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2022년 11월 10일 방송
꼬꼬무 출연진들 및 시청자들 눈물바다
결혼을 앞두고..어린 10대 자식들을 두고.. 순직한 소방관
한 소방관 유기족은 시신을 기증. 또 항 소방관 유족 누나는 의용 소방관에 자원에 근무중
이외에도 다수 프로그램 방송에서 방영
2022년 영화 소방관 모티브로 제작 예정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방화 소방관 6명 순직 3명 중상 참사
건물 전소 및 붕괴로 소방관 10명이 매몰
1명 구조 하반신 마비
대한민국 소방 역사상 최악의 비극
사고 발생 직후 비번 이었던 소방관 및 서울 전 소방서 소방관들이 지원 요청에 투입돼 눈이 내리는 추운날씨에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맨손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를 파해쳐 매몰된지 3시간 30여분만에 구조
합동영결식에서 동료소방관들 및 유족들 오열
순직 소방관들 1계급 추서 국립현충원 안장 추모비 세워져
당시 순직 소방관들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합동분양소에는 3일동안 3만명에 가까운 시민들과 공무원들이 조문 하는등 나라 전체가 슬픔과 분노에 잠겨
소방관들이 사명감으로 목숨 받쳐 구하려고 했던 건물 집주인 30대 아들이 어머니를 폭행 하고 방화 하고 도주 하고 어머니는 아들이 집안에 있다고 거짓으로 알렸다는 사실에 국민들 분노
이사실을 알게된 소방관들 한동안 넋나간 사람 처럼 아무말 없이 서있어
방화범 집주인 아들 현조건조물방화 및 존속상해 및 상해 혐의로 구속돼 징역형
참사 이후 소방서 국가직으로 전환 및 처후 개선
죽음이 헛되지 않은 희생 소방관들
2001년 3월 4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의 다세대주택에서 집주인의 아들 최 씨(당시 32세)의 방화로 소방관 6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
오전 3시 47분, 화재 신고가 최초로 접수된 후 가장 가까운 서울서부소방서(현 은평소방서)를 비롯 인근 소방서의 소방차 20여 대와 소방관 46명이 출동했으나 골목에 주차된 차량들로 인해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방관들은 현장으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서부터 소방호스를 끌고 뛰어 진화를 시작했다.
그 시각 구조대도 현장에 도착했다. 구조대원들은 화재진압대가 먼저 현장에 도착 할 수 있도록 다른 진입 경로로 현장에 접근하려 했지만, 폭 6m 남짓한 좁은 이면도로에 주차된 차량들이 너무 많아 구조차량이 도저히 진입할 수 없어 5명[1]의 구조대원들이 25kg이 넘는 장비들을 직접 들고 200m 가량을 달려서 도착했다.
이후 오전 3시 59분 '연희소대'가 현장 근처에 도착했지만, 마찬가지로 골목길에 주차된 차들에 의해 접근이 어렵자 15m 남짓 소방호스 12개를 이어붙여 가까스로 진화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며 진화 시작 5분여 만에 집주인 및 세입자 가족 등 7명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그때 집주인이자 방화범 최씨의 어머니인 선씨의 "내 아들이 안에 있다"는 주장에 이미 화마로 뒤덮힌 2층집으로 먼저 '구조1조'의 소방관 3명이[2]이 진입했으나 아들 최씨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렇게 1차 수색이 종료되었다.
그런데 집주인 선씨가 "사람이 안에 있는데 왜 구하지 않느냐”고 했고[3] '구조1조'의 소방관 3명과[4] '녹번 2소대'의 소방관 3명[5] '홍은소대' 소방관 2명[6] 그리고 '2조'의 소방관 2명[7]이 당시 방화복이 아닌 방수복(비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 대상자가 있다는 말 한마디에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녹번 2소대'와 '홍은소대', 그리고 '구조1조', '구조 2조'의 10명이 구조 대상자를 찾기 위해 건물로 들어간 오전 4시 11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2층 주택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소방관 10명이 무너진 건물속에 그대로 매몰되었으며, 인근에 있던 소방관 3명[8]도 날아온 파편에 맞아 쓰러진다.
