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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가 우울했던 성인이 자라서 쓰는 일기

글쓴이 |2021.02.09 09:38
조회 16,291 |추천 113
음...지금 일해야하는데, 갑자기 날아온 전화에, 눈물이 멈추지 않아 일이 손에 안잡힌다. 뭐라도 감정을 토해내어 진정해보려고, 메모장을 켜 두서없이 긴 글을 적어본다. 부디 이 글을 다 쓸때즈음이면 눈물이 멈춰있길… 지금 생각해보면 막장드라마 속 클리셰 모음 같았던 유년기였다. 불치병에 걸린 동생들, 우울증에 빠져 자식들을 외면하는 엄마, 현대의학에 방법이 없자 대체의학에 시간과 재산을 쏟아부은 아빠, 그 잘못된 대체의학때문에 죽은 둘째동생. 그 수많은 우울함 사이에 방치되어 영양실조에 걸렸던 나. 부모님 모르게 뒤에와서 자기 딸과 날 비교하며 날 깎아내리고 우월감에 젖어있던 인간 이하의 친척들(작은아버지). 남의 가정사도 모르면서 집이 이럴수록 니가 효도해야지라며 개소리를 지껄이는 주변 아줌마들. 그나마 드라마랑 다른건 우리집이 가난하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가진게 있어 사기도 당했고 부계쪽 친척들이 돈도 뜯어갔다. 그 어린나이에 알고싶지 않은 사실들이 참 많았다. 그돈으로 유학갔으면 좋았을텐데...덕분에 핏줄을 경멸하는 시선이 일찍 형성됐다.

신기하게도 나는 가정의 결핍이 티나지 않는 유형이었다. 속은 곪아 터져있을지언정, 겉은 멀쩡한 타입이었다. 다행스럽게 외모도 괜찮은 축에 속했다. 전날 펑펑 울다가도 학교에서 낄낄대며 웃을수 있는, 비극과 일상을 아주 잘 분리할 줄 아는 타입이었다. 나의 비극이 부끄러웠기에 그걸 감추려고 최선을 다했다. 내면에는 삐뚤어진 감정들이 가득했지만. 밖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유지했다. 일상이 막장드라마인걸 자랑할 수 없으니, 거짓말로 평범한척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인지 난 거짓말에 매우 능숙했다. 그렇게 나의 우울을 잘 숨겨내자, 나는 철없는, 잘웃는, 유쾌한 **(이름)라는 어이없는 평가를 들으며 살았다. 그러나 하교 후는 달랐다. 우리집은 모두가 슬픔에 잠겨있었다. 대체 의학중에(이걸 의학이라 할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건 일종의 사이비 의식이다) "뜸"이란 것이 있다. 사람의 생 살위에 직경 5cm의 쑥가루를 올려놓고 그대로 태우는 방법이다. 안전장치는 없다. 쑥가루와 생살이 함께 불타들어간다. 사실상 불로 사람 생살을 지지는 고문이다. 재가 꺼질때까지. 그 사이비같은 인간들이 이러면 막힌 혈이 뚫리면서 내 동생이 낫는다고 했다. 동생을 낫게 하려고 부모님은 그 어린 아이의 몸 이곳저곳을 매일 불로 지져댔다. 집에는 초등학생 아이들의 차라리 죽여달라는 울부짖음이 가득했다. 울다못해 종국에는 지쳐서 말도 못하고 꺽꺽대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동생들은 매일같이 비상식적인 아픔에 울부짖었다. 그들의 살을 태우는 끔찍한 냄새가 집에 가득했다. 난 방에 혼자 쳐박혀서 모른척했다. 그 일과 나를 분리해야 제정신으로 살수 있을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 그 대체의학 전파자들을 언젠가 내 손으로 죽이고 말리라 다짐했다. 그들이 지옥에서 내 동생들과 똑같은 고통을 맛보기를 바랬다. 치료라는 이름의 모진 고문을 못이기고 동생 한 명은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는 눈이 참 예쁘고 선이 고운 아이였다. 나도 나름 예뻤지만, 동생은 아프지만 않았으면 정말 인기가 많았을 정도로 잘생긴 아이였다. 하지만 나도 살아남기 바쁜 어린 아이였다. 그 아이한테 참 나도 못되게 굴었다. 잘해준 기억이 없다. 그저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동생이 죽은 그때만큼은 나는 동생을 죽인 내 부모를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의도가 애를 고문하려던 것이 아니라서... 