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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도서관 사서의 맛가루

Nitro |2023.11.09 09:15
조회 32,363 |추천 71

오늘의 책: 미야시타 나츠,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 마음산책, 2020


“아침밥을 동경해왔다. 맛있는 아침밥을 특집으로 꾸민 잡지에는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고, 아침밥에 대한 단편소설이 있으면 반드시 읽고 싶다. 이야기에 한해서지만.”

- 미야시타 나츠, “맛있는 아침밥” 중에서


그럴듯한 아침밥은 사진이나 글로 보기에는 멋지지만, 실제로 해 먹자면 만드는 사람에게도 먹는 사람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이제 막 일어나 식욕도 돌지 않는 데다가 출근 시간, 등교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만들고 먹어야 하니 제대로 요리해서 여유롭게 맛을 음미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으니까요. 


어제 저녁밥으로 먹다 남은 반찬을 대충 데워서 내놓으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아이들 반응은 냉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막 일어나 부스스한 몰골로 “히잉~ 또 이거예요?”라는 투정에 “어제는 잘 먹었잖아!”라고 소심하게 항의해보지만 


두 놈이 입을 모아 “계속 먹으면 질린다고요!”라고 공격하는 데는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반찬이 없으니 조금 깨작거리다가 자기들끼리 장난치며 투닥거립니다. 


“아빠가 맴매하러 갈 거야”에서 시작해서 “얼른 다 먹는 사람은 디저트를 줄게”로 끝나는 갖은 협박과 회유를 섞어서 사용하지만, 효과는 그때뿐. 


식사 시간은 하염없이 질질 늘어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아이들의 등교 시간은 점차 다가옵니다. 


유일한 지원군인 아내는 이미 출근한 탓에 두 시간 늦게 출근하는 나 홀로 요리학교 졸업생이라는 업보를 짊어지고 고객의 항의를 받아낼 뿐.


 

이러한 고민은 나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의 저자, 미야시타 나츠 역시 고등학생이 되는 아들의 도시락을 새벽부터 일어나 싸 줄 생각에 걱정이 산더미였으니까요.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 스스로 도시락을 싸야 할 거라고 지레 겁먹었던 아들은 어머니가 계속 도시락을 만들어 준다고 하니 기쁜 나머지 “바쁜 날은 밥만 싸줘도 괜찮다”라며 장벽을 낮춰줍니다.


“차조기 후리카케, 이른바 ‘유카리’를 ‘유카리탄’이라고 이름 붙여서 싸 들고 간다. 반찬이 좀 부족하거나 맛이 싱거울 때 도움을 받는 모양이다. 그 말에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여차하면 유카리탄이 있다. (중략) 생각지 못한 반작용도 있다. 도시락 반찬을 알차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 덕분에 새로운 레시피를 시험해보기도 한다. 뭔가 즐거운 본말전도다. 여차하면 유카리탄, 이라는 보험이 있기에 생긴 여유다.”

- 미야시타 나츠, “여차하면 후리카케” 중에서


후리카케는 밥에 뿌려 먹는 일본식 조미료로, ‘유카리’는 한 식품회사의 후리카케 상표입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우리말 순화어로 ‘맛가루’라는 단어를 제시하기도 했지요. 


우리나라로 치면 오뚜기의 ‘밥이랑’이나 백설의 ‘밥친구’, 청정원의 ‘보크라이스’ 같은 제품이라고나 할까요. 


김이나 멸치, 깨, 말린 채소 등을 갈아서 소금과 설탕 등으로 간을 한 간단한 양념이지만 밥에 뿌리면 입맛 까다로운 아이들도 금방 한 그릇 뚝딱 해치우게 해주는 마법의 가루입니다. 


그래서일까, 생각해보니 생수 주문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집 앞 편의점에서 급하게 사 온 적은 있어도 맛가루가 다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는 듯합니다. 


그냥 밥에 슥슥 뿌려주기도 하고, 달걀과 함께 볶아주기도 하고, 참치를 마요네즈와 섞어 속을 채운 주먹밥을 만들거나, 슬슬 질리는 것 같으면 밥에 달걀과 맛가루를 섞어서 프라이팬에 전 부치듯 부쳐낸 다음 토마토케첩을 뿌리고 “오늘 아침밥은 피자”라며 사기를 칠 수도 있습다.


​만드는 법 역시 어렵지 않아서, 고소하고 짭잘 말린 재료라면 무엇이든 갈아 넣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재료를 직접 말린다면 손이 좀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요. 


