 하고요. 남친도 여행을 싫어하진 않아요. 저희는 애초에 여행을 (길고 멀리가는 해외여행이 아니라 국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탐방도 포함해서요) 좋아하는 점이 비슷해서 친해졌거든요. 이 부분을 굳이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저도 남친에게 많이 맞춰주지만 그게 불만이었던 적은 없어서 그랬어요. 나는 이렇게 해주는데 왜 이 사람은 그러지 않을까가 주된 고민은 아니고... 다른 분 댓글이 너무 와닿아서 한참 멍하니 있었네요. 많이 사랑해서 그래요. 사랑하는데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 사람이 냉소적인 면을 보이면 그게 두려워서 속상한가봐요. 이게 지속되다 보니 지치고 그랬겠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냥 울적했는데 많은 위안이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