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게 지난날을 회고(回顧)해 볼까 합니다
막상 시작하려니 떨리네요
저 같은 사람의 지난시절 이야기가 요즘 젊은 아이들한테
과연 어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확신이 없거든요
그러나 당차고 자기주장강한 여자들만 갈수록 많아지는 요즘같은 세상에
양보와 인내 그리고 헌신과 희생을 미덕으로 알고 살았던
그 시절 여인들의 가치와 인생관도
한번쯤 알려주고 싶어 이야기를 시작해보렵니다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1940년대 초반에 태어났습니다
6.25가 터지기 1년전쯤 이미 국민 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죠
그러나 요즘 젊은 친구들도 그런 이야긴 다들 들어보셨을거에요
솔직히 그 시절엔 사내아이라면 모를까 굳이 여자아이들을
중학교,고등학교 또는 그 이상의 상급학교에까지 보낼만한 집안은
어느정도 사는집안 아니면 잘 없던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저희집은 막내딸인 저를 제때 학교에 보내주었던걸보면
그렇게 없이살던 집안은 아니었나봅니다
사실 제 위로 오라버니 두분이 더 계셨는데
안타깝게도 40년대 후반에 제가 살던 지역에
역병(지금의 전염병)이 돌아 안타깝게도 저희 부모님과 오라버니 두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고
큰집에서 큰아버지 내외랑 함께 사시던 할머니께서
절 거둬주셨어요
할머니도 그때 작은아들 내외는 물론 손자 둘까지 잃은 상태에서
망연자실하실때인데
그래도 어린 믹내 손녀딸 앞날이 걱정되었는지
읍내에 제법 유명하다는 점쟁이한테
제 사주를 좀 봐달라며 데려가셨답니다
어릴때지만 기억에 그 점쟁이 할아버지는
무슨 만화같은데 보는 도사님마냥 수염이 덮수룩하게 난 그런분이었는데
제 사주와 손금,관상까지 다 보고는
무척이나 놀란눈으로 저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제게 큰절을 하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 절 받으시옵소서 !!! 대왕대비마마 !!! ”
요즘 젊은 아이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땐 어쨌든 정부수립이 되었던 시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통령이란게 뭐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던이가 많던
그런 시절이었고 좀 안다는 사람들도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왕’ 대충 그 정도로만 생각하던 그런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분명 왕조시절은 아닌데
멀쩡히 정부도 수립되고 대통령도 생긴 나라에서
일곱 살밖에 안된 저한테 큰절을 올리며
‘대왕대비마마 절 받으시옵소서 !!!’라니...
사실 어린 전 그런 수염 덮수룩한 할아버지가 무작정 제게 큰절을 하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게 너무 무서웠지만
저희 할머니는 더더욱 기겁하시면서
‘이 사람이...점봐달랬더니만 어린애한테 무슨 당치않은 소릴 하는게야 ?
당장 그만둬 !!!’ 하고는
혼비백산해서 절 데리고 점집을 나오셨습니다
허나 점집 할아버지는 그런 저희 할머니까지 한사코 만류하시며 제 앞을
다시 가로막으며 다시금 ‘대왕대비마마 절받으시옵소서’ 하며
‘나중에 저희 자손이 나라에 큰 죄를 지을일이 있을터인데
그때 대왕대비마마의 하해와 같은 덕망으로 제 자손의 죄를 사하여주시기만 한다면
이 늙은이 죽어서 저 세상에서도 대왕대비마마의 은덕을 잊지않고 기리겠나이다’
그러더이다.
그러고보면...참 그 짧은 시간에
‘대왕대비마마’란 소리를 한 대여섯번도 더 들은 것 같은데...