재미있는 사실은, 이 무식한 결정을 한 나의 부모가 서울소재의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상황들과 우울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나는 외딴 섬처럼 방치되어 혼자 자랐다. 그 누구도 나를 챙길 여유 따윈 없었다. 누가 키웠다기보다는 그저 잡초처럼......태어났기 때문에 자랐다. 170에 47kg, 마른게 아니라 영양실조였다. 먹은게 없어 쓰러지기도 하고, 아프기도 자주 아팠다. 아파서 병원에 가야한다고 말하면 부모님은 날 경멸하는 눈초리로, 혹은 돈이 아깝다는 눈초리로, 혹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 거짓말하는건 아니냐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아이로 여겨질만큼 큰 잘못한 적은 없었는데...아플때마다 눈치가 보였다. 병원에 한번 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돈때문에 싫은소리하는게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날 돈이나 축내는 식충이처럼 보며 경멸하는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서....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학대였다. 방치라는 이름의 학대. 나는 초등학교 이후 엄마라는 사람과 같이 걸어본 적도 없다. 그녀는 목적지가 같아도 항상 어른의 걸음으로 혼자 앞서 걸었다. 특히 내가 아프다고 병원에 가야한다고 하면, 계산을 하고 기분이 나빠졌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집에 갔다. 병원에 같이 가준 이유는 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신용카드를 나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거나, 병원비 외의 돈을 한푼이라도 더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난 병원에서 나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아픈와중에도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빠르게 걸어갔다..그 뒷모습이 참 매정해서,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섭고 외로웠다.


추운 겨울, 엄마는 짐덩이 같은 자식들을 버리고 탁구를 치러 간다. 당연히 집열쇠도 주지 않는다. 하교후 날이 추워 집안에 들어가고 싶어도, 엄마는 탁구를 치러갔기 때문에 집문은 항상 잠겨있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부재중통화가 쌓이면 못이기는척 받을때도 있다. "엄마 나 집앞인데…" 되돌아오는말은 이랬다 "나 탁구치느라 바빠. 어쩌라는거니?" 나는 그렇게 집밖에서 얇은 교복을 입은채 한시간을 오들오들 떨곤했다. 그러면 엄마라는 사람은 탁구를 다 치고 개운한 얼굴로, 혹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나를 못마땅하단 듯이 쳐다보곤 자기방에 들어가 전화를 한다. 남욕, 내욕, 시부모욕....모든 사람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푼다. 자식들은 그녀의 짐덩어리였다. 내가 성인이되고 처음으로 독립해서 들어간 작은 오피스텔, 거기엔 비밀번호로 열리는 도어락 시스템이 있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그 도어락 앞에 한참을… 한참을 오도카니 서있었다. 문밖에서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는것이 이렇게 쉬운거였나…참 허탈했다. 지금도 난 그 기억들때문에 겨울이 미치도록 싫다. 그래서 난 30넘은 지금도, 난 엄마라는 사람을 증오한다. 그래도 그 오피스텔을 구매하는데 1억을 엄마가 보태줬다. 내 삶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움이 된 행동이었다.

