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류지수, 『오늘은 홈술』, 청림라이프, 2019. // 아시나노 히토시, 『카페 알파』, 학산문화사, 2010.
고등학교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라면 아마 “대학교만 가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은 물론이고 동네 어른들부터 TV 연속극 대사까지도 “대학교 합격만 하면 된다”라며 달래던 시절.
하지만 막상 대학교 신입생이 되어보니 그 자유랄게 그다지 대단한 것도 없었는데, 십여 년간 ‘대학만 가면’이라고 되뇌며 공부하던 놈이 대학교 학생증 하나 받았다고 하루아침에 유흥의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정작 취미생활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학생증이 아니라 주민등록증이었는데, 술과 관련된 제약 하나는 확실히 풀어주었던 탓입니다.
인생의 쓴맛을 덜 봐서인지 소주에는 큰 흥미를 못 느꼈지만, 그 대신 칵테일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지요.
그런데 정작 그 계기가 된 것은 한 권의 만화책이었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만화책 "카페, 알파"에는 동물성 단백질을 못 먹는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우유 정도는 마셔보려고 노력하던 끝에 커피술을 타서 시도해보는 알파.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그 맛에 눈물까지 흘려가며 마시지만 결국 길거리에서 신문지 덮고 자다 깨는 술주정으로 결말이 납니다.
로봇도 엉엉 울게 만드는 그 맛이 궁금해서 손을 댔는데, 저 역시 흠뻑 빠져서 커피술을 됫병으로 사다 놓고 주야장천 우유와 얼음을 타서 ‘깔루아 밀크’를 만들어 마시곤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시의적절한 메뉴 선택이었던 것이, 학창 시절에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과도기를 장식하기에 깔루아 밀크가 제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야간 자율학습 시간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커피 우유를 연상시키면서도
알코올 도수 20도의 강렬한 존재감은 슬슬 세상의 쓴맛에도 익숙해져야 하는 그 당시의 상징과도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만화 때문인지, 그 추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이라 십 수년간 다른 술은 없어도 깔루아만큼은 반드시 집 어딘가에 한 병씩 비치해 둡니다.
내 영혼을 위한 비상식량이랄까요.
개인적으로는 깔루아 밀크를 마시며 어리버리하던 대학생 시절을 추억한다지만,
사실 칵테일만큼 "이야기와 상징성"을 팔아먹기 좋은 음료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는 "칵테일로 시작해서 와인과 함께 즐기며 커피로 끝난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이라면 식사 메뉴를 선택하기 전에 칵테일 메뉴부터 먼저 보여주며 주문을 받습니다.
예쁜 유리잔에 담긴 알록달록한 식전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천천히 메뉴판을 보며 음식과 와인을 주문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칵테일의 종류가 다양하다 보니 술이 센 사람이나 약한 사람 모두가 각자 취향에 맞게 마실 수 있고,
상쾌한 맛과 향으로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장점은 수많은 제조법 못지않게 그에 얽힌 상황과 뒷이야기도 다양하다는 데 있습니다.
모임이나 기념일의 성격에 맞는, 메시지가 담긴 특색있는 칵테일을 주문하는 것이 가능하거든요.
그리고 이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홈술, 혼술을 할 때도 빛을 발합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고서야 술 마실 때마다 원하는 분위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데는 아무래도 깡소주보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탄생 비화나 추억이 담긴 칵테일이 제격이니까요.
어렵게 공부해야 하는 위스키나 와인에 비하면 즐기기도 쉽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으니 편의점이나 동네 마트에서 파는 재료로 칵테일 한 잔 만들어 가볍게 마시는 게 유행이 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홈술'이라는 책을 처음 봤을 때는 그런 칵테일 초보자들이 홈술을 시작하는 데 참고하기 좋은 자료다 싶었습니다.
쉐이커(술을 흔들어 섞는 도구)나 지거(칵테일용 계량컵), 바 스푼의 번쩍이는 광택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 ‘편의점에서 파는 상품을 대충 섞어도 맛있는 칵테일 레시피’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거든요.
준 벅June bug이라는 칵테일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별로 쓸 일도 없는 멜론 술이며 바나나 술을 남대문 시장까지 가서 한 병씩 사 왔던 입장에서는 아예 상표명까지 콕 집어가며 “썬키스트 멜론 소다와 순하리 소다톡 바나나맛을 사용하세요”라는 레시피를 보면서 ‘세상에 이런 지름길이 있었구나’ 싶어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브랜드는 단순히 구하기 쉽다는 장점 외에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며 심리적인 장벽을 허무는 데도 큰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말리부 오렌지Malibu orange라는 칵테일은 말리부라는 코코넛 술과 오렌지 주스를 섞어 만드는 간단한 칵테일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오렌지 주스 대신 쌕쌕 아이스바와 쌕쌕 주스를 사용한 말리부 쌕쌕을 소개합니다.
익숙한 상표 덕에 왠지 말리부 오렌지보다 말리부 쌕쌕을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저만의 착각일까요.
유서 깊은 칵테일바를 돌아다니며 얼음 상태 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피는 칵테일 고수라면 얼음과자를 갈아 넣는 레시피를 보며 “이런 건 진짜 칵테일이 아니야!”라고 외칠 법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야매’ 레시피로 홈술의 매력을 맛보는 것 또한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습니다.
책 곳곳에서 “더 맛있게, 재미있게, 예쁘게!”를 마치 올림픽 슬로건–더 빨리, 높이, 힘차게-처럼 외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유리잔에 얼음을 채우고 술을 붓게 됩니다.
칵테일이라고는 소맥만 말아먹던 사람이라면 이를 계기로 새로운 세계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술 한 병씩 사 모으다 보면 어느새 홈바를 차려놓을 정도로 푹 빠진, 훌륭한 칵테일 마니아 한 명이 탄생하는 거지요.
골목마다 카페가 들어서고, 와인과 칵테일이 인기인 요즘 홈바 만들기에 도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인테리어의 일환으로 홈바를 구축했다가 비싼 도구와 술에 먼지만 쌓이는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경우에 비하면
이렇게 손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입맛 닿는대로 한걸음씩 걷다가 정신 차려보니 어느 새 홈바가 눈 앞에 있더라...는 경험이 안전한 길이겠지요.
물론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다음에는 그럴 공간도 부족하기에, 이렇게 예전에 찍어뒀던 홈바 사진을 꺼내 자린고비가 굴비 보듯 하며 추억을 떠올리는 저같은 사람도 생기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