허나 대왕대비고 뭐고 그런일이 있은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진거에요. 6.25 말이죠
할머니는 어린 저를 업고 군산으로 피난을 내려가셨어요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저희 할아버지가 왜정때 사업을 하셨었는데
그때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던 군산의 황사장이란 이가 있다고 해요
그런 황사장이라면 우리집안 사정을 외면하진 않을거라며
무작정 군산 황사장님댁으로 가야한다며 절 데리고 피난을 가셨죠
막상 군산에 내려가보니 저랑 할머니 외에도 대략 5-6식구 정도 되는
사람들이 군산 황사장님댁에 들어와 있더군요
황사장님께선 일단 집 근처에 작은 토굴을 임시로 만들어놓고
피난민들을 거기서 숨어 살게하셨죠
무엇보다...아마 6.25가 3년동안 있던 전쟁이라고 하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전쟁있던 3년내내 계속 포탄터지고 막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그런일이 3년내내 있었던걸로 아나본데
사실 그건 아니고 사람들 피난가고 그 난리 벌어진건 전쟁직후 한 한두달동안
벌어진 일이고...대충 서울 재수복(51년 3월)되고 본격적으로 휴전회담 들어간 무렵
부턴 남북이 대치한 지금의 휴전선 근처 일부지역 정도를 제외하곤
대체로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간거고 특히 한반도 남부지역 대다수는 그런대로
평온한 일상이 회복된걸로 봐야할거에요
저도 51년 봄부턴 다시 정상적으로 학교(국민 학교)를 다닐수 있었으니까요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황사장님댁에 은신하고 있던 다섯가족중 저랑 할머니 가족
그리고 20대 초반의 여성분이 동생 둘을 데리고 있는 소녀가장 가족
그렇게 두가족을 제외하곤 하나하나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살던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보면 전쟁이 끝난다하더라도 돌아갈곳이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만 끝까지 황선생님댁에 남았네요
마침내 53년 7월에 휴전이 되고
그때까지도 황사장님댁에 머물던 소녀가장 3남매도
언제까지 황사장님께 마냥 신세만 질수는 없어
자신들끼리 따로나가 돈을벌며 자립해 살겠다고 해서
그네들마저 떠나고 황사장님댁엔 할머니와 저만 남았습니다
헌데 이 무렵 황사장님께선 몸이 아파 시름시름 앓아누우시더군요
하긴 저희 할아버지한테 일제때 도움을 받았건 뭘했건
그런 교류가 있던분이니 대략 할아버지,할머니와 비슷한 연배로 친다면
이때 이미 연세 60-70정도에 이른분이니
그럴때도 되긴 했죠
사실 황사장님께선 전쟁전까진 양계장을 해오시던분이고
전쟁이 소강상태가 된후에도 다시 그 양계장을 어떻게든
수습해보려 하시던 분이라서
휴전후에도 쭉 양계장은 관리해왔는데
그런 황사장님을 할머니가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셨고
그래서인지...황사장님께선 자신이 돌아가시면 양계장과 유산을
할머니와 제게 물려주겠다고 약조를 하시더라구요
그러고보면 그분이 다른 식솔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어쩌다가 그 연세가 되시도록 부인도 자녀도 없었던것인지야
그때 어린나이인 제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황사장님께선 휴전되고 한 2년이 채 지나지않아 세상을 떠나셨고
사장님 양계장을 유언대로 할머니가 물려받아 계속 하게 되었죠
세월이 흘러 전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고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대학교까지 계속 다니고 싶었는데
중학교 졸업할 무렵에 할머니께서 그런 절 만류하시더군요
‘기집애가 공부는 계속 해서 뭐할거냐 ? 중학교까지 보내줬으면
기집애한테 해줄만큼 해준거니...이제 그만 양계장 일이나 도우라’며
전 공부를 계속하겠다며 울며불며 떼를썼고
할머니는 그런 절 종아리까지 치며 이렇게 야단치셨죠
‘니 아빠,엄미 니 오래비들까지 그렇게 여름철 전염병에 다 죽고
그래도 너 하나 남은 것을 건사해서 이리 키워줬더니 그 은혜를
이리 갚을셈이냐 ?’며 ‘할미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 ?’며 그러니
더 늦기전에...네게 (황사장님에게서 물려받은) 양계장은 넘겨주고
떠날터이니 잔말말고 어서 양계장일이나 도우라며
거듭되는 그와같은 할머니의 꾸중,회유,달램에 전 결국
고집을 꺾고 중학교만 나온뒤
양계장일을 돕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양계장일이 제게 맞는지
그런대로 취미가 붙더군요
전 정성껏 양계장을 했고 어린 소녀가 닭을 참 똑부러지게 잘 키우는게
기특해보였는지 그때부터 동네사람들은 물론
닭을 사러 오는이들까지 저를
‘새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하더군요
제가 그만큼 마치 닭의 어미라도 되는양 닭들을 너무 잘 키우고 길러서
그런식으로 별명을 붙인 모양이에요
헌데 물론 닭도 생물학적으론 조류에 포함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날 수 없는 새고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닭을 ‘새’로 부르긴
어색함마저 있는데 왜 ‘닭엄마’아니고 ‘새엄마’라고 부르는것인지
생각해보면 어감이나 발음상 ‘닭엄마’보단 그래도 ‘새엄마’가 더
입에 붙기 쉽고 발음하기도 좋아서
그리 별명을 붙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이다.
