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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역사

인생은늘시... |2020.11.30 20:08
조회 543 |추천 0

   단군조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인정하는 터이나, 우리는 단군조선의 성립시기나 위치 및 국가의 성격에 대하여 명쾌한 설명을 할만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단군조선에 관한 거의 유일한 문헌사료라고 할 수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보면, 단군왕검이 다스리던 아사달 사회는 신석기문화 전통을 강하게 지닌 초기 청동기사회이며, 부족연맹 형태를 띤 일종의 신정국가로 이해된다.

  고고학상 단군조선이 존재하였던 시기 요하유역의 청동기 문화의 변화를 살펴보면 한반도의 고대문화와 직접적인 계승관계에 있는 내몽고에서 하북을 거쳐 요동에 이르는 광의의 요하유역문화권은 지역적 성격상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교차하고 있으나, 대표적인 초기청동기 문화는 홍산문화에서 소하연문화를 거쳐 발전된 하가점하층문화로 적봉지대는 B.C.2400년, 요서의 풍하문화는 B.C.1700년, 요동지역은 B.C.1500년경에 청동기시대로 진입하는 농경민의 정착문화이다.

  최근에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요하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면서 어느정도 단군조선의 성립년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하가점하층문화 자체를 고조선문화로 보아 단군조선의 건국년대를 소급해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어 주목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하가점하층문화의 경우 그 성격이나 담당주민의 족원이 분명치 않아 그 문화권의 범위 모두를 고조선의 정치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이러한 문화가 단군조선의 국가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요서지역의 경우 홍산문화 말기에 이미 신전건축이 나타나며, 이를 계승한 하가점하층문화 초기에는 ‘고문화고성고국’ 단계로 진입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요동지역에도 하가점문화와 병행하여 청동기문화가 개화되는 B.C.1500년기에는 도시국가형태의 초기국가가 출현하였으리라 생각되며,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도 보다 정밀하게 재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재음미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기자의 동래와 단군조선이 여러차례 도읍을 옮기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기록으로 보아 단군조선의 도읍 이동은 하천의 범람 때문이라기 보다는 기자를 비롯한 은주세력의 동진등 주변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B.C.12-11세기에 들어오면서 요녕지역에는 은주청동기문화가 연산을 거쳐 대릉하유역으로 확산된다. 특히, 대릉하 상류의 객좌현 등지에서 기후방정을 비롯한 은대의 동기가 위영자문화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를 기자의 동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하가점문화와는 달리 그 문화층이 매우 엷고 문화의 범위도 요하를 넘지 못하는 한정된 지역의 문화로 현재 요하이동에서 은주청동기가 나오고 있는 지역은 무순일원으로 국한되고 있다. 곧 하가점 상층문화와 요녕지역의 비파형동검 문화에 압도됨을 알 수 있다. 기자국을 상징하는 기후동기도 이후에는 주로 중국내지인 산동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것도 대부분 춘추시대 말기에는 소멸된다.
 은주교체기에 기자를 비롯한 은족의 일부가 연산에서 대릉하유역 일대로 진출하여 일시간 존속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지않아 단군조선을 비롯한 토착세력의 강력한 저지를 받아 결국 중국내지로 후퇴하여 중국의 다른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늦어도 춘추에서 전국으로의 이행기에는 소멸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대릉하 유역에 기자국이 실재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이것이 곧 단군조선을 대체한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고기>의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바로 기자국의 소멸 이후에도 단군조선이 존속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고조선 중 최초의 국가인 단군조선은 홍산문화에서 발전된 하가점하층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요하중류역의 특정한 지역, 즉 후대에 조선이라 불리워진 ‘아사달’을 중심으로 이른 시기부터 신정국가적 성격을 지닌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는데, B.C.1100년을 전후하여 기자를 비롯한 은주세력이 대릉하유역에 등장함에 따라 이들과 대립 항쟁하면서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으나, 은주세력의 동진을 요하선에서 저지하고 기자국의 소멸이후에는 다시 고토인 아사달로 돌아와 존속하였다.

 

 

