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려면 전략가가 되라..
金松子 서울지방노동위원장은 정부수립 후 직업공무원 출신으로는 최초의 여성 1급(차관보급) 공무원이다. 굵직한 여성 제몫찾기 운동의 배후에는 그가 있었다. 25만 여성공무원의 선두주자격인 그의 초임시절은 짓밟힌 자존심과 성차별 속에서 시작됐다. 그가 여성노동정책에 발벗고 나선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이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싸움닭’ 김송자 위원장이 걸어온 길-.
1998년 7월8일 언론은 한 여성공무원의 승진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정부수립 이후 직업공무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여성이 1급(차관보)자리에 올랐다. 정부는 8일 김송자 노동부 근로여성국장을 1급인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했다. 김위원장은 부녀소년과장, 부녀지도관, 산재보험국장 등을 거치면서 여성노동자 권익 향상에 힘을 기울여왔다….’
언론보도대로 김송자 위원장은 여성공무원 중 1급의 벽을 넘은 첫 주인공이다. 건국 이래 수천명이 1급 자리를 거쳐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여전히 ‘남성의 전유물’로 남아 있었다. 이런 자리에 여성이 입성했으니 뉴스거리가 되고도 남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정부내 여성운동가’‘여성공무원의 대모’‘여성노동자 권익 선구자’등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는 “지난 30년의 공직생활을 남성우월주의가 판치는 공직사회에서 투쟁하는 심정으로 일해왔다”며 “우리 사회의 두터운 여성차별의 벽을 허물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고 당시 소감을 밝혔다.
그가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던 지난 69년으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그해 7월1일 당시 국가행정의 총사령탑인 서울 중앙청 앞길. 6급 공무원 김송자의 첫 출근길 발걸음은 누구보다 힘찼다. 국가경영에 한몫을 단단히 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응시한 6급 채용시험에 합격, 총무처 인사국에 발령받은 터였다. 중앙청에 정식직급을 가지고 들어온 여성이 드물었던 시절이었던 만큼 그의 프라이드는 대단했다.
하지만 인사국 인사제도과에서 첫 인사를 마치자마자 그는 ‘있을 수 없는 일’을 겪게 된다. 엄연히 계장(5급) 아래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행정주사(6급)임에도 주사보(7급) 밑의 책상을 비워놓았던 것이다.
그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였다. 경북 칠곡군의 과수원집 7남매 중 맏이로 어려서부터 남녀차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그였다. 고려대 법대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 엘리트 여성을 자부하던 그에게 서열이 분명한 공직사회에서 당한 성차별은 뼈아픈 것이었다. 이때 이를 악다문 그는 한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배울 만큼 배운 나같은 사람도 이렇게 푸대접당하는데 얼마나 많은 취업현장의 여성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을까. 내가 그들을 위해 공직에서 평생을 바치리라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먼저 노동청 근무를 자원했다. 그리고 6개월 뒤 노동청 부녀계에 둥지를 틀면서 여성노동정책 개선에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위원들을 만나요. 말하자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건데, 천상 로비하려니 남자들 흉내를 안내면 안되겠더라구요. 자, 대한민국 유일무이한 여성국장의 술잔 받으십시오, 이러면서 대충 분위기를 띄워놓고 다음날 사무실로 찾아가 본격적인 법안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법 통과 뒤 89년 4월 김영희 소송은 결국 대법원에서 승소하게 된다. 모두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싸움닭’ 김송자가 일구어낸 역작들이었다.
육아휴직제 역시 마찬가지. 육아문제는 이미 결혼해서 남편 유경득(명지대 국제통상대학원장) 교수와 사이에 두 아이를 두고 있었던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다.
“과장 시절 이것을 법률로 만들려고 하니까 내부사람들조차 설득을 못시키겠더라고요. 여자가 결혼하거나 임신하면 퇴직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육아휴직 문제를 놓고 법을 만들겠다고 하니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행동이라는 거죠. 하지만 저는 여성의 모성기능을 국가가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숙련된 인력을 산업현장에서 제대로 활용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어요.”
추진력과 배짱, 돌파력과 치밀한 전략은 그가 가진 업무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남자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30년 공직생활을 하면서 그가 터득한 비법은 무엇일까. 그는 유난히 인간관계를 강조한다.
청와대 정책에 도전했다 좌천, 한직으로
“상하로부터 신임을 얻는 것은 당연하고요, 사람들로부터 재미있다, 같이 일할 만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해야지요. 나는 여자 티를 안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를 편하게 여겨야 내가 편하니까요.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이 성향을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해요. 나는 성은 중성(中性)이요, 성향은 강성(强性)이라고….”
남자 못지않게 털털한 그의 중성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노동청 시절 직원 친목모임에서의 일이다. 막걸리파티 자리에서 그가 “사랑만은 않겠어요”라는 노래를 부르자 청장이 멘트를 달았다.