건물이 붕괴된 직후인 오전 4시 18분, 다른 화재신고[9] 장소에 갔다가 뒤늦게 도착한 '녹번1소대'와 이후 출동한 시내 11개 소방서에서 도착한 구조대원 200여 명은 소방호스 대신에 삽과 망치를 들고 필사적인 구조작업을 벌여 3명[10]의 소방관을 구조해 냈으나 나머지 6명은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11]
이미 불은 다 꺼진 오전 5시 47분, 영하 0.3도, 초속 4m의 서남풍에 습도 60% 굵은 눈발이 내리기 시작하며 아침을 맞이했지만, 그 풍경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해가 뜨고 각종 중장비와 인력의 투입으로 오전 7시 57분, 매몰되었던 마지막 대원이 들것에 실려 나왔으며 오전 9시 28분, 집주인 아들 최씨가 불길이 치솟기 전 현장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듣고[12] 구조 수색작업을 종료했다.
방화범인 집주인 아들 최씨(32)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불이 나기 한 시간 쯤 전인 어제 새벽 2시 반쯤 술에 만취한 채 귀가해, 자신을 야단치는 어머니 선씨와 다투다 결국 주먹을 휘둘렀고, 최씨는 어머니가 자신을 피해 윗층으로 몸을 숨기자 화가 풀리지 않아 방안에 있던 생활 정보지에 불을 붙였다고 자백했으며, 불길이 크게 번지자 겁이 난 최씨는 친척집으로 달아났다가 4일 오후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최씨의 자백에 따라 방화와 존속상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이후 현주건조물방화 및 상해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재판 결과 최씨는 1989년경부터 정신질환으로 세 차례 입원치료를 받은 전적으로 인해 심신미약 등이 인정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정상적으로 형을 모두 마쳤다면 2005~6년 쯤에 만기 출소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근황은 불명이다. 다만 전과자인데다 그 죄질도 죄질이거니와, 정신상태도 온전치 못한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삶은 영위하지 못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후 1계급 추서되었으며, 아래 계급은 순직 당시의 계급이다.
지방소방장 박동규
지방소방교 김철홍[13]
지방소방교 박상옥
지방소방교 김기석
지방소방사 장석찬
지방소방사 박준우[14]
당시에 소방관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15]가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먼저 당시 근무 형태는 24시간 맞교대로 격일 근무였는데, 참사 후 3교대로 바뀌었다. 또한 기존에는 방화복이 없어 방화복 대신 방수복인 비옷을 입었지만,[16] 방화복을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에서 PTSD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이 높아졌으며, 가장 큰 변화로는 의무소방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소방관들 사이에서는 '소방관의 처우는 홍제동 전과 후로 나뉜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
2001년 7월에 종전 청록색 기동복, 하늘색 구급복, 주황색 구조복이 시인성 문제가 거론되어 소방의 시그니처 컬러인 주황색 기동복(남색 옷깃)으로 통합되었다.
순직 소방관들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합동분향소에는 3일 동안 3만 명에 가까운 시민과 공무원이 조문했다. 또한 소방관들이 목숨을 바쳐 구하려 했던 집주인 아들이 정작 요구조자는 커녕 오히려 방화를 저지르고 도주하여 참사를 유발한 당사자인 것으로 밝혀져 더욱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의사의 역할도 남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틀림 없지만
자신을 내던지면서 구하지는 않치 않은가
나는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수 있는 이 직업에 만족하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내 한 목숨 선선하게 내던질수 있다는것
나는 이것을 하나의 성직으로 여긴다네
무너지는 건물의 잔제에 파뭍혀 보기도 하고
성난 불길의 혓바닥에 올라보기도 했고
하지만 인간사 모두 하늘의 뜻이라고
주어진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사는 그날까지 열심히 살다가 간다면
내세에 좋은 인연으로
좋은 몸을 받고 태어나지 않을까?
-희생 소방관중 한명이 살아생전에 동료 소방관에게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