그렇게 전 17세 나이부터 (닭을 키우는) ‘새엄마’가 된거에요
17세때부터 시작된 양계장 새엄마의 길...
그리고 대략 한 5-6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답니다
할머니도 그 사이 연세 70을 넘기셔서 돌아가셨고
이후엔 양계장은 저 혼자 운영했죠. 힘들긴 했지만
양계장 자체가 그런대로 벌이가 쏠쏠하고 잘 나갔기 때문에
저 혼자...생계수단정도가 아니라...좀 놀아도 될 정도로
돈도 제법 벌었어요
덕분에...요즘애들 식으로 말하면 좀 ‘노는여자’가 된거에요
남자를 만난게 그 무렵입니다.
편의상 저희 신랑 이름을 가명일지언정 하나 지명(指名)하는게 좋겠네요
김용태(가명)라고 해두죠
용태씨는 뭐 그리 대단한 집 남자는 아니었고
군산 인근 농촌마을에서 농사짓고 사는 그런집의
5남매중 셋째였어요
위로 누님과 형님이 한분씩 계시고 밑으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하나씩 더 있는...
다만 막상 두 사람의 사이가 진지하게 진전되어가자
남자 집안에서 본격적인 반대가 시작되었어요
전 솔직히 화가나더군요
차라리 흔히 보는 막장드라마나 영화처럼
무슨 재벌가나 명문가,양반가 집안도 아니고
그래봤자 그저그런 평범한 군산 인근 농촌지역에서 농사짓는
그런집 셋째가 뭐 그리 대단한게 있다고
부모님이 나중에 몸져누울정도로 그리 결사반대를 하신건지...
대충 나중에 들어보니 저희 시부모님은 제가 부모없이 자란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는 여자라는게 영 내키지가 않았다고 하네요
새삼 할머니가 그때 이미 돌아가시고 난 뒤란게 원망스러워지더군요
할머니라도 한 몇 년만 사셨더라면
그래도 최소한 고아라며 시댁에서 싫어하는 일은 없었을지
아니면 그래도 부모없이 자란건 마찬가지니 크게 달라지는건 없었을지...
근데 생각해보니...제가 어쨌든 군산에서 제법 잘나가는 양계장하면서
좀 우쭐해지고 놀고싶은 마음에...그러고 돌아다니다 만난 사람이 남편이니
‘군산의 그 유명한 양계장 한다는 노는 여자애 ???’
이 정도면 생각해보니 남자 집안에서 영 내켜하지 않을만한 이유론
충분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이다
허나 저희 용태씨가...이 사람 아니면 안된다고 떼를써서
결국 마지못해 시부모님이 결혼승낙을 하고야 말았죠
무엇보다...용태씨도 이땐 시골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 생각이 없어서
서울에 가 취직해서 돈벌고 싶노라는 이야기를
저랑 사귈때도 몇 번 밝히곤 했어요
사실 그게 전 오히려 이 사람을 택해도 괜찮을지
그걸 고민하게 만든 이유기도 했어요
어쨌든 서울로 올라가 취직을 하든 뭘하든
이 사람과 결혼해 함께 서울올라간다면
양계장일은 더 못하게 되는거니까요
하지만 전 장시간 고뇌를 한 끝에
양계장 새엄마 노릇은 이쯤에서 접고
용태씨를 택하기로 헀답니다.