2. 성장기 - 한조선(韓朝鮮) 시기


  고조선의 대중관계가 비교적 객관적인 문헌사료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기원전 9세기경이다. 기원전 10-9세기에 이르면 요녕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은주청동기문화를 압도하는 하가점상층문화와 요녕비파형동검문화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하가점하층문화를 계승한 자생적 문화의 발전을 의미하는지, 새로운 민족이동의 여파로 인한 문화적 교체인지 속단할 수 없으나 보다 발전된 청동기 문화의 등장임은 분명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문헌사료에도 한후(韓侯)라는 명칭을 지닌 정치세력이 등장한다. B.C. 8~9세기경인 周 宣王대의 저작으로 알려진 <<시경>> <한혁>편에 의하면 ’연나라 근처에 예족과 맥족을 다스리는 한후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의 한이(韓)란 정치적 대군장을 의미하는 알타이어 한(汗)·칸(干)과 통하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중국인들이 이를 姓으로 오인하여 한후(韓侯) 또는 한씨(韓氏)로 기록하였던 것이며, 후대에는 민족명칭으로 발전하였다. 한후를 중국의 제후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시경의 내용으로 보아 고조선의 수장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단군이 제정일치시대의 군장 호칭임에 비해 한후는 보다 강력한 군주권을 표현한 명칭으로, 당시의 고조선은 단군조선이 단군이란 군장 호칭에 의해 규정되는 바와 같이 한조선(韓朝鮮)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의 ‘한조선’이란 용어는 종래의 ‘기자조선’을 ‘한씨조선’으로 대치한 것과 같은 왕조 창업자의 성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역사발전단계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제정일치 시대인 ‘단군조선’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한조선의 등장이 요하선을 경계로 은주문화와 대립하던 단군조선의 요서 지역으로의 발전을 의미하는지 새로운 민족이동의 여파로 인한 것인지 속단할 수 없으나 군장호칭의 변화와 예맥을 함께 통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한조선은 도시국가 단계를 벗어나 연맹왕국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주목되는 것은 <<시경>>의 내용에 당시의 한조선이 주및 연과 무역을 비롯한 외교적 교섭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중원제국과의 외교적 교섭사실은 바로 비파형동검문화를 바탕으로 한 고조선의 국가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첨부 이미지

연나라 침략 이전 고조선 전성기의 영토(역사스폐셜)

 

 

3. 발전기 - 고조선왕국 시기


  춘추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고조선은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관자>>를 비롯한 <<전국책>>·<<산해경>> 등 선진시대의 문헌에는 단편적이긴 하지만 종래와는 달리 국가로서의 조선의 명칭과 위치에 관한 기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고조선의 발전에 따른 중국과의 교섭이 활발해진 결과라고 생각된다.
  특히 기원전 7세기경의 사실을 전하는 관자에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올 뿐만아니라 조선의 문피를 7대 교역품으로 들고있으며, 조선의 특산물인 무늬있는 짐승가죽(文皮)과 털옷을 후한 값으로 사준다면 팔천리 떨어진 조선이라도 來朝할 것이라고 하여, 고조선이 제와 호피 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후대이긴 하지만 <<사기>> <화식열전>에도 연이 진번, 조선 등과 교역함으로써 무역의 이익을 얻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고조선 지역에 명도전, 일화전, 포전 등 다량의 중국화폐가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당시의 고조선이 연, 제 등과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하여 활발한 교섭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8세기로 추정되는 요동반도의 강상무덤에서 발해만이나 서해북부에서는 나지않는 열대산 보배조개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지인 요동반도에서 해로를 통해 산동 등 중국내지와의 원거리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역을 비롯한 평화적 교섭관계를 유지하던 고조선과 중원제국과의 관계는 동북아에 철기문화가 확산되는 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첨예한 대립관계로 전환되었다. <<위략>>에 의하면 “연이 칭왕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고 예를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왕실을 받들기 위해 연을 치려고 했다는 것은 화이관에 의한 후대의 사료적 윤색이라 할 것이지만, 여기에서 고조선이 전국 7웅의 하나인 연과 각축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왕실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러한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의 강역범위가 어느 정도 들어나게 되며 고조선의 대외 교섭도 보다 활발히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과 대립하고 있던 연의 동방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연의 전성기인 소왕때(B.C. 311~279)이다. <<사기>> <조선전>에는 “연나라의 전성기에 처음으로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장새(長城과 要塞)를 쌓았다.” <<사기>> 권115, <조선전> 제55 “自是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障塞.”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관련된 <<사기>>와 <<위략>>의 고조선 관계기사를 종합해보면, 연은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동쪽으로 동호와 조선을 치고 2천리의 땅을 개척하여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5군을 설치하였으며, 조선과는 滿番汗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사기>>와 <<위략>>의 기록이 서로 달라 논란을 불러 왔으나, <<염철론>>의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천리 바깥으로 물러나게 하였으며,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라는 기록이 이러한 의문을 해결해 준다. 즉, 고조선이 연에게 상실한 영토는  연이 동호로부터 획득한 땅 일천리를 제외한 지역이며, 당시 동호와 조선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대체로 연이 개척한 오군중 요서와 요동 이군에 해당되는 지역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고조선은 연에게 패하여 천산에 이르는 서쪽 땅 1천리를 상실하였으나,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유일한 자연계선인 천산산맥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사기>> <조선전>의 연이 복속시켰다는 조선은 고조선 전체가 아니라 고조선 영토의 일부임을 알 수 있으며, 이로부터 거꾸로 추정하면 B.C. 3세기 이전 고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 대릉하 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고조선은 대동강유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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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에게 패하며 서쪽으로 영토를 상실한 고조선의 영토(역사스폐셜)