아빠는 그래도 내가 돈을 벌수 없는 미성년자일때 양육비를 제공했다. 그런데 엄마라는 사람은? 난 그 사람이 미성년자인 나에게 저지른 일들을 나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똑똑히 기억한다. 그리고 가증스럽게 카톡메세지창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말을 써놓는 그녀의 이중성을 증오한다. 그녀는 30이 넘은 지금도 자기 딸의 식성을 모른다. 가끔 선심쓰듯이 김치가져갈래? 라는 말을 한다. 난....김치를 먹지 않는다. 30년동안 김치를 돈주고 사본게 다섯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런데 그녀는 30년째 딸의 식성에 관심이 없다. 그저 그녀는 '김치를 베풀어 준다'라는 자신의 행동에 취해있다. 역겨울 뿐이다.   유튜브가 없던 시절, 중고딩이 어른의 도움없이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요리는 오직 라면뿐이었다. 그래서 몇년간 라면만 먹다보니 냄새조차 질려서 라면에 토한 적도 있다. 부모님의 용돈? 기분 좋을때 어쩌다 주는 돈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도 친구들과 하교하며 김가네라는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싶었다. 학생때 거길 가본 적이 열번도 안된다. 이유는 뻔하다. 돈이 없어서... 나는 항상 친구들이 거길 간다고 하면 숙제를 해야한다고 혼자 집에 왔다. 친구들이 점점 어딜가자고 하는 횟수가 줄었다. 왕따를 당했다. 엄마란 사람은 도와주진 못할망정, 내가 왕따당했다는 사실이 좋은 가쉽이라 생각했는지 지인들에게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재미있어 보였다. 나는 왕따당한 사실보다 그것이 더 큰 상처였다. 부끄럽고 숨기고싶은 일을 재밌고 가볍게 수다떠는 용도로 소비한다는 것이…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반면 그들은 동생들의 치료에는 돈과 관심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왜인지 몰라도 나는 미워하고 또 미워했다. 미성년자일때 부모란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 혹은 아픈건 괜찮아? 라는 걱정은 경험해본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 정도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나에게 어느순간 관심조차 없어졌기에 그저 라면이라도 사다 놓은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냉장고에는 언제 했는지도 모를 상한 음식이 가득했다. 음식을 하며 간도 보지 않아 소금덩어리를 먹고 뱉은적도 있다. 아빠는 번듯한 직장인이라, 밖에서 사먹고 들어왔다. 엄마가 어떤지 몰랐던 걸까, 관심이 없었던 걸까. 나는 결국 하루 딱 한끼, 학교 급식만 먹게 되었다, 의도치않게 몸이 빼빼 말라갔다. 밥을 잘 먹지 못해 자주 아팠다. 내가 아프면 엄마는 그 이유를 니가 항상 컴퓨터만 해서 그렇다고 했다. 아파서 병원에 가고싶다 할때마다 그녀는 내가 진짜 아픈지, 꾀병은 아닌지, 나를 돈벌레나 식충이, 거짓말쟁이처럼 경멸하는 눈초리와 말투로 다그쳐댔다. 아프면 집에 있는 죽염(소금)을 먹으면 나을거라고 소금이나 먹으라고 했다. 조르고 졸라 병원을 가면, 항상 나를 못마땅해했다, 살면서 단 한마디, 아픈건 괜찮니? 몸은 괜찮니라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다. 그런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사치다. 내 인생 평생을 걸쳐서 그래왔다.

그래서 난 중학교때부터, 내가 나중에 커서, 돈을 벌고,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 돈이 없어지고 몸이 아플때면 똑같이 되갚아주리라고 중고등학교 내내, 아플때마다 방에서 울며 다짐했다. 당신들이 아픈 이유는 집에서 TV만 보기 때문이고, 나 또한 병원비 한푼 주지 않을 것이며. 대체의학서에 쓰인 그 죽일놈의 죽염을 먹으면 아픈것이 나을 것이라고 그들과 똑같이 말해주리라 다짐했다. 나에게 한 짓을 그대로 갚아줄 날만 기다리며, 돈을 아까워하는 부모님의 지갑에서 몰래 돈을 훔치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버텼다. 


