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군중이다.많은 목소리들로 이루어진 군중이다.관련이 있건 없건, 일관적이건 비일관적이건각각의 목소리는 서로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수많은 목소리는 인간을 분리시킨다.대부분의 인간들은 혼란 상태에 있고 사실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에 있다.
그대는 어떻게든 자신을 통제한다.어떻게든 통제해서 정상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그러나 속에서는 겹겹이 쌓여온 광기로 들끓고 있다.그것은 어느 때라도 분출될 수 있다.그대는 어느 때라도 통제력을 잃을 수가 있다.그 통제력은 외부에서 억지로 하는 것이고,그대 존재의 중심에서 훈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유들로 인해 그대는 자신에게 어떤 인격을 강요한다.하지만 그대 마음속 그 인격과 대립되는 많은 치명적인 힘들이 존재한다.그것들은 끊임없이 그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있다.그러므로 그대는 날마다 끊임없이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때로는 전혀 원하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실수를 저지른다.그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 실수들을 죄라고 부르지 않는다.그것들을 죄라고 부르는 것은 그대를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붓다는 단순히 그것들을 잘못된 행위, 실수, 잘못이라고 부른다.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이다.실수하지 않는 것은 신성이다.인간에서 신성으로 가는 길은 깨어서 지켜봄(mindfulness)을 통해서이다.
그대를 괴롭히고 밀고 끌어당기는 안에 있는 모든 목소리를 멈추어라.깨어서 지켜본다면 이 많은 목소리들이 사라질 수 있다.
깨어서 지켜보는 상태에서는 실수가 일어나지 않는다.그대가 그렇게 하려고 조절해서가 아니다.주의 깊게 지켜보는 상태에서, 각성 속에서,깨어 있는 상태에서 많은 목소리들이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그대는 단순히 하나가 되고 존재의 최심층에서 모든 것을 한다.그러므로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경전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본주의 심리학에는 그것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예가 있다.'PAC'라 부르는 인간관계 분석 모형이다.P는 부모(Parent)를 의미하고,A는 성인(Adult)을 의미하며,C는 아이(Child)를 의미한다.이것들은 3층 건물과 같이 그대의 세 층을 이룬다.첫 번째 층은 아이의 것이고,두 번째 층은 부모의 것이며,세 번째 층은 성인의 것이다.셋은 모두 함께 존재한다.이것은 내면의 삼각관계이며 갈등이다.내면의 아이가 하나를 말하면,내면의 부모가 다른 것을 말하며,내면의 성인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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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여러 각도를 선택해서 노력해봤지만 아무것도 효과가 없었다.붓다의 관점은 전적으로 다르다.인간 의식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공헌은 바로 그것이다.그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말라고 한다.그는 각도의 중심에서 움직이라고 한다.이성을 선택하지 말라.부모를 선택하지 말라.아이를 선택하지 말라.다만 각도의 중심에서 움직이고,침묵 속에서 머무르고,깨어 있어라.그의 접근 방식은 대단히 심오하다.그때 그대 존재의 명료한 전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그러한 전망과 명료함 속에서 응답이 오도록 놔두라.
다른 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만일 그대가 아이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유치한 반응이다.수없이 그대는 아이로서 반응했다.누가 안 좋은 얘기를 하면 상처받고,불끈 화를 내고, 분노하고, 짜증을 낸다.그러고는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나중에는 그대의 이미지를 망친 것이 불쾌하다.모든 사람이 그대를 아주 점잖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였다.게다가 실은 그리 대수롭지도 않을 일이었다.혹은 그대가 부모의 의견을 따른다면,나중에 그대는 여전히 부모에게 억눌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대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고자기 손으로 삶의 고삐를 끌고 나갈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그대는 가끔 이성을 따른다.그러나 그때는 이성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감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감정이 없는 이성적 존재는 단지 머리에 불과하다.그는 몸과의 연결, 삶과의 연결을 잃고 단절된다.그는 단지 생각하는 기계로서 움직인다.
생각은 그대를 펄펄 살아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생각 속에는 생명의 감로수가 없다.생각은 아주 건조한 것이다.그때 그대는 갈망한다.그대의 에너지를 다시 흘러가게 할 수 있는,다시 그대가 신선해지고 생기 차고 젊어지도록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갈망한다.이것은 반복된다.그대는 스스로의 꼬리를 좇는다.
붓다는 이 모든 것은 반응(reaction)이며반응은 결국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오직 감응(response)만이 전체이다.부분적인 것은 잘못된 것이다.붓다는 실수를 그렇게 정의한다.부분적인 것은 잘못된 것이다.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부분이 복수를 해올 것이기 때문이다.전체가 되어라.감응은 전체적이고, 반응은 부분적이다.
하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를 때는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그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오직 한 부분만 만족되고 다른 두 부분은 극심한 갈증을 느낄 것이다.비록 한 부분은 만족할지라도 그대는 여전히 불안할 것이다.
무엇을 하든 반응으로써 행한다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반응은 부분이기 때문이다.감응은 전적인 것이다.그때 그대는 그 세 가지로부터 영향받지 않는다.그대는 선택하지 않는다.단순히 선택 없는 각성 속에 머문다.그대는 중심을 잡는다.무엇을 하든 그 중심 속에서 행동한다.아이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며 성인도 아니다.그대는 PAC를 넘어섰다.이제부터야말로 진짜 그대이다.아이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며 성인도 아니다.그것은 그대이며, 그대의 존재이다.PAC는 사이클론과 같고, 그대의 중심은 사이클론의 중심이다.
그러니 감응이 필요할 때마다먼저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붓다는 말한다.
중심을 기억하라.
중심 위에 단단히 서라.
무언가를 하기 전에 잠시라도 거기에 있어라.
그것에 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생각은 부부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불필요하다.
느낌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모나 <성경>, <코란>, <기타>, 이것들은 모두 부모이니 여기서 실마리를 찾을 필요는 없다.그저 편안하고 조용하게 머물러 있어라.단순히 깨어 있어라.마치 그것의 밖에 있는 듯이 지켜보고 초연하라.언덕 위의 주시자가 되어라.
행동하고 싶을 때마다 중심으로 들어가라.그것이 첫째 요건이다.그다음, 그 중심 속에서 행위가 일어나게 하라.그러면 무엇을 하든 덕德이 될 것이다.무엇을 하든 옳을 것이다.
붓다는 올바른 주의함은 오직 덕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말한다.주의하지 않음은 잘못에 빠지는 것이다.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잘못에 빠지는 것이다.
<42장경 1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오쇼 라즈니쉬 강의 / 이경옥 옮김, 정신세계사 펴냄) 에서발췌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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