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제시 글쓰기였고, 키워드는 <<학원, 첫눈, 붕어빵>> 이었음!!
가을에서 겨울 넘어가는 시점이긴 한데,,, 공간적 배경은 웹툰 '그 해 여름' 같은 느낌....? 학원 배경 같은 거는 그 웹툰이랑 제일 비슷할 듯!!
1. 빛바랜 추억
매년 찾아오는 똑같은 겨울임에도 눈이 내리는 순간마다 깊은 상념에 빠지기를 반복한다. 사실 상념이랄 것도 없이, 시간에 빛바래 산화된 추억일 뿐이었지만.
많고 많은 추억들 중에서 기억을 돌이켜볼 때마다 덜컹, 하고 멈추는 부분이 이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찾아오는 숨막히는 젖은 공허함, 적막함, 약간의 슬픔의 출처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그 찰나의 추억에는 내 그리운 누군가가 머물곤 하는데, 얼굴조차 흐릿하게 번져 가물가물한 형태만 보임에도 그 사람이 느끼고 있는 지독한 슬픔에 나도 같이 울었던 것 같다. 음, 다시 생각해보면 눈물이 흘러 그 사람의 얼굴이 흐리게 보였을 지도 모른다.
내 좋을대로 미화된 기억을 잠깐 이야기 해주고 싶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를 영영 잊어버리고 말 것이라며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으니, 나의 온전한 것으로만 남게 하고 싶었던 기억의 편린을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때는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지금의 학생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서울의 학원가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녔던 예비 수험생의 나.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갈 무렵, 지금처럼 눈 깜박하면 지나가는 가을이 보다 조금 길었을 당시.
겨울 초까지 나겠다며 바락바락 엄마와 약속하고 새로 산 떡볶이 코트를 입은 채, 새롭게 등록한 학원을 향했다. 크게 이상한 것도 없는 것이, 요맘때 즈음의 학부모는 자녀의 무참히 짓밟힌 모의고사 성적표에 발등에 불떨어져 학원을 주구장창 바꾸곤 했으니까.
사설이 조금 길었으려나? 하지만 내가 앞으로 이야기 할 '그 애'도 나와 비슷한 상황으로 학원으로 모여들었으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 애'는 학원 수업이 개강한 지 한 달이 내도록 학원 수업을 빠졌다. 애가 학원에 나오질 않으니 접점이 있을 수가 없었다. 다만 빈 옆자리를 볼 때마다, 출석 체크를 할 때 꼬박꼬박 불리는 그 애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디 돈이 똥구멍에서 솟냐며 학원비가 아깝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부모님이 부자인가?' 에서 시작한 궁금증은 사소하게 알게된 그의 작은 정보들을 양분삼아 무한정 자라나더라. 결국 '사정이 있는 친구'에서 '부모님 돈 믿고 수업 빠지는 양아치, 꼴통'로 이미지가 전락한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흐르고 어느날. 나는 유난히 그날따라 극심한 생리통으로 인해 2교시도 마치지 않고 급하게 학원을 벗어났다.
1층의 학원 문 근처에는 수업이 시작한 지도 한참인데다가 수업 끝나기까지 몇 시간이나 남았기에 유난히 '그 애'가 눈에 띄었을 지도 모른다.
또래의 남자애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하얀 볼캡 모자를 쓰고 있던 그 남자애는 사복 차림이었다. 평소였다면 그저 지나쳤을 테지만, 엄청난 생리통에 머리가 맛이라도 간 건지•••
'그 애' 같았다.
그 흔한 교복을 입고 있던 것도 아니고, 명찰이 보이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유령같은 존재였던 내 빈 옆자리의 주인인 '그 애'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래서 그 남자애와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애'의 이름이 튀어나왔고, 짐작컨대 그 남자애에게 들렸던 것 같다. 음, 아마 들렸던 게 분명했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뒤돌은 그 남자애의 표정엔 물음표가 가득했으니까.
나조차도 놀라 잠시 숨쉬는 것을 잊었다. 그렇게 몇 초 동안 시선이 오고갔다.
조금 정정하자면, '그 애'는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들어맞으면서도 틀렸다. 수업에 안 들어가고 마음대로 쨌으니 분명 꼴통은 맞았지만, 가지런히 숱많은 눈썹에 강단 있는 눈매, 무엇보다 나를 꿰뚫어볼 듯한 맑은 눈을 가진 외양은 양아치와 거리가 멀었다.
소위 말하는 엄친아? 전교 회장을 맡을 것 같고, 뭔가 향기도 섬유유연제 냄새만 날 것 같은 그런 사람.
그 애는 나를 아냐는 물음을 던졌고, 당황한 나는 대답대신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면전에 던졌다. 동문서답이 따로 없다는 걸 깨닫자 마자 온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던 건 어린 나로서 당연했다. 그 과정을 멀거니 바라만 보던 '그 애'는 가볍게 웃었다.
미안하다고 계속해서 사과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던 나는 그 웃음을 보고 덜컥 숨이 막혔다.
이유는 별 거 없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와 웃을 때 동그랗게 만들어지는 입동굴이 예뻐서.
나오려던 말이 쏙 들어가고 어버버하며 다시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려던 찰나에, 그 애는 내 코트 소매자락을 약하게 잡아 당겼다.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눈 떠보니 붕어빵 가게 앞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더니, 내 손에는 붕어빵이 봉투 째로 쥐어져 있었고, 또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니 '그 애'가 손을 붕붕 흔들며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한참을 그 애가 사라진 곳만을 바라봤다. 톡, 하며 볼에 내려앉은 차가운 눈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에 홀렸던 건가. 순식간에 지나간 짧은 너와 나의 첫만남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다. 그리고 오늘. 기상청도 예상하지 못한 난데없는 첫눈이 내렸다. 이루어지지 못할 첫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듯, 펑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