고등학생때 실제로 죽으려고 18층이었던 우리집 아파트 난간에 다리를 밖으로 향한채 걸터앉은뒤 한시간 정도 있었다. 살짝만 힘주면 바로 떨어질 수 있는 죽기 쉬운 자세와 장소. 바람이 선선했고...기분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눈물도 안나고...아마도 지금 시대에 그런 장면을 누군가가 목격한다면 유튜브 감이었을텐데. 가족 아무도 그 위험한 상황에서 나를 말리진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를 감정적으로 흔들어서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것도 같다. 아마 그때 내가 떨어졌으면 엄마 아빠도 동생들을 안고 따라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영양실조로 쓰러졌을때는 고3때였다. 엄청 말랐었다. 좋은 점은 무슨 옷을 입어도 예쁘게 잘맞았다. 그때는 그냥 긍정적.. 긍정적으로 보자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 밖에 답이 없었으므로. 대학생 때에는 철없는 외동딸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해가 간다. 나에게 가족간의 커뮤니케이션이나 어른의 지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치되고 버려진 미성년자 아이는 갖고싶은게 있으면 죽을 힘을 다해 악을 쓰며 쟁취해야 가질 수 있었고. 그렇게 발악하며 자랐다. 예의범절은 개나 주라지. 부모에게 사람 사이의 관계나 예절에 대해 배우지 못했기에 인간관계에도 서툴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을 포옹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그런 걸 받아본 적이 없었으므로...그저 티비와 책, 인터넷으로 세상을 배웠을 뿐이다. 나쁜길로 빠지거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매체에 나오는 사람들을 교훈삼아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누군가가 나를 부잣집 딸이라고 말했을 때 속으로 많이 웃었다. 뭐라는 거지,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진짜 하나도 모르는구나, 너 그거아니? 나 돈이 없어서 과제준비도 못해갔어. 지금도 떡볶이를 많이 좋아해. 돈이 없어서 학생때 많이 못먹었거든. 대학생때 너희들이 밥먹듯이 마시던 아메리카노는 비싸서 못먹었어. 내가 쓴걸 싫어해서가 아니야. 그리고 나...사실 대학교때 차석이었는데 장학금 포기했었어. 당장 과제에 쓸 재료비가 모자라 현금이 필요했는데, 성적장학금은 현금지급이 아니라, 등록금고지서의 숫자를 차감해주는 방식이더라. 과제에 쓸 종이 한장이 2만원이었는데, 당장 수중에 차비밖에 없어서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역시나 날 경멸하더라. 너는 돈필요할때만 연락하냐며. 그럼 그 어린 내가... 어떨때 도움이 필요하다고 연락해야 괜찮았을까...? 아플때도 경멸당하고 돈필요할때도 경멸당하는 어린아이는, 도대체 언제 엄마를 찾아도 되는걸까? 당장 돈이 필요했던 난 내 성적 아래쪽에 있는 동기의 부모에게 연락했다. 내가 성적장학금을 포기하면 당신의 아이는 성적장학금 수여자라는 우수한 기록이 남을 것이다. 그것을 장학금의 반액에 해당하는 현금으로 바꾸자. 그 거래는 성공적이었고 잠시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한 두학기 쓰면 없어지는 돈이었고...나는 결국 술집에서 알바를 했다. 룸싸롱이나 텐프로같은 곳은 너무 무서워서, 시급이 그나마 괜찮은 위스키바의 바텐더를 했다. 온갖 아저씨들의 눈치와....갖은 성희롱과 얼굴평가... 나를 어떻게 해보려는 그 말들과...가끔은 동정과 조언등을 받으며 돈을 벌었다. 그렇게 돈을 벌어도, 미대는 재료비가 정말 많이 들었다. 중고등학교랑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같은과 동기들이 학교 근처에서 파는 닭도리탕을 먹으러가자고 했을때, 나는 속이 안좋다고 거절하고, 누가 볼까 혼자 화장실에 숨어서, 1500원짜리 이삭토스트를 먹곤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나름 깨끗한 화장실을 찾았던 그 기억이... 그렇게 아낀 식비로 깨끗하고 예쁜 옷을 입고 다녔다. 교복이 없으니 친구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딸이 라면과 이삭토스트를 먹으며 버틸때, 아빠는 골프를 쳤고, 엄마는 제과제빵같은 무의미한 취미생활과 뒤늦은 시험준비에 성공하며 하고싶은걸 하고 지냈다. 그렇게 난 수면밑에서는 억지로 악을 쓰며 살아갔지만, 수면위에서는 고생안한 중산층 막내딸같은 모습을 연출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내 일부가 되었다.


돈이야기만 하면 지긋지긋해 하는 엄마 모습이 나도 지긋지긋했다. 큰돈도 아니고 해봤자 만원 이만원...오만원... 아빠도 똑같았다. 학교생활에 필요한 생활비나 재료비를 주기로 했지만, 줘야한다는 사실을 나몰라라하는 날도 많았다. 그 사람은 날 항상 모자란사람 취급하고 날 못마땅해했다. 나에게 화나는 일이 많았고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 잦았다.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기도 했다. 그는 기억이나 할까? 그게 훈육었는지 스트레스 해소인지. 성인이 된 지금, 나는 누구보다 잘안다. 사랑없는 폭력은 그냥 폭력이다. 얻어맞고 숨이 안쉬어져 응급실에 갔고 의사들이 웅성댔지만 부모라는 이름으로, 본인들의 폭력은 다 철없는 내잘못으로 인한게 되었고 아무것도 아닌게 되었다. 아버지, 아니 그는 그 사실을 기억이나 할까…?
