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화
준하가 처음 내게 결혼하자고 했던 날의 장소....낡고 평범하긴 하지만 음식 맛이 참 좋은 레스토랑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사람일 뿐이다. 적당히 와인을 마신 나는 지금
들뜬 기분이다. 준하가 선물한 목걸이가 너무 이뻐서 자꾸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나두, 별수 없는 속물인가봐. 이것 봐...보석에 약하잖아.
내 말에 준하가 피식 웃는다. 나는 준하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무척 고민했었다. 보석 디자인
을 하는 아는 선배에게 부탁해서 펜던트를 하나 만들었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디자인으로 말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흔하디 흔한 모양일 수도 있었다. 팬던트는 해바라기다.
노란 잎 중앙에 준하와 나의 이니셜을 딴 자수성이 박혀 있다. 너무 마음에 드는 건
앞이나 뒤가 같다는 것이다.
-맘에 드니?
-응, 맘에 들어.
-내가 왜 해바라기를 선택했는지 알어?...해바라기의 꽃말이 애모라고 하잖아. 한 사람을
위한 간절한 사랑...우리 서로에게 평생 그런 사람이길 바라는 내 마음이야.
-잊지 않을게.
-준하야....
-어.
-내게 있어, 널 만난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몰라. 사람들은 이 나이에 무슨 사랑이 남아
있겠냐구 하지만...난 달라. 지금까지 시간이 흘러도 넌, 내가 항상 사랑 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사람이야. 그래서 난, 행복해....준하야, 고마워. 그리구 많이, 많이
사랑해. 너만 볼거야...너만 사랑할거구.
***
작업실 청소를 하고 나니 벌써 어두워졌다. 창 너머의 어둠 속은 낯설다. 왠지
여기에 홀로 내던져진 기분이다.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박교수다. 망설이다 받는다.
-여보세요...
-여기...오지 않을래 당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나 지금 술 한 잔 하는데...당신이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지네....왜, 두려운가. 내가
술 마신다고 하니까, 당신...두려워하는 것 같군. 요즘 내가 좀...혼란스러워.
나 박찬영...서른 넷...이 나이 되도록 이런 감정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데...도대체
이게 뭐지?....심장이 불안해. 고장난 것 같아....당신이 내 안에 멋대로 들어오고
난 후부터 내가 숨을...쉴 수가 없어. 어이, 유지니씨...말 좀 해보시죠. 사랑이...
원래 이런 건가. 당신도 그랬어?
그는 조금 취한 것 같았다.
-당신, 날 어쩔거야...어쩔 셈이냐구....
그의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한동안 창밖을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불을 꺼져 있었고, 마당 앞에 서 있는
가로등이 켜져 있다. 발소리를 죽이며 들어가는데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본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늦었네요.
준하다. 피우던 담배를 끈다. 담배를 끊은 걸로 아는데 준하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낯설다.
-안 잤니?
-잠이 안와서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님 그냥 들어가야 하나 망설이는데 준하가 말한다.
-많이 추워졌죠.
-그러네...겨울이야 벌써.
-앉을래요?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준하 옆에 나란히 앉는다. 멀찌기 어둠 속에서 바람이 흔들린다.
서울에서 보는 별은 별이 아니다. 여긴 정말 별이 있다.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어, 먹었어.
-혼자서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한다.
-챙겨 먹고 다녀요.
-그래.
-선배...
-응.
-요즘...그런 생각을 해요. 만약 시간을 돌린다면...그래도 지금과는 별반 다르지 않을까.
새삼 내가 다시 이십대를 살아야 한다면 나의 삼십대는 달라질까...
-왜..그런 생각을 하게 됐니?
-모르겠어요.
준하의 옆모습을 본다. 어쩐지 쓸쓸하게 보인다.
-지금까지 살면서...단 한번도 머리로 움직인 적이 없었는데...요즘 아무래도 내가 고장났나 봐요.
도통 말을 듣지 않아요...제 멋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미치겠어요.
이 애가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오늘은 평소의 준하 같지 않다.
-멀쩡한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누가 나더러 그러대. 자기 심장이 고장난 것 같다구.
나도 그래, 나두 멀쩡한 게 아닌 것 같아.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제법 바람이 차다. 소름이 돋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앉아 있다가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올지 모를 일이다.
-안 들어 갈래?
-선배...
앉아 있는 준하의 머리를 바라본다.
-내가 좀 이상해요...선밸 보면....심장이 멈춰요.
***
사직서를 내고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몇 몇의 교수들이 송별식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잡고 놓아주지 않긴 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정교수의 소개로 중고차를 하나 구입했다. 낯선 길이 새로 많이 나서 그런지 가끔
방향 감각을 잃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잘 산 것 같다.
작업실은 이제 완벽하게 정리가 다 되었다. 때때로 잠을 잘 수 있게 쇼파 위에
담요를 깔아 놓고 간편한 취사는 할 수 있게 준비를 해두었다. 작업실 문을 따고
들어서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넌, 애가 왜 그러니?
엄마다. 다짜고짜 신경질부터 낸다.
-어쩜 전화 한통이 없냐구.
-엄마...
-내가 니 엄마이긴 하니? 어떻게 무심한 건 지 애비랑 똑같을까.
-잘못했어, 미안해요.
-잘못한 건 아니?....지금 어디야? 나, 지금 서울 와 있어.
-언제 들어왔어?
-내가 갈까, 아님 니가 올래?