이야기 앞뒤 순서를 좀 바꿔서 썰을 풀어나가야 할 것 같은데...
나중의 일이지만 전 신랑과의 사이에 딸 다섯을 낳았습니다
헌데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시부모님껜 이미 아들이 셋이고
(총 3남 2녀. 5남매)
게다가 저희 신랑이 장남도 아니고
또 저흰 신랑이 서울에 올라가 돈벌고 싶다는 뜻이있어
저도 신랑뜻따라 결혼후에 그때까지 대략 7년동안 해오던 양계장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시댁은 굳이 가문의 대를 이어야한다, 아들 하나는 꼭 있어야한다
그런 집착을 할 필요는 없는 분들이셨고
게다가 저흰 어차피 결혼후 서울올라와 살았기 때문에
굳이 시부모님 눈치볼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희 손윗동서, 그러니까 남편 형님의 부인은
참고로 형님 내외는 저희 내외보다 3년정도 앞서 결혼하긴 했는데
두분 사이엔 아들 넷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일단 시부모님 입장에선 이미 아들 넷을 낳은 며느리가 있으니
굳이 둘째인 저한테까지 아들낳아야한다는 강요를 하실 이유는
별로 없었죠
다만 공교롭게도 저는 딸만 다섯을 낳았고, 형님은 아들 넷을 낳았으니
명절 때 내려가 시댁어른들을 뵈면
시부모님의 저와 형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땠을지는...
그냥 각자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
- 그 시절을 이해못할 요즘 10대-20대 젊은 친구들은 대충 부모님이나
부모님 비슷한 연배의 어른들게 여쭈어보세요. 그 윗대도 상관없지만
그분들은 대충 그런집안 분위기를 짐작하실수 있을겁니다 ^^;;
기왕 말나온거 한가지만 더 보태자면
저희 시동생...그러니까 저희 신랑 밑의 남동생은
- 참고로 5남매중 가장 막내인 분이기도 합니다. 신랑 밑으로 순서가
여동생,남동생 이렇게 되는것이니까요
저희 내외보다도 한 5년쯤 뒤에 결혼하긴 했는데
시동생 내외는 딸 하나, 아들하나 그렇게 둘을 낳았더군요
그러니 저희시댁 아들 3형제중엔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는 그 시절 구호를
유일하게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
남편과 결혼식을 올린 것이 1966년 봄
그리고 전 서울에서 돈벌기를 원하는 남편의 뜻에따라
결혼과 동시에 그때까지 하던 양계장을 처분하고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처음 남편과 저는 월세방을 하나 잡아서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남편은 서울 인근의 한 아이스크림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남편도 딱히 무슨 학력이 있는것도 전문지식이 있는것도 아니니
아이스크림 공장이 되었든 무엇이든 그냥 말단 노동자로 시작한거죠
다만 남편 딴에는 빨리 출세하고픈 어떤 야심이 있었는지
한번은 작심한 듯 제법 거창한 기획안을 대충 한달넘게 작성하여
생산부의 과장님께 올렸습니다
허나 과장님께선 저희 신랑 기획안을 보자마자 기도안찬다는 듯
바로 서류철을 내던지며
“ 야 !!! 이 조두류X아 !!! 이딴걸로 아이스크림을 만들면 어떤 미친X이
아이스크림을 사먹냐 !!! ”
하며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기획안을 엎어버리셨습니다
남편은 생산부 과장님한테 망신을 당한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모멸감을 견딜수 없었는지 회사에 사표를 내려했는데
다만 과장님께서 그날 너무 화를 낸 것이 미안했는지
사표를 내는대신 회사 사택단지까지 츨퇴근하는 직원들을 실어나르는
사내버스 기사로 보직을 옮겨 일할수 있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남편은 사내버스 기사로 한 3년넘게 일한 것 같은데
남편이 아이스크림 공장 말난 노동자로 일하다 기획안을 낸 것이
취직한지 3년쯤 될 때의 일이고
그리고 보직을 버스기사로 옮긴뒤 3년을 더 일했으니
6년정도 일한것인데
전 남편이 너무 고생하는것같아 지혜를 짰습니다
그러지말고 차라리 우리 서울 인근에 식당이라도 하나 내서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사실 전 양계장을 처분할 때 마련한 돈과
