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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에 있어서

정통과 다양성 |2009.01.22 17:30
조회 512 |추천 0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꼭 로만가톨릭(거기서 파생된 개신교도 마찬가지)의 입장이 전부는 아닌 듯.

 

어떤 주장이 이단이냐 아니냐를 판명할때 그리스도교를 확립한 이들, 즉 전통적으로 교부들의 교서와 가르침이 기준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로만가톨릭에서 수호를 하고 있으며 거기에 따른 판단도 로만가톨릭측에서 하고 있다.

 

물론 정교회측에서도 이에 대한 가르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단적용은 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여러가지 이단설을 포함한 다양한 입장들이 있어왔다. 로만가톨릭교회는 만인사제설을 표방하는 프로테스탄트교회들과는 달리 사적인 해석을 금지하며 교부들의 교서나 가르침에 따라 엄밀하게 판단하고 입장표명을 하는 가톨릭교회만이 완전한 교회라고 주장을 한다.

 

비주류에서 그리스도교를 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왔으며 그 가르침은 16세기부터 만인사제설을 펼치며 전통교회와는 다른 해석을 하기 시작한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이 등장하면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기본적으로 아리우스주의를 표방하며 삼위일체교리를 부정하고 있다

 

아리우스주의(Arianism)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사제 아리우스가 처음 주장한 그리스도교 이단설. 그는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내세운 기본전제는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느님의 유일성이었다. 반면에 성자(聖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신성은 유일한 것이어서 나누거나 전가할 수 없으며 신성은 불변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타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자는 하느님일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자는 무(無)로부터 존재하게 되었으며, '시작'이 있는 피조물로 본다. 게다가 성자는 유한하고 존재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성부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아리우스 주의를 반박한 사람들 특히 주교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고 성자에 대한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다신론(polytheism)을 다시 도입했으며, 참된 하느님인 성자만이 사람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그리스도의 구속 개념을 훼손했다고 논박했다.

 이 논쟁은 니케아 공의회(325)가 아리우스와 그의 교리를 정죄하고,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조를 공포함으로써 끝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신조는 성자가 '성부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homoousion to Patri)라고 진술하며, 이로써 성자가 성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완전한 신이라고 공포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아주 긴 논쟁의 시작일 뿐이었다. 325년부터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337년까지 니케아 공의회 이후 축출되었던 아리우스주의 지도자들이 음모를 꾸며 과거에 일했던 교회와 교구로 돌아와 그들의 적들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성공했다. 337-350년 정통 그리스도교도들에게 호의적이던 콘스탄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고,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공의회(341)는 호모우시온(homoousion)을 삭제한 신앙진술을 공포했다. 342년에 사르디카(지금의 소피아)에서 또 다른 공의회가 열렸지만, 두 공의회는 소득없이 끝났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제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자 그의 지배 하에 니케아파(정통 그리스도교도들)는 널리 박해를 받았다. 그때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anomoios)고 선언했다. 이 '아노모이오스'주의자들은 357년 시르미움에서 자기들의 견해를 승인받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극단적인 주장은 성자가 성부와 '비슷한 본질'(homoiousios)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온건론자들을 자극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처음에는 이 '호모이우시오스'주의자들을 지지했으나 곧 입장을 바꾸어 성자가 성부와 '같다'(homoios)고 주장한 아카키우스가 이끄는 '호모이오스'주의자들을 지지했다. 36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그들의 입장을 승인하여 기존의 모든 신조를 배척했고, '우시아'(ousia : 본질 또는 물질)라는 용어를 거부했으며, 성자는 '그를 낳은 성부와 같다'고 하는 신앙 진술을 공포했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은(361) 후 서로마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정통 그리스도교는 그 입장을 강화했다. 동로마(아리우스파) 황제 발렌스(364-378 재위)가 정통파 그리스도교들을 박해했지만 카이사리아의 바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이 널리 퍼진 뒤에 동로마에서 다스를 차지하고 있던 호모이우시오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니케아파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라티아누스(367-383 재위)와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 재위) 같은 황제들이 정통파 견해를 옹호하자 아리우스주의는 무너지고 말았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주의를 금지했고 니케아 신조를 승인했다. 이로써 제국 안에서 이단설은 뿌리뽑혔지만, 아리우스주의는 7세기 말까지 일부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계속 존속했다. 오늘날에도 일부 유니테리언파가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으로 전락시키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그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아리우스주의자들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그리스도론도 아리우스주의의 한 형태이다. 그들은 아리우스를 '여호와의 증인' 운동을 시작한 찰스 타즈 러셀의 선구자로 여긴다.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s)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도적 교회 회의)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한 뒤,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생겨난 그리스도교 소종파.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독립성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느슨하게 결합된 2개의 인격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는 '동방의 교회' 또는 '페르시아 교회'가 대표적인 네스토리우스 교회이며, 서양에서는 흔히 이들을 아시리아교도, 또는 네스토리우스교도라고 부른다. 오늘날 약 17만 명에 이르는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대부분 이라크, 시리아 및 이란에 살고 있다.

 페르시아 교회가 424년에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교 교파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여, 외국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에서 벗어날 때까지 페르시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왔다. 페르시아 교회는 니시비스의 수도대주교 바르수마스의 영향을 받아, 486년 2월에 네스토리우스파 신학의 주요권위자인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를 올바른 신앙의 수호자로 인정했다. 바바이 총대주교(497-502)는 이것을 재확인했고, 그때부터 페르시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 교파가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성모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신을 낳은 사람')라는 칭호를 붙이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을 손상시키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칭호 사용을 비난했기 때문에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파문당했다.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에데사 신학교에 모이자, 황제는 489년에 그 신학교를 폐쇄했고, 남아 있던 열렬한 네스토리우스 신봉자들은 페르시아로 옮겨갔다.

