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화
항상 머리와 따로 움직이는 가슴이 문제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하루종일 어딘가를 헤매고 다닌 듯 하다. 그러니 그림은 제 멋대로일 수 밖에. 화가 나 들고 있던 붓을 던져버린다.
그때 문이 열리고 정교수가 들어온다. 흠칫 놀라는 정교수를 보고 조금 무안해진다.
-성질 별나다 증말.
-어쩐 일이에요?
-그냥 지나는 길에 들렀어.
쇼파에 앉으며 실내를 둘러 본다.
-여기서 숙박도 해?
-가끔요. 커피 어때요?
-아니, 됐어. 박교수가 맥주 사올거야.
-같이 왔어요?
-어, 자기 보고 싶으니까 괜히 나 꼬드겨서 여기 온거야. 어딜 가나 이놈의 덤 인생.
-다들 잘 계시죠?
-얼음판 걷는 기분이지 뭐. 감원설 나돌고난 후부터 서로 적이 됐어...시간강사들은 아예
목 내놓고 살잖어. 십 년, 적게는 오 년동안 가르치던 전공을 바꾸라는 건, 죽으란 말
아니니? 그냥 차라리 대놓구 죽어 주세요 그럼...낫겠다. 요즘 교육계 뿐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혼란스럽잖아. 누굴 탓하겠어, 없는 게 죄고, 못 배운게 죄지....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준하가 들어온다.
-손님이 계셨네요.
-어...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그 날 집에서 저녁을 함께한 후로 처음 보는 준하다. 준하가 종이가방을 내민다.
-이거, 하은이가 싸준거에요.
-뭔데?
받아 든다. 서로 머쓱한 분위기다. 정교수가 우릴 번갈아 본다.
-도시락요, 오늘도 못 들어오면 저녁에 먹으라고.
-수고스럽게...담부터 이런 거 하지 말라구 그래. 앉을래?
-아뇨, 담에 오죠.
-앉아요, 저도 방금 왔는데...그냥 가면 제가 더 미안해지잖아요.
정교수가 잡는다. 그때 문을 열고 박교수가 들어온다. 준하와 박교수의 표정이 굳어진다.
-앉아요, 다들. 왜 서서 난리들이야. 정신 사납게.
-아뇨,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준하가 인사를 하는데 이번엔 박교수가 잡는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서운하지...앉아, 해질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지만,
한 잔 하자구.
-둘이 아는 사이야?
정교수가 자리를 내어주며 묻는다.
-잘 알죠...앉으라구.
준하의 표정이 좋지 않다. 나는 괜히 두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하필이면 여기서
부딪히게 되었을까...나는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앉는다.
-어떻게 되는 사이야?
정교수가 캔맥주를 따며 내게 묻는다.
-대학..후배에요.
박교수가 나를 힐끔 쳐다본다. 괜시리 뭔가 들킨 것 같아 시선을 피한다. 이 자리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릴 수 밖에.
***
오랜만에 만나는 대학동창 유미의 모습은 여전했다. 무용을 전공한 유미는 작은 학원을
운영하다 파리만 날리더니 이름 꽤나 알려진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사는 것이 수월해졌다고 한다. 대개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자신의 전공과는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준하는 잘 있지?
-어, 여전하지 뭐.
-지니선배 들어왔단 얘기 들었다. 근데 좀 서운하다, 연락 한 번 없다.
-요즘 좀 바뻐. 작업한다구, 나도 통 못 보고 살어.
-참, 유별나지. 대학때부터 보통 사이였니? 인연도 참 질기다. 선배, 아직 미혼이지?
-어, 좋은 사람 만나야 할텐데 걱정이야. 꼭 내가 엄마된 기분 들어...어딜 내놔두 걱정
되는 거 보믄.
-난, 솔직히 그 선배 좀 의심스러워.
-뭐가?
-그렇잖아, 준하가 유독 잘 따른데다 선배도 준하 많이 이뻐했었잖니.
-그래서 뭐?
-내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대학 때 보면 꼭 니가 그 둘 사이에 낀 사람처럼 좀 그랬어.
혁이 선배, 사고로 죽었을 때 말 많았잖아. 그 많은 남자들 다 쳐다 보지 않았던 것두
좀 이상하구. 그 나이에 연애 한 번 안했다는 건 분명히 딴 이유가 있대니까.
-너 좀 말이 심하다? 그래서 선배가 우리 준하를 맘에 두고 있단 말야 뭐야?
-아니..내 말은..
-너 때문에 나 지금 기분 무지 나빠지려 그런다. 그만해...다른 사람은 몰라두 지니선배를
그런식으로 말하는 사람, 나 싫어.
-알았어, 그만할게. 미안해, 됐지?
-이미 기분 다 망쳤어 얘.
-기분 풀어, 미안해. 미안하다구. 내가 실언을 했어. 잊자...어? 잊어.
대학 때 잠깐 그런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다. 준하가 다른 사람보다도 유독 지니선배를
잘 챙겨준 것은 사실이다. 가끔 나도 모르게 묘한 질투심 같은 것이 생기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의 일이다. 그런 걸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유미의 말을 듣고
난 뒤 기분이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
택시를 잡아 주겠다며 정교수와 지니가 나갔다. 나는 서준하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내게 드러내고 있었다.