나는 사무치게 기억한다. 주먹으로 날 때리던 눈빛, 구타하던 그 힘, 마음껏 날 차던 사나운 어른의 발길질.
옆에서 엄마는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맞는 날 보며 고소해했다. 울어도 아무도 위로해거나 안아주지 않는다. 사랑한다거나 미안하다는 말도 들어본적 없다. 엄마라는 사람은 그저 내눈엔 자기의 불행에 스스로 취한 나르시스트거나 미친 사람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 그는 나에게 보너스 같은 개념이었다. 학비는 그의 회사에서 복지차원에서 지급해주는 시스템이 있어서 다행히 밀린적은 없다. 하지만 만약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면? 그는 날 대학에 안보냈을거다. 이유는? 당연히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 나는 그놈의 돈때문에, 부족한 생활비와 재료비를 벌기위해 알바도 하고 상금을 받기위해 공모전에도 도전했다. 그리고 웃기게도, 전국대회에서 금상을 탔다. 내가 미술에 재능이 있긴 했다. 하늘은 날 완전히 버리진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악을 쓰며 아둥바둥 열심히 자랐다. 

중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었을때, 다 자란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회사원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은 학생일 뿐이다. 식물이 빠르게 자랄 때엔, 줄기가 꺾이지 말라고 지지대를 대주는데, 내 성장기엔 그 지지대 역할을 할 어른의 보호나 사랑같은 것이 없었다. 기댈곳 없이 혼자 자란 나같은 아이들은 어딘가 휘거나, 부러지거나 기형적으로 성장한 채 겨울을 맞게 된다. 나는 그렇게 기형적으로, 무럭무럭 잘 자랐다. 많은 결핍이 있지만 그걸 채우려는 욕망도 컸다. 대기업에 다녔고, 비교적 어릴때 대학 교수직도 역임했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좋은 프로젝트들을 담당했으며 지금도 아둥바둥 열심히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건지, 내 직업을 좋아하는 건지, 나의 외모를 좋아하는건지 헷갈릴 때도 많지만 그냥 그러려니 한다. 가끔 다 때려치고 싶을때에는 혼자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나의 직업, 나의 우울, 나의 집안, 나의 단점을 말하지 않아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특히 20대 후반엔 집 밖을 나와 혼자 살면서, 나는 더 행복해지고 더 즐거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예전의 우울과 슬픔들을 잊게 되었다. 지난 10년간 우울함보다는 즐거움 쪽에 마음을 더 열었다. 청소년기를 거의 잊었기에 모든 걸 극복한 줄 알았고, 나조차 내가 그렇게 우울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30대가 되자 남자친구들에게서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내 가족의 불치병이 유전병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결혼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나의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사를 그대로 보여주는것이 무서웠다. 더 무서운건 내 부모란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나한테 한 짓을 내가 내 자식에게 답습할까봐 무서웠다. 난 좋은 부모가 될 자격이 있을까..? 매번 결혼이야기가 나오면 막연히 무서워서 헤어졌다. 결혼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으나 항상 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해 너랑 나는 성격이 안맞는다며 헤어지자고 하게 되었다. 그런 일만 아니면 난 어두운 과거를 잊고 사는, 마냥 좋은 시절을 보냈다. 유년기때처럼 주변사람들에게 이유없이 미움받지 않고, 사랑받기 위해 나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가족애나 사랑을 포기하고 적당히 사는 여유가 좋았다. 비참함이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난 화목한 집안에서 사랑받고 지낸 애들이 좋아. 그래서 니가 내 이상형이야. 알지?" 나에게 이런 일방적이고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남자들의 말을 웃어 넘길정도로 그냥저냥 잘 자랐다. 