-내가 갈게요.
00호텔로 차를 몰았다. 프런트에서 객실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단 한 번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던 사람이 무슨 일일까.
객실번호를 확인하고 벨을 누르자 문이 열린다. 가운 차림의 엄마가 서 있다.
-언제 들어왔어요?
-어제 왔어.
-무슨 일, 있어?
-큰집에서 너, 들어온 거 모르니?
-어, 그렇게 됐어...차차 알리려구..
-죽었대, 니네 아버지.
-네?
-전화 받고 출국 한거야. 너 여기 있는 거 모르는 눈치라 오늘 너랑 함께 출국하는 걸로
알고 있어. 내일이 출상이랜다.
아버지의 죽음을 태연하게 전하는 엄마를 본다. 나는 심하게 뒷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에 휩싸인다.
백 살까진 살다 가시겠다더니....
-네 앞으로 조금 유산을 남긴 모양이야. 죽기 전에 널 많이 찾았다고 그러더라....당체 너랑
연락이 되야 말이지. 딸년 전화번호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알아야겠니?
***
찻집앞 마당은 을씨년스러웠다. 이제 막 잎을 다 떨군 듯한 나무 가지가 하늘거리고
마당 한 켠에 있는 연못은 잉어 몇 마리가 헤엄쳐 다녔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탁자가 두어개 놓여 있고 거기에 앉아 차를 마시는 이영달이 어쩐지 풍경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안녕하십니까.
-아, 어서오게.
-어쩐일로 절 다 부르셨습니까.
-어쩐일이긴, 사람 만나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나.
국화차를 내게 한 잔 따르는 이영달을 본다.
-향이 참 좋아, 내가 즐겨 마시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인스턴트 식품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런 차의 맛을 모르지. 자네도 커피 많이 마시나?
-저도 아직 젊지 않습니까.
-한 순간일세, 젊다고 너무 자만하지 말게나.
국화차를 마셔 본다. 정말 국화향이 짙다. 향을 빼고 나면 맹숭맹숭할 것도 같다.
아직 차 맛의 깊이를 몰라서일까.
-자네는 전공이 뭔가?
-원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만둔지 2년정도 됐습니다.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그냥...뭐..
-먹고 살기엔 사치스러운 일이겠지. 그래서...사진은 아예 관둘 생각이고?
-언젠간 해야죠...그런데 선생님 작품은 언제 다시 볼 수 있는 건가요?
-글쎄...어디 그런 걸 정해 놓고 생각하나. 나는 약속 같은 건 함부로 안하네...살아보니
제 마음 먹은 것처럼 제대로 지켜지는 것이 무에 있던가?....사람들은 지키지도
못할 약속 같은 것을 만들어서 사는 걸 고달프게 만들어. 지 한몸 간수하지도 못하면서
말이지. 애초에 그런 게 누굴 위한 것이라고 보나 자넨?
***
-태연아 이모 왔다.
거실로 들어서며 태연을 찾았다. 태연이 보이지 않는다.
-태연인 어디 갔어?
-어, 시댁에 보냈어.
언니인 지은이 과일을 내온다.
-매일 바쁘다고만 하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니?
-태연이 보고 싶어서 왔지. 근데 오는 날이 장날이네.
-준하는 잘 있지?
-어, 아주 잘 있어.
-엄마가 해다준 약은 잘 먹구?
-꼬박꼬박 먹구 있어.
-엄마 정성을 봐서라두 효염이 있어야 되는데.
-올 겨울까지만 버텨볼 생각이야. 소식없음 인공수정이라도 하기로 했어.
-준하가 그러재?
-어, 근데 아래층에 사는 그 언닌, 안보인다 요새?
-어, 좀 그런 일이 있지.
-무슨 말이야?
-난리두 아니었다. 남편이 바람피다 걸렸잖니.
-정말?
-엉, 생긴 건 학자타입인데 영 노는게 지저분한가봐. 갈라서니 마니 그러더니 며칠 전에
짐 싸서 나가더라구.
-어머, 어떡하니.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끝장내는 거지.
-애들은 어떡하구?
-여자가 데리고 갔어. 나같으면 애구 뭐구 없다. 고생해봐야 마누라 소중한 것도 알지...
산 세월이 얼만데 순간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런 꼴을 당하냐...요즘 그것 때문에
니네 형부 죽을 맛이잖어.
-언닌..형부 그럴 사람 아니다.
-어떻게 믿냐? 백 년을 살아봐라. 그 속을 다 알 것 같니?....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평생 그 사람 속을 다 알지 못하는 거야. 준하는 안그럴 것 같지?..너 너무 준하, 준하
하지마. 준하도 어차피 남자야. 다를 것 같지?
-난, 준하 믿어. 그런 말도 안되는 의심 같은 거 안해.
-너, 준하가 아침에 무슨 생각을 하고, 저녁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어? 니네 부부,
마주 앉아서 하는 얘기가 뭐야? 단 한 번이래두 니 속 다 보이고, 준하 속 다 보인 적
있니? 그거 다 보여준대도 그게 다가 아냐. 너두 준하한테 말 못했던 거 있을 거구,
그럼 준하 역시 그런거야. 조금 더 살아봐라...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 감아주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인지. 말이 좋아 부부지..남보다 못한 게 부부야. 차라리 남한텐 내 치부라도
보이고, 하소연이라도 하지. 오히려 어찌보면 부부보다도 남들이 그 부부를 더 잘 알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