또 황사장님이 돌아가시면서 할머니한테 물려준 유산도
제가 그대로 상속받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좀 있기는 했어요. 다만 그때까진
저도 남편의 사람됨에 대한 100%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돈이 있다는걸 알면 남편이 행여 그걸 허투르 쓰진 않을까 염려되어
그때까진 침묵한거죠
허나 이쯤되니 남편이 이렇게 고생하느니
차라리 그 공장 그만두고
함께 식당이라도 운영하며 살자고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 결혼한지 6년만이니 전 그때 이미 첫째와 둘째를 낳은뒤고
셋째도 어느덧 제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때입니다
서울을 빠져나와 남양주쪽에 ‘닭칼국수’집을 하나 냈습니다
- 참고로 지금의 남양주가 양주군(지금의 경기도 양주시)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은 1980년의 일이긴 하지만 읽는이들의 혼돈을 막기위해 편의상
그냥 ‘남양주’로 하겠습니다. 여하튼 닭칼국수집을 낸 것이 지금의 남양주
지역이지만 70년대엔 그냥 ‘양주군’이었다는 소리입니다.
제가 양계장 하던 ‘새엄마’였다는건 이미 익히 말씀드렸을터고
그때의 노하우를 살려 직접 닭을 키우며
그렇게 잡은 닭으로 만든 닭고기 육수를 우려
그 국물로 칼국수를 만들어 파는
그런 ‘닭칼국수’집을 내기로 한거죠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게 양계장을 하며 닭을 키우는 ‘17세 새엄마’
소리를 들을때는
닭을 키워서 팔기는 해도 제가 직접 잡거나 하진 않았는데
이젠 제가 직접 닭을 키워 잡아야한다니
좀 아이러니가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딸 다섯을 낳았다는 이야긴 이미 말씀드렸죠 ?
첫째가 태어난게 60년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갈 무렵이고
남편이 아이스크림 공장에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던때였죠
첫째는 자라면서 성격이 똑부러지고 자기주장이 강한게
저보다는 남편을 많이 닮아있더라구요
그리고 자라서는 좀 특별하게
방송국에 취직 PD로 일하게 되었답니다
(* 사실 첫째가 방송국에 입사한 1990년대 초반 무렵만 해도
방송국에서 여성 피디를 본다는게 그리 쉽지 않은일인데
그런걸보면 당시로선 여자가 택하기 쉽지 않은 그런 선택을 한
아이인것만은 분명하네요)
둘째는 반면 어릴때부터 매사에 신중하고 또 순둥이였던게...
남편을 닮은 첫째에 비해 확실히 이번엔 절 많이 닮은
아이가 태어난 것 같더라구요
성인이 되니까 그 모습하며 분위기까지 딱
제 젊은시절 모습 붕어빵일 지경이었으니까요
둘째는 중소기업을 하는 남자를 90년대 중반쯤 만나 시집을 갖는데
전업주부로 살며 전형적인 현모양처이자 사업을 하는 남편의 내조자로
제 몫을 다 하며 잘 살아가고 있답니다
첫쨰와 둘째까진 그래도 60년대 후반에 태어난 아이들인데
셋째부터 자연스럽게 70년대 태생으로 넘어가네요
솔직히 저나 남편이나 공부쪽으론 별로 머리는 없는편이었는데
- 저는 중학교를 졸업한뒤 학업을 더 하고 싶었지만 할머니 반대로
더 이상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것이고 남편 역시 사춘기때는 그저
서울에 올라가 돈벌고 싶다는 막연한 꿈만 있을뿐 딱히 공부도 잘 안
했고 대충 그시절부터 놀러만 다닌 그런 사람이니까
어쨌든 저나 남편이나 공부쪽으로 머리가 되는지는 검증받아볼 여건이나
환경이 되지 못했다고 봐도 되는 것 같네요
헌데 셋째는 무슨 돌연변이인지 뜻밖에 학창시절부터 공부도 제법 하더니
지금은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 되어 있답니다
아쉬운건 성격은 하필 제 은근히 어리버리하고 세상물정 잘 모르는
어리숙한면과 의외로 한고집 하면서 심지어 삐지면 3박4일을 가는
그런 남편의 단점까지 저와 저희 신랑 단점만 딱 빼다박은
그런 아이가 태어났답니다
넷째는 좀 특이한 선택을 한 앤데
다만 의외로 엉뚱한면이 있으면서도 막상 일을 맡기면 자기 책임을 다하는 면은
절 많이 닮았고
은근히 창의성이 있어 기발하거나 엉뚱한 발상을 잘 하는 면은
남편을 많이 닮았더라구요 – 아이스크림 공장 말단직원으로 일하다 되도않는(?)