그러나 마치 오래된 교통사고 후유증처럼. 비올때마다 욱신거리는 상처들처럼. 과거의 기억들이 잠시 묻혀있다 갑작스레 떠오르는 날이 있다. 그리고 방금은 그 상처를 헤집는 순간이었다. 나이 지긋하신 외삼촌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진행중인 프로젝트 담당자인줄 알고 받았다. 만난지 20년도 더 된 외숙부였다. 어색하고 평범한 안부인사를 이어가던 중. 갑자기....이런말을 했다. "그...예전에...너....어렸을적에...외롭고 많이 힘들었지...미안해..." '뭐지..? 갑자기 이런말을 하는 이유가...? 많은 의문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우는걸 들키는게 싫어서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업무용 톤을 만들었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전 괜찮았는데요. 언제 한번 식사라도 함께 하세요. 네네. 아니에요 언제든 연락주세요”  떨리는 손으로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왈칵 눈물이 났다. 그들은 그걸 알았으면서...그걸 아는 어른들은... 왜 아무것도 안하고 나를 방치했던걸까. 이제와서 다 무슨 소용이냐는 짜증과, 고해성사는 필요없다는 증오가 교차됐다. 지금은 2021년이고 난 30이 넘었는데 내 마음을 나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 무가치한 고해성사가 본인에게는 시원했을지언정, 나에겐 어두운 우울한 과거의 편린을 헤집는 트리거가 되었을 뿐이었다. 필요할땐 없다가 이제와서 선심쓰듯 연락하면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건가? 내가 애써 잊은 불편하고 슬픈 옛날이 원하지않는 방식으로 폭력적으로 떠올려질 뿐이다. 애초에 난 핏줄의 도움없이 잡초처럼 씩씩하게 잘자랐는데...그랬는데.....자꾸 눈물이 난다. 본인 마음 편하자고 나를 괴롭히지 말았으면…이런 걸로 동정받는게 싫어서 어디 전화하기도 싫고,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인터넷을 켰다. 그냥 혼란스러워서 무슨말이든 쏟아내고 싶었다. 이것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인 인터넷 속 하소연이다.

그냥 나는 나를 고아라고 생각한다. 기대가 없으니 상처도 없다. 날 지지해주고 응원해줄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없다는 건 가끔은 슬프지만 괜찮다. 그들이 주는 슬픔보다 이게 낫다. 난 이겨낼것이다. 세상엔 각자가 감당할 어려움이 너무 많기에, 각자의 일은 각자가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가끔 마음이 약해지는 날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20대때는 몇몇 사람들에게 스치듯 작은 일부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놀라기도 하고, 슬퍼해주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큰 관심이 없었다, 더 최악인 건 나의 슬픔과 우울한 기억을, 쟤가 그렇대-저렇대- 라며 술자리의 엔터테인적인 요소로 저렴하게 소비했던 사람들은 항상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더욱더 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슬픔과 힘듦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특히 타인의 질투를 많이 받는 편이다. 성격이 삐뚤어져 대인관계가 넓지 못하고, 어설프게 착하고, 어설프게 예쁘고 어설프게 사회적 위치가 존재한다. 어설프게 돈을 잘벌고, 나의 가족사를 숨기기기 위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다보니, 사람이 진실되지 못하다. 그 때문인지 나를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은 나의 비극을 기뻐하고 재밌어했다. 그들을 보며 ...나는 그냥...나는 인간의 습성은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원망하기보다는 내 마음을 닫고 더 조심하기로 했다. 그렇게 내 우울을 내 속에 가두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랑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같이 교통사고 후유증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아픔은 혼자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나같은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가 없었으면 좋겠다.이게 얼마나 슬픈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이 우울을 품은 채 삐뚤어져 어설픈 대인관계 스킬로 연명하며 상처입는 아이가 없었으면 좋겠다. 혹시 이미 그렇다면, 죽지못해 살고 있는 나의 과거같은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조금만 버텨서, 좋은 어른이 되면 너도 행복해질수 있다. 과거에 불행했던 만큼 미래에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치고, 노력해서 그 불행을 빠르게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증명했으니 너도 잘살 수 있다. 그래. 아주 잘 살진 않더라도 적어도 그런 걸로 보이게 할 수 있고. 웃음도 더 많아질거다. 그 수준까지는 가보자. 그리고 우리들의 자식에게는 이런 고통과 우울을 안겨주진 말자. 좋은 부모가 되자. 그래서 이딴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면서도, 금방 잊고, 밖에서는 보란듯이 신나게 웃고 떠들며 즐기는 사람이 되자. 세상의 우울을 겪었으니, 세상의 즐거움을 겪을 차례다. 조금만 버텨보자.  