 

 

4. 쇠퇴기 - 고조선왕국 시기


 대동강유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던 고조선은 연을 멸하고 요동에 진출한 진의 통일세력과 마주치게 되었다. 진이 요동에 진출한 것은 연의 수도 계를 공략한 4년 뒤인 B.C. 222년의 일인 데,<<염철론>>의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동쪽으로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하였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진은 BC. 222년 같은 해에 연의 요동과 고조선을 동시에 친 것이 아니라, B.C.221년 제를 멸하여 천하를 완전히 통일한 뒤 이미 점령한 연의 요동에서 국경선인 패수를 넘어 고조선을 친 것이다. 진이 건넜던 패수(沛水)는 <위략>의 만번한과 같은 성격의 연과 조선의 국경을 이루었던 자연계선을 의미하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분명하다.
  ‘진이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하였다’고 한 <<염철론>>의 기사는 물론 과장이라고 할 것이지만, 진의 요동진출이 고조선에 큰 위협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위략>>에 의하면 당시 고조선의 부왕은 진의 습격을 두려워 하여 복속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중원의 통일제국 진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내 조회에 응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고조선의 국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도 이러한 고조선에 대하여 더 이상의 침략을 포기하고 고조선으로부터 새로 빼앗은 땅에 <<사기>>의 표현대로 이중의 요새를 쌓아 고조선의 반격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평양에서 출토된 진과(秦戈)도 진의 일방적인 침략의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이와같은 당시 고조선과 진의 치열한 항쟁의 소산물로 보인다.
  다만, 고조선은 이러한 과정에서 연과의 경계선인 만번한 즉, 패수선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고조선이 진에게 상실한 영역은 대체로 만번한, 즉 천산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땅으로 보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진의 요동진출에 따라 고조선은 연과의 경계였던 만번한 이동의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 압록강선으로 후퇴하여 진에 대한 유화 외교정책을 구사했으나, 진한의 교체와 흉노의 등장에 따른 대륙정세를 이용하여 요동의 고토 일부를 수복하고 다시 대한 강경외교책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사기>>에는 “한이 건국하여서는 그 곳(진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고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 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漢 후국)에 소속시켰다.”라고 하여 한초에 진대에 점령하였던 고조선 지역이 거리가 멀어 연(전국시대)이 설치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패수에 이르는 지역만을 연 후국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문면 그대로 거리가 멀어 후퇴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의해 진대에 건설하였던 요동외요가 함락되었던 사실을 감추기 위한 중국적 표현에 불과하다.
 <<염철론>>의 “조선이 요( 秦의 요동외요)를 유린하고 연의 동쪽땅을 강취하였다.”는 기록에서 고조선이 진한 교체기인 B.C. 208~202년 사이에 패수 동쪽에 진이 새로 설치한 국경요새인 요동외요를 유린하고 진에게 상실했던 패수이동의 땅 즉, 연(한 후국)의 동쪽 지역을 탈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흉노의 공세를 막기에 급급하였던 건국초의 한으로서는 자연계선인 패수에 의지하여 옛(전국시대) 연의 영토를 지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 고조선은 패수를 경계로 한과 첨예한 대립관계로 들어가게 된다.
 패수(沛水)가 만번한에 인접한 요동지역의 강이고 조선이 진의 요동외요를 공략한 뒤 후퇴한 한제국과 浿水를 경계로 하였으므로 문제의 패수(浿水) 또한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 없는 데, 만번한이나 진의 요동외요의 위치로 보아 패수는 이에 인접한  소요수와 태자하가 만나는 소요수 본류 즉, 오늘날의 혼하(渾河) 하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한과 고조선은 연과 고조선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이 위치하였던 천산산맥과 병행하여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자연계선인 패수(소요수=혼하)를 경계로 한은 연이 설치한 요동고새에서 고조선은 진이 개척한 요동외요를 거점으로 서로 마주하며 팽팽한 대립관계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첨부 이미지

진나라의 침입으로 요동을 상실했으나 진한교체기에 다시 요동을 수복한 고조선 말기의 영토(역사스폐셜)


  이와같이 패수동쪽의 고토 일부를 수복함으로써 한제국과 대립하던 시기의 고조선사회에는 연,제,조로부터 유이민이 격증하여 동북아 국제정세의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요동지역의 정세변화를 틈타 전국말기부터 연의 고지에서 성장한 위만이 우세한 군사력으로 고조선을 병합함으로써 한국 고대사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단국대 서영수 교수의 논문 <고조선의 대외관계와 강역의 변동><<동양학 제29집(1999년 6월)>> 요약.

‘건국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의 구분은 요약하면서 편의상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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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 속좁은놈인가요?댓글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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