식품건조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리를 워낙 많이 차지하는 데다가 시간도 오래 걸려서 포기했습니다.


손질한 대파와 얇게 썬 당근을 오븐 최저 온도에 맞춰놓고 두세시간 가량 넣어두면 아쉬운대로 바삭한 채소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참깨와 땅콩과 멸치는 기름을 두르지 않은 프라이팬에 한 번 볶아서 준비합니다.


김과 가다랑어포(가쓰오부시)는 그대로 사용해도 되니 마음이 편합니다.


 

준비된 재료들은 한 번에 섞어서 가는 것보다는 각각 따로 갈아서 입맛에 맞게 비율을 조절해가며 섞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에는 맛을 보며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추는데, 꽤 넉넉하게 넣어도 공장에서 만든 맛가루에 비하면 맛이 약합니다. 


마트에서 사 온 밥가루를 사용할 때는 맛가루 한 봉지만 뿌려도 짭짤했는데 수제 맛가루는 왕창 뿌려도 짜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사 먹는 제품에 얼마나 소금이 많이 들어갔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반면에 직접 만든 맛가루는 소금이 적어서 재료 본연의 맛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요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밥에 맛가루 뿌린 것이 이렇게 항상 인기가 많다는 사실은 좀 의아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비싼 재료나 정성 들여 만든 요리도 이틀 연속으로 나오면 싫어하는 아이들이 왜 이것만큼은 아무 소리 없이 달게 먹을까. 


궁리하다 보면 내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릅니다. 뜨거운 밥에 참기름과 간장 몇 방울 뿌려 비벼 먹던 참기름밥. 


고소하고 짭짤한 맛은 밥이 술술 넘어가게 만드는 밥도둑이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하루 세끼를 모두 국과 반찬 갖춰가며 제대로 한 상 차려 먹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피곤한 부모님의 일상. 


그 와중에 가끔 ‘참기름밥에 김 싸서 간단하게 먹자!’라는 말에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마음에는 


‘나도 가족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데 한몫을 한다’라는 소속감과 뿌듯함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었던 것 같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중년의 소설가 아줌마가 가족에게 밥 해먹이는 에세이를 읽으며 공감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은 “버섯 거부자가 가족 중에 하나 있다. 다섯 가운데 넷까지는 버섯을 좋아하는데, 딱 하나가 거부하는 바람에 집에서는 버섯을 못 먹는다”라는 구절을 보곤 우리 집과 똑같다는 생각에 손뼉 치고 웃으며 격하게 공감합니다. 


이러다가 십여 년 후에는 “아들이 독립해서 나간 탓에 항상 사던 다섯 토막짜리 연어를 네 토막짜리 팩으로 바꾸어 주문하려다가 울었다”라는 부분까지 똑같이 겪게 되는 것일까요. 


덩치가 산만 한 아저씨가 두부 1/4모 남은 것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무래도 꼴불견이라 슬쩍 걱정되기도 합니다.


 

방금 만든 맛가루를 병에 옮겨담는 모습을 보던 아이들이 "저녁밥으로 먹자"고 졸라댑니다. 


"내일 아침밥으로 먹을거야"라는 말에 "오늘 저녁에도 먹고, 내일 아침에도 먹으면 되지요!"라며 보채니 맛이나 보여주자는 생각에 시제품을 만들어 줍니다. 


밥에 참기름 약간과 맛가루를 뿌려서 뭉치기만 해도 맛있는 주먹밥이 만들어집니다.


한 입 먹은 아이들 눈이 평소와 다른 맛에 동그래집니다. 


이제 막 돈의 소중함을 깨우쳐가는 딸아이는 “아빠, 이거 팔면 부자 되겠어요!”라고 소리치고, 


볶은 땅콩의 껍질 까는 임무를 담당했던 유치원생 아들내미는 "아빠, 땅콩 껍질 더 많이 깔게요! 더 많이 만들어놔야 할 거 같아요!"라며 욕심냅니다. 


그 모습을 보니 냉장고에 넣어둔 수제 맛가루 한 봉지가 더욱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미야시타 나츠는 맛가루가 보험이라고 생각된다던데, 직접 만든 수제 맛가루는 그냥 보험이 아니라 월 납부금이 훨씬 더 비싼 프리미엄 보험을 들어 놓은 기분입니다.

추천수71
반대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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