이건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난 지금 뭐라고 하는걸까. 나도 모르겠다. 그냥 혼란스럽고 슬플 뿐이다...이 또한 지나가겠지. --------------------------------------------------------------별 생각없이 토해낸 글에 따뜻하게 반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거지같은 상황을 어찌어찌 이겨내려고 본인만의 방법을 찾아낸 분들의 댓글이.....대견하면서도...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여러분이 남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다들 잘 자라주셨어요.  저보다 연배가 높거나 비슷하신 분들의 댓글은 제 일처럼 느껴져서 조금 울기도 했고, 어린 분들은 앞으로 취직 전까지 얼마나 더 힘들까 싶어서 안쓰럽기도 하고 어린날의 저를 보는것 같아서 속이 좀 상했습니다. 애정결핍...대인관계... 이 말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 결핍의 에너지를 삶의 원동력으로 쓰신 모든 분들께...너무 장하고 고생하셨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최근에도 또 결혼을 결심했지만, 그 사람 또한 상당한 결핍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의 정서적 결핍이 저를 너무 외롭고 힘들게 해서, 이대로 결혼하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파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이 힘들어서.... 세상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습니다. 그냥 예쁘고 좋을때 이 세상을 떠나는게 맞지....라는 생각에 인터넷에서 번개탄을 샀는데 이틀만에 오더라구요. 그게 오고,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때 가더라도 깔끔한 모습으로 가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딱 두 명,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전화해서 작별인사를 하려다가...그냥 눈물이 나서 펑펑 울다가 솔직하게 말해버렸습니다. 그 친구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절 많이 다독여줬어요. 그 친구들 덕분에 이겨내고 다시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도 옷장 한쪽에 번개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은 버렸어요.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지만, 그냥 순간순간을 즐겁게 살려 노력합니다. 바쁘게 살면 또 잊혀지겠죠. 힘들고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을 수 있겠죠. 모두가 그러길 간절히 바랍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제 인스타그램을 보며, 제가 부럽대요. 제가 멋있고, 저처럼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냥 허허 웃고 맙니다. 사람에겐 다들 각자의 아픔이 있어요. 각자의 즐거움도 있구요. 앞으로도 저의 이 아픔을 잘 묻어서, 즐거움만 기억에 남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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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플나에게|2021.02.12 16:08
자신을 너무 포장하지도, 애써 밝은 척 하지 않아도 되는, 그대로의 나를 만져주는 사람들 많이 만나시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어두운 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 만나서 영혼의 위로 많이 받으시길 바랄게요. 고생 많으셨어요. 저는 글쓴이님 같은 얼룩덜룩 울퉁불퉁한 입체적인 인생 사신 분들 더 선호합니다. 평면은 재미없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가끔 힘이 들고 여전히 오만가지의 어둠이 저를 노리지만.. 저는 남들의 아픔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고 그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눈물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행복하자는 말은 하지말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평안해지고 싶습니다 남들처럼 그들의 절반만큼이라도 평안한 인생 글쓴이님께도 오기를 바랍니다.
베플ㅇㅇ|2021.02.12 15:34
아니무슨... 왠만한 소설책작가보다 글을 더잘쓰네.. 진짜필력쩌는데 유명한작가아니심? 정말 훌륭하게성장하셨네요
베플|2021.02.12 20:09
애석하게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은 생각보다 많고, 한편으로는 이 고통의 시간을 감내한 것이 나만은 아니구나 하는 것이 복잡한 감정을 불러오네요. 평소에는 괜찮고, 잘 살고 있고, 나를 괴롭게 한 그 순간들은 기억 어딘가에 깊이 가라앉아있지만, 한번씩 이렇게 수면 위로 올라오는 날엔 마치 어제 겪은 일인것처럼 다시 나를 할퀴는 그런 나날들이 한번씩 찾아옵니다. 글쓴이는 서른즈음이지만, 나는 마흔이 넘었고, 아마도 십년이 지나도 그런 날들이 찾아오겠지만, 다시금 좋은 기억들로 덮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냥 또 일상을 삽니다. 그러니 지금의 혼란도 또 이겨내고 잘 살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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