“김송자씨, 노래 잘하면 과장 시켜주려 했는데 시원치 않아요.”
참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청장님, 다시 부르겠습니다.”
자리에서 딱 일어선 그는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켰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
그가 “회전의자”를 구성지게 뽑기 시작하자 직원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통에 난리가 난 일이 있었다.
그의 강성적 면모는 좀처럼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 탓이다. 그는 ‘거대한 권력’에 도전했다 한동안 좌천의 쓰라림을 맛본 기억이 있다.
6공정부 시절 한때 당시 대통령 영부인 김옥숙씨가 주도하는 영유아보육법 제정작업이 추진됐다. 각 부처에 흩어져 있던 탁아사업을 보사부로 일원화하겠다는 이 법은 민간 탁아소만 늘릴 뿐, 남녀고용평등법상 일하는 여성에게 필요한 직장탁아시설 설치 의무조항의 효력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국가가 해결해야 할 여성의 출산·육아 문제가 분명히 근로조건으로 노동관계법에 명시돼 있는데 이걸 보건행정이라는 이름으로 보사부 업무에 통합해버리면 기업주들이 관심을 가질 리 있겠습니까.”
공정성과 합리성으로 노동문제 심판할 터
신문지상에서도 연일 찬반논란이 이어졌다. 그러던 90년 10월 어느날 청와대에서 김옥숙씨가 주최한 근로자 초청 오찬이 있었다. 김송자 부녀지도관은 주무국장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됐다. 오찬이 끝난 뒤 그는 김옥숙씨와 독대한 자리에서 영유아보육법의 모순을 지적하고 법안 철회를 요청했다. 그리고 며칠 뒤 한 일간지에 여성단체 명의의 법안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다.
“공무원으로서 그런 일에 저항할 경우 신변불이익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요. 그러나 나도 딸을 기르고 있고, 내 딸이 또 딸을 낳아 길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국가경영 참여자로서 옳지 않은 길을 걸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명서에 내 이름은 한 줄도 없어요.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3백만 근로여성의 권익을 위해서도 이 법은 제정되면 안된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것 때문에 제가 성명서의 배후로 찍히게 됐습니다.”
결국 법안은 그해 12월18일 통과됐다. 그리고 그는 ‘괘씸죄’에 걸린 탓인지 국방대학원 연수 명령을 받았다. 1년 뒤 다시 노동부로 복귀한 그는 2급인데도 3급 자리인 노동연수원장 보직을 받았다. 한마디로 좌천이었다. 그뒤에도 그는 국립직업안전소장 등 외곽조직을 맴돌았다.
그를 다시 본부로 불러들인 것은 국회의원 당시 노동위원을 지낼 때부터 그의 능력을 높이 샀던 남재희 노동부장관이었다. 산재보험국장으로 돌아온 투사 김송자 국장은 4년여만인 지난 7월 드디어 1급 자리에 오름으로써 그의 말대로 수많은 여성공무원들에게 희망을 주게 됐다.
그는 요즘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은 노사분쟁 재판관이다. 지난해 노사갈등을 조정하고 판정한 건수는 1천여건. 올해는 IMF 탓에 상반기에만 벌써 1천건이 넘어섰다. 그만큼 실업대란 시대에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제가 법대에 간 이유가 고3 때 학교 게시판에서 여자판사에 대한 기사를 읽은 기억 때문이었어요. 그 여자 판사가 참 멋있게 보였습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노사문제를 재판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소시적 꿈을 대충은 이룬 셈 아니겠습니까.”
그가 처음 위원장에 임명됐을 때 사람들 사이에 IMF 이후 부당노동행위가 심해지는 현실에서 여자가 맡기에 힘든 직책이 아니냐는 말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자리야말로 김송자의 자리라고 말했다.
여성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평생 공직에서 뛰겠노라던 30년 전 결심을 꾸준히 실천해온 끈기야말로 이 자리에 필요한 자질이라는 것이다.
“총무처에서 그런 푸대접과 차별을 받은 것이 내게는 약이 됐습니다. 당시 총무처장관 비서관이 남편 친구였습니다. 까짓 자리 하나 못바꿨겠습니까. 하지만 나 한사람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를 바꿔야겠다, 이것이 내가 정말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단구에서 뿜어나오는 카랑카랑한 그의 말투는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는 “여성문제에만 한정하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봉사하는 공직자로서 공정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며 “그간 경험을 살려 근로자의 아픔을 모성애로 감싸고 노동현안을 슬기롭게 풀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몇년전에 읽었던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성공할려면 스스로 전략이 필요하겠죠..
국가도.. 기업도.. 가정도.. 끊이없이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을 알고 대처하는 능력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