기획안을 하난 내서 짤릴뻔하기까지 한 저희 남편입니다
그런 넷째는 특이하게 항공대학을 나와
지금은 항공사 부기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그래도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대체로 사회에서 각자 자기 할 몫 다하는
성실한 일꾼으로 성장했는데
아쉬운건 70년대 후반에야 태어난 저희 막내입니다
사실 제 언니들 키우느라 상대적으로 우리가 신경을 덜쓴게 아닌가 후회도 되고
또 나름 똑똑하고 자기할몫 다하는 언니들이 위로 쭉 있다보니
막내가 좀 치이는 처지가 된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어
굳이 부모인 저희 입장에서 보면 가장 안타깝고 애틋한 손가락이랍니다
그래도 이렇게
딸 다섯 훌륭하게 잘 키웠으면 되었지 않나요 ?
뭐 80년대에 ‘잘키운 딸하나 열아들 안부럽다’는 식의 구호도 있었지만
사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비교는 좀 그렇지만
솔직히 아들만 넷 낳았다고 시부모님으로부터 명절 때 오만 이쁨,사랑
다 받고 뻐기던 저희 동서형님...
안타깝게도 그 아들 넷 다 비리비리하게 제대로 취직도 못하고 방황하거나
그러면서 지내고 있다네요
그래도 그에비해 딸 다섯중 막내 정도만 제외하면 다들
사회에서 제 할몫 다하는 성실한 일꾼으로 성장시킨 저
이만하면 훌륭하게 애들 잘 키웠다는 소리
들을만하지 않나요 ? ^^;;
비록 일곱 살때 할머니손에 이끌려가서 점을 보았던
그 엉터리 점쟁이 할아버지의 말처럼
‘대왕대비’가 되진 못했지만...
잘 키운 딸들 봉양 받으며 딸들이 각기 결혼해서 낳은
외손주들 재롱보면서 살아가는 요즘은
대왕대비가 아니라 어느나라 대통령 영부인도 부럽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호사를 누리고 있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네요
너무 시시한 이야기였나요 ?
물론 요즘의 당차고 자기주장 강하고 또 사회 각계의 전문분야에서
열심히 자기 몫 다하면서 살아가는 젊은 친구들에겐
어이없고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로 들릴지 몰라도
솔직히 우리땐 다 그렇게 살았어요
대략 1930-40년대 정도에 태어난 여성들...어쩌면 한 50년대생들까지도
그중 80-90%라고까진 할수 없어도
한 70% 정도까지는
산업화가 한참 진행되던 그 시절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는 남편 내조하며
자식들 키우며 살아가는 그런 전업주부이자 가정주부의 삶을
진정한 ‘여자의 길’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여자들이지요.
(* 헌데 생각해보니 전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일하다 6년만에 퇴직한 남편과 함께
남양주에서 닭칼국수 집 하며 지금껏 살았으니 그 보편적 가정주부의 삶에선
다소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았었네요.)
전 다만 그렇게 살아온
우리시절 여인들의 이야기를
한번쯤 하고싶었던거에요
당차고 자기주장 강한 여자들만 갈수록 늘어나는 요즘 세상에
남편과 자식들을 위한 희생과 헌신
그리고 인내와 봉사와 양보 그런것들을
여인들이 지켜야하는 가장 최고의 덕목이고 가치관이라 여겼던
그런시절의 여인들의 삶도
한번쯤은 되돌아봐줬으면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