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낮은 곳으로
-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도종환, 라일락꽃 중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
아직 작은 씨앗이기에
그리 조급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
/박치성, 봄이에게 중
-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허연, 칠월
-
네 잘못이 아니다
홀로 떠 있다고 울지 마라
곁에는 끝없는 파도가 찰랑이고
위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단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들을 보아라
홀로 떠 있지도 못하는 것들
저토록 하염없이 헤매고 있지 않느냐
바람 부는 대로 파도치는 대로
그 자리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것들은
저토록 소리치며 낡아가고 있지 않느냐
네 잘못이 아니다
홀로 떠 있다고 울지 마라
너는 이미 은하의 한 조각이 아니더냐
/홍영철, 외딴 섬
-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기형도, 오래된 서적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
가장 빛나는 별은 지금
간절하게 길을 찾는 너에게로
빛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박노해, 별은 너에게로
-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정호승, 부치지 않은 편지 중
-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중
-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제가 당신을 여름날에 비유해도 될까요?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당신은 그보다 더 사랑스럽고 온화해요
Rough winds do shake darling buds of May,
거센 바람은 오월의 사랑스러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우리에게 허락된 여름날은 너무나 짧아요
Sometimes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천국의 눈은 때때로 너무 뜨겁게 빛나고
And often is his gold complexion dimmed:
종종 그의 황금빛 안색이 흐릿해지기도 해요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s declines.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저물기 마련이에요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ed;
우연에 의해서든 자연의 변화하는 섭리에 따라서든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희미해지지 않아요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
그대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또한 사라지지 않아요
Nor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
죽음의 그림자도 당신 앞에선 당당할 수 없을 거예요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불멸의 시구 형태로 시간 속에서 자라날 테니까요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인간이 살아 숨 쉬는 한, 두 눈이 볼 수 있는 한,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이 시는 영원히 숨 쉬며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니
/셰익스피어, 소네트 18번
-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너를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 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려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 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 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 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장이지,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
그 모든 밤, 슬픈 밤들,
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 없을 때
창백한 달의 섬광만이 나와 함께 있어줄 때
나는 그 지친 눈을 한 너를 갈망한다.
하지만 아침이 깨어나고, 네가 아직 오지 않았을 때, 나는 이 밤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란다.
어두운 밤이어야만 내 불운한 마음이
거짓으로나마 편해질 수 있으니.
/알로이스 그라드니크, 밤과 밤
-
우리는 타인을 할퀴던 두 손으로
자신의 이마에 길고 흰 사랑을 기록한다
/박서영, 삵 중
-
내 사랑은 소나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가랑비였습니다
내 사랑은 폭풍이었으나
당신의 사랑은 산들바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었지요
한때의 소나긴 피하면 되나
가랑비는 피할 수 없음을
한때의 폭풍 비야 비켜가면 그뿐
산들바람은 비켜갈 수 없음을
/이정하, 사랑의 우화
-
네가 하늘만큼 나를 보고 싶어할 때
나는 바다만큼 너를 향해 출렁이는 그리움을
한 편의 시로 엮어 보내면
/이해인, 친구에게 중
-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 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고재종, 첫사랑
-
내가 울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에 울음을 참아 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내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부르면 이름을 부를수록
너는 멀리 있고 내 울음은 깊어만 간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신달자, 너의 이름을 부르면
-
어딘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나태주, 멀리서 빈다
-
헤아릴 수 없이 넓은 공간과 셀 수 없이 긴 시간 속에서 지구라는 작은 행성과 찰나의 순간을 그대와 함께 보낼 수 있음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중
저번 글 댓글에 좋은 시 추천해줘서 고마워 그것도 본문에 넣었어!! 참고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기형도 시인의 오래된 서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