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 단편선2 - 심장이 두 개인 큰 강』, 민음사, 2013.
감성 캠핑이나 힐링 캠핑이라는 명목으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 시작하던 캠핑은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답답한 실내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몇 안되는 취미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이 첫 캠핑 이후에 힐링은커녕 지쳐서 집에 돌아오고,
비싸게 구입한 캠핑용품을 창고에 박아두거나 그대로 중고시장에 팔아버리기까지 합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낭만적인 캠핑 사진 한 장 뒤에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고생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꾸준히 캠핑을 다니며 즐기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 듯 합니다.
하나는 자동차에 온갖 짐을 싣고 다니며 간이 캠핑장을 호화 별장으로 바꾸는 데 재미를 느끼는, 글램핑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몸은 좀 고생하더라도 텐트와 침낭만 달랑 짊어지고 자연과 동화되는 기쁨을 만끽하는 미니멀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 중에서 후자의 즐거움을 널리 알리는 글이 있으니,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심장이 두 개인 큰 강Big Two-Hearted River”입니다.
헤밍웨이의 자전적 소설인 “닉 애덤스 이야기 시리즈The Nick Adams Stories” 중 하나로, 국내에는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의 헤밍웨이 단편선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닉은 자연 속에서 만끽하는 짧은 여행을 통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받습니다.
이 힐링 캠핑에 필요한 짐이라곤 조그만 도끼와 천막, 프라이팬과 주전자, 밧줄 정도가 전부.
여기에 약간의 호사스러움을 더하기 위해 커피와 담배, 낚싯대가 추가될 뿐입니다.
예전에 캠핑을 갔을 때 벌였던 야단법석이 떠오릅니다. 바닥을 고르고, 방수포를 깔고, 텐트를 치고, 팩을 박고, 러그를 깔고, 타프를 치고...
반면 닉이 강줄기를 따라 걷다가 숲속에서 하룻밤 자는 데는 많은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그저 나무에 밧줄을 묶고 캔버스 천을 걸친 다음 도끼로 나무 그루터기를 쪼개 천막용 말뚝을 박으면 우주선 소재를 첨단 기술로 가공해서 만든 텐트가 부럽지 않습니다.
감성 캠핑에서 각광받는 예쁜 정리함과 고풍스러운 조립식 옷걸이 역시 주변에 서 있는 나무에 못 한 개 박아넣고 가방을 거는 것으로 대체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닉은 배가 고팠다. 지금처럼 배가 고픈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돼지고기와 콩이 든 통조림과 스파게티 통조림을 따서 프라이팬에 쏟았다. “힘들게 여기까지 운반해 왔으니 얼마든지 먹을 권리가 있지.” 닉이 혼잣말을 했다.
(중략)
닉은 프라이팬을 불꽃 위에 올려놓았다. 아까보다 더 배가 고팠다. 콩과 스파게티가 따뜻해졌다. 닉은 그것들을 저어서 서로 섞었다. 표면에 작은 거품들이 힘겨운 듯 일더니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닉은 불 옆에 앉아 프라이팬을 내려놓았다. 닉은 그것이 너무 뜨겁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 위에 토마토케첩을 조금 부었다. 그는 불을 쳐다보고 나서 천막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혓바닥을 데어 음식 맛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중략)
그는 다시 한번 천막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됐겠지. 그는 접시에서 한 숟가락 가득 펐다. “야, 이거 맛이 끝내주는데.” 닉이 행복한 듯이 말했다. 한 접시 다 먹고 나서야 비로소 빵 조각이 생각났다. 그는 두 번째 접시를 빵조각으로 깨끗이 닦아 가면서 다 먹었다.
- 헤밍웨이 지음, "심장이 두 개인 큰 강" 중에서
통조림 세 개로 식사와 후식까지 모두 해결되는 편리함은 캠핑 요리의 장점입니다.
하지만 원래대로였다면 한 캔에 98센트짜리 스파게티 통조림은 바다 건너 한국에 도착하면서 몸값이 네 배 넘게 올라버렸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국에 성업중인 부대찌개 식당들 덕에 콩 통조림은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지요.
책에 나온대로 요리를 해봅니다. 캠핑 분위기 살려보려고 무거운 무쇠팬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과연 요리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견이 갈릴 듯 합니다.
라면조차도 물 조절, 면발의 조리 정도에 신경을 써야 하는 데 비하면 이건 그냥 깡통 두 개 따서 쏟아붓고 끓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래도 보글보글 끓으며 풍기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는 그 어느 요리 못지않게 든든한 기분이 들게 해줍니다.
사실 통조림 두 개를 끓여 만드는 저녁 식사는 화려한 캠핑 만찬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숯불에 지글거리며 굽는 두툼한 스테이크나 아이스박스에 가득 채운 얼음 속에서 꺼내는 해산물이 대세가 된 럭셔리 캠핑 요리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요.
스파게티 통조림은 퉁퉁 불어버린 면발로 악명높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후식마저도 살구 통조림 한 개와 커피 한잔이 전부입니다.
하다못해 마시멜로라도 구워서 초콜릿과 겹쳐 미국인들의 국민 캠핑 요리인 “스모어s’more”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맛을 포기했기에 오히려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습니다.
분주하게 식사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리고 호화로운 음식에 정신이 팔리지 않은 덕에 닉은 강 건너편 습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밤바람에 일렁이는 모닥불, 그리고 무엇보다도 옛 친구와의 추억을 음미하며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으니까요.
파스타가 다 끓으면 소설에 나온 것처럼 케첩으로 간을 하고 빵을 곁들여 먹습니다.
원래라면 길쭉한 스파게티 면발을 포크로 둘둘 말아 먹었을텐데 요즘엔 동그란 모양의 스파게티'오'가 대세인지 길다란 면발의 통조림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숟가락으로 떠먹기 편하다는 장점은 있네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엄청나게 맛있는 것도,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로 맛없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캠벨 수프 통조림에 기대할 수 있을법한 딱 그 정도의 맛입니다.
캠핑 가서 배고플 때, 모닥불에 끓여서 경치를 감상하며 먹으면 맛있겠다 싶은 수준.
하지만 집에서도 이 즉석 스파게티를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뛰어난 자연 환경 대신 헤밍웨이의 소설을 조미료삼아 먹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고 보면 무엇을 먹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먹는지 역시 음식 그 자체 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사람이 느끼는 맛의 종착역은 두뇌이고, 주변 환경은 우리의 뇌가 음식의 맛이나 향에 항상 섞어 먹는 향신료와 같기 때문이지요.
뒷골목 편의점 의자에서 먹는 컵라면과 등산을 가서 구름 위에 올라 먹는 컵라면은 같지만 전혀 다른 맛입니다.
거실 소파에 파묻혀 TV에서 틀어주는 재방송 영화를 보며 먹는 팝콘과 여자친구 손잡고 영화관에서 최신 영화를 보며 먹는 팝콘의 맛은 똑같지만 다른 맛입니다.
왕이 피난길에 먹은 생선은 은어라고 부를 만큼 맛있었지만, 궁궐에 돌아와서 먹은 생선은 똑같은 맛임에도 불구하고 그 맛이 나지 않았기에 도루묵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많은 요리도구와 비싼 재료에서 벗어나, 모닥불에 데워먹는 통조림 속에서 그 나름의 한 조각 “힐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캠핑장에서 통조림 뚜껑을 따거나 즉석 카레를 끓는 물에 넣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를 잃는 것”이 아니라,
바쁜 마음으로 가득한 나 자신을 조금 덜어내고 그 그릇의 빈자리에 좋은 풍경과 약간의 배고픔을 더해 음식과 함께 먹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