-내 말이 맞았지?
내 말에 그가 힐끔 본다. 그리곤 맥주를 마신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니와 나 사이,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어. 물론...그때의 일은
지금도 반성하고 있어.
그래서 어쩔 셈이냐는 듯 쳐다본다.
-나, 유지니씨 많이 사랑해. 결혼도 하고 싶어....할 수 있다면 말야. 그래서 평생 그녀만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
-당장 내일도 모르는데...그런식으로 단정하지 말아요.
그의 말에 웃음이 난다.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내가 가지고 싶은 건 어떻게든 가지고 말지....누구처럼
나중에 후회하는 일 따윈 안 만들어.
그가 나를 노려본다.
-지니선배...여린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물건 취급하듯 말하지 말아요.
-유지니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해?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에요.
-내가 묻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서준하씨...난, 말야. 자신감이 생겼어. 상대가 생각보다
훨씬 불리한 입장이더라구.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어? 나는...다 버릴 수 있어. 그럴 수 없다면 애시당초 맘에도
두지 말고 살아.
나는 지금 도박을 하는 셈이다. 내가 여기서 나가고 나면 그가 평생 나와 적이 되느냐
아니냐에 관심을 둔다.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는 동안 그는 말이 없다.
-넌, 버릴 수 없어. 난 그걸 알아...다음에 또 보자구.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지니가 들어온다.
-다음에 올 땐 당신한테 근사한 선물을 하나 가지고 올게.
***
빈 캔이 여기저기 굴러 다닌다. 나는 그것들을 모아 봉투에 담는다. 준하는 그러는 동안에도
말이 없다. 조금 취한 것 같기도 하다.
-준하야...
불러도 말이 없다. 남아 있던 맥주 하나마저 따서 마신다. 준하 앞에 와 앉는다.
-취한 것 같은데...그만 마셔.
-나 좀....혼내줘요.
준하가 고개를 꺽는다. 마음이 좋지 않다.
-내가...내가 이렇게 미워본 적이 없어요. 화가 나서...견딜 수가 없어요.
-준하야...
-왜....돌아왔어요? 차라리...오지 말일이지...왜 왔어요?
마음이 언잖아진다.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창피하고...너무 마음이 좋지 않다. 준하가 내 팔을 잡는다.
-아니에요...그냥...그냥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준하를 바라본다. 너를 어찌하면 좋겠니...
-명치 끝에...뭔가 꽉 걸린 느낌이에요...아파요...너무 아파서 잠도 오지 않아요.
왜 하필...박교수에요, 차라리 다른 사람 만나요...왜, 박교수에요. 화도 안나요?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그런거잖니.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사랑한다는 말로 뭐든지 용서가 되는 건 아닌데....
-박교수를 사랑해요?...아니잖아요. 아주 조금이라도...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요 제발.
-이 나이에...다시 누굴 사랑한다는게 말처럼 쉬운게 아냐. 사랑 없이도...결혼은 해.
그냥저냥 살아져....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게 아냐.
-차라리 선배를 볼 수 없었음....좋겠어요....
쇼파에 털석 쓰러진다. 많이 취한 모양이다. 그래, 나도 널....볼 수 없었음 좋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준하야...
흔들어 본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은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내 것이 아니다. 준하의 윗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하은이다. 받아야할까
망설인다. 망설이는 동안 벨이 끊어진다. 준하의 윗옷을 벗기고 담요를 덮어준다.
그의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 본다. 오늘이 마지막이다...오늘만 너를 볼게....다음부턴
우리...절대 만나지도 말자....준하야...사랑한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너를...너를...어떻게 잊겠니.
***
눈을 떴을 땐 아직 어둠 속이었다. 여기가 어디지..깨질듯한 머리 탓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정신을 차린다. 갈증이 난다. 지니선배의 작업실이라는 걸 이제야 확인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찾아 마신다. 그리고 휘 둘러본다. 선배는 보이지 않는다. 이 시간에 어딜
갔을까...그리고 이제야 하은이 떠오른다. 시계를 본다. 새벽 4시다.
서둘러 윗옷을 걸쳐 입고 나간다.
***
집에 도착했을 땐 새벽 4시 3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하은이 쇼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하은을 내려다 본다...마음이 아프다. 너무 미안해서...
정말 미안해서....하은의 머리칼을 쓸어 준다. 눈물이 난다. 참으려 입술을 깨문다. 하은이
놀라 눈을 뜬다.
-언제 왔어?
-어, 조금 전에...왜 여기서 이러고 자. 감기 들면 어쩌려구...
-깜박 졸았나봐...근데, 너 어디 갔다 이제 오니? 휴대폰은 왜 꺼져 있구?
그때서야 안주머니를 뒤진다. 휴대폰이 없다.
-두고 왔나봐...사무실에.
-담부터 전화없이 이렇게 늦으면 나, 화낸다.
-그래..알았어.
하은을 안는다. 하은일 생각해서라도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너무 미안하다.
-미안해....정말 미안해...
-괜찮어..한 번은 봐줄게.
-그래도...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