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雪化)
“후우...”
“뭐...죠?”
담이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
“?”
“결의 휘파람 소리.”
“예엣?”
담이는 정말 놀랐다.
“사냥할 때 서로 쓰던 암호지. 자신의 위치를 알려서 간격이 너무 벌어지지 않게
하려는. 우릴 찾으러 올라온거야.”
“그런데... 어째서...”
“녀석, 그동안 후계자랍시고 명령만하고 잔뜩 심술궂게 굴었으니 벌을 좀 받아야지.
안그래?”
휘가 장난스럽게 말을 하는가 했더니 갑자기 진지한 어조로 바뀌었다.
“오늘은말야... 그냥... 이대로 있자.”
“...!”
담이는 어찌할바를 몰라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어째서... 네가 이렇게 안타까운지... 네가 다른부족으로 명령을
수행하러 갔을 때 밤마다 네 꿈을 꾸었다. 늘 너는 누군가의 칼에 쓰러졌다. 잠에서 깨도
그 모습이 떠오르고 떠오르고...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널 보낸 나를 원망했다... 이렇게
살아돌아와줘서 고맙구나...”
담이는 휘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절대 죽지 않아요... 아버지의 한을 풀기전엔... 절대로...”
담은 휘의 손이 눈물을 닦아주기 전까지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줄도 몰랐다.
담이는 이내 잠이 들었다.
휘는 담이의 조그마한 어깨를 안고서 뼈가 시린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내 욕심으로 널 갖기에 넌 너무 여리구나... 혈육하나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걸어가는 길이... 복수라니... 네 운명을 막을 힘이 없는
내가... 너를 사랑하면 안되는 건가...’
휘는 순간 전율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랑이라...!
내가 담이를...?
무심코 뱉은 생각이었건만, 깨닫고 만 것이다.
마치...
감정은 있으나 이름이 없어 방황하다 이름을 붙여주자 그것이 바로 진실이 된 듯 했다.
휘는 이제 자신이 좋으나 싫으나 담이의 운명에 엮일것임을 짐작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결도 있었다...
25. 결의 분노
담이는 벌어진 사태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족민의 반은 동원된 듯 거대한 인원이 후계자의 집 앞에 정렬해 있었던 것이다.
휘와 담이가 나타나자 부족민들은 금세 휘 주위로 모여들며 환호했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온걸로 아는 모양이었다.
“아이구 세상에... 다친곳도 없이 그 산을 빠져나오셨군요...!”
“어제 산 윗자락에서 거대한 눈이 두 번이나 무너졌답니다요~”
“정말 하늘이 도우셨어요...”
사실 전혀 위험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움막이 가파른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쏟아져 내린 눈이 많이 비껴내려갔던 것이다.
두 번의 눈이 고스란히 움막을 덮쳤다면 어쩌면 눈 속에 갇혀 질식사 했으리라...
“형(후계자)에게 우리의 도착은 알렸느냐?”
“예- 이미 달려갔습죠~”
“두번째 눈사태가 나기전에 결님이 돌아오셔서 천만 다행이에요~”
“맞아요~ 결님 혼자 너무 깊은곳까지 찾으러 들어가셔서 저희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담이는 죄책감을 느꼈다.
휘가 결의 처소로 들어가고 담이는 밖에 남았다.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잠시 후 휘가 나오고 불안해하는 담이에게 휘는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하여간 속을 알 수가 없는 녀석이야. 어제는 반 미친사람처럼 산을 휘젖고 다녔다던데,
날 보고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으니. 어쨌든 깊이 잠들어서 휘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으니, 너도 그렇다 해라.”
“......”
처소로 돌아오니 아옥이 역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눈이 벌개져 있었다.
“내가 정말 아가씨 때문에 제 명에 못살지... 어쩜 그렇게 사람 간 들어붙는 일만
하셔요!”
“미안해. 하지만 눈사태가 날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잖아.”
“저랑 약속하세요.”
“...뭘?”
“두 번 다시 위험한곳에 가거나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요!”
담이는 잠시 망설였다.
아옥이의 따스한 마음을 배신하게 될것이 뻔함을 알고있기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으응... 그럴께. 약속해.”
“정말 약속하신거죠?”
“그렇대두... 헌데 아옥아...”
“네?”
“너나 나나 처지가 똑같다는건 알고있지?”
“처지가 똑같다니요?”
“난... 우리 부족에서 도망친 노비일 뿐이야. 그런 나를 윗사람으로 모시는건 말이
안되잖아...”
“무슨 말씀이세욧?!”
아옥이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담이의 말을 씩씩하게 되받아쳤다.
“아가씨가 어떤 처지건 제게는 언제까지고 모셔야 할 주인님이라구요! 돌아가신 나으리가
아가씨를 모시라고 하셨으니 전 죽을때까지 아가씨를 모실거에욧!”
담이는 할 말을 잃었다.
어차피 내년이면 담이도 결의 노비가 될 처지이다.
그때가 되면 싫던 좋던 아옥이는 나를 주인으로 섬기지는 못한다.
그래... 조금만 더 이대로 지내자...
고향에서 함께 지내던 것처럼...
집안 전체가 깊은 잠에 빠진 한밤중, 후계자가 들이닥쳤다.
조용히 눈을 피해 온 것이 아니었다.
소리도 요란하게 담이의 방문을 열어 제끼고 들어온 것이다.
가위에 눌려 고통스럽던 담이는 그 소리에 몸이 풀려 일어날 수 있었고, 문 앞에는 달빛을
한 몸에 받고 서 있는 결이 있었다.
그 모습은 기묘했다.
칼날이 번뜩이는듯한 결의 섬칫함은 달빛탓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