 그 뒤 에데사의 유서 깊은 전통을 이어받은 니시비스의 새 학교가 페르시아 교회의 지적 중심지가 되었다. 5세기말에 이르러서 페르시아에는 7개의 대주교 관구가 생겼고, 아라비아와 인도에도 여러 개의 주교 관구가 설치되었다. 페르시아 교회는 분열(521경-537/539경)과 박해(540-545)의 시기를,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한 마르 아바 1세 총대주교(540-552 재임)의 지도와 니시비스 근처 이잘라 산에 수도원을 세운 카슈미르의 아브라함(501-586)이 일으킨 수도원 부흥을 통하여 잘 견뎌냈다.

 637년에 아랍인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아랍의 통치자인 칼리프들은 동방의 교회를 밀레트, 즉 독립된 종교 단체로 인정하고 법적으로 보호해 주었다. 네스토리우스파 학자들은 아랍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총대주교는 때로 통치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약 3세기 동안 페르시아 교회는 칼리프의 보호를 받으며 번영을 누렸지만, 차츰 세속에 물들면서 문화적인 면에서도 지도력을 잃어버렸다.

 10세기 말에는 칼리프가 지배하는 지역에 15개의 수도 대주교 관구가 있었고,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도 5개의 대주교 관구가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이집트까지 퍼졌다. 그곳의 그리스도교파는 단성론자(單性論者)들로서 그리스도의 1가지 본성만을 인정했다. 중국에서는 7-10세기 당(唐)나라 때 경교(景敎)·파사사(波斯寺)·대진사(大秦寺)라는 이름으로 네스토리우스 교단이 번창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일부 타타르 부족이 거의 완전히 개종하여 그리스도교는 시베리아 동부의 바이칼호 근처까지 퍼졌다. 몽골 영토를 여행한 서양인들은 그곳에 있는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성직자들이 무식하고 미신적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상당히 많고, 심지어 황제의 궁전에도 있는 것을 발견했다. 13세기 후반까지 페르시아 등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크게 융성하였는데, 14세기의 몽골의 지도자 티무르 칸이 지배하면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동방의 교회가 사실상 전멸하자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특히 티그리스 강과 반 호 및 우르미아 호 사이의 쿠르디스탄 지역 몇몇 마을에 남아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일부는 터키와 페르시아로 들어가기도 했다.

 일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1551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결합하여 칼데아교도라고 하게 되었고, 원래의 네스토리우스교도는 아시리아교도라고 했다. 토마의 그리스도교로 알려진 일부 인도의 네스토리우스교파는 1599년에 로마 가톨릭과 합쳤다가 다시 분열했고, 이들의 절반은 시리아 야코부스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단성론자)에게 충성을 바쳤다(1653). 1898년이란의 우르미아에서는 한 주교가 이끄는 일단의 네스토리우스교도가 러시아 정교회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던 일부 신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를 배반하였다는 이유로 많은 희생을 당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

 

  451년의 칼케돈 종교회의 후에 동방교회(팔레스타인, 안티오키아, 이집트)에서 생겨난 그리스도론의 한 유형이다. 니케아 공의회(325) 및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 교의(敎義)가 확립된 후에도, 그리스도는 그 본질에 있어 무엇인가를 놓고 논쟁이 계속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단성설은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등,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리고 에페수스(에페소) 공의회(451)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설(說)이 배척된 뒤, 에우티케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신 완전성을 강조하는 이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후에 단 하나의 성품을 가졌으며, 그 성품은 신성이었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이러한 단성설을 부정하고, 성육신의 그리스도는 신인양성 일인격(神人兩性一人格)이라는 양성설(兩性說)을 교의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단성론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칼케톤 공의회 이후 칼케톤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자가 주교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에서도 단성론자들이 주교자리에 올랐다.

 특히 이집트나 시리아 지역에는 단성론을 지지하는 커다란 세력들이 있었다. 칼케돈 회의의 결과를 정통으로 주장하는 동로마제국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이집트나 시리아 지역은 종종 신앙의 독자 노선을 추구했다. 이들은 정치적 독립을 꾀하여 페르시아 등과 연대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힘이 약해진 동로마제국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단성론자들 편에서 보면, 그들은 전통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아왔고, 따라서 제국 정부를 위해서 충성할 이유가 없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제국의 안전을 위해서 이들을 묶어 둘 수 있는 교리상의 타협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527-565 재위)는 반칼케톤·친단성론으로 제국정책을 선회했다.

 그는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5차 공의회를 열어 교리적으로 양보함으로 단성론자들을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오히려 칼케톤 신조를 그대로 인정해버려 오히려 단성론자들의 반발만을 사고 말았다. 다른 한편 이런 시도는 로마교회와 커다란 마찰을 가져왔고, 동·서방 교회의 결렬에 대한 내적인 신학적 이유를 제공해 주고 말았다.

 본성도 하나일 뿐만 아니라, 의지도 하나라고 보는 극단적인 단성론자들은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나 그의 의지나 행위 모든 것은 한 가지 관점으로 본다.

하지만 로마교회뿐 아니라 동로마 제국에서도 광범위한 반대가 있었고 많은 지역에서 지역 종교회의를 통해서 단일의지론을 정죄하는 결론을 내어놓았다. 즉, 니케아의 결정에 준해서 신성과 인성 모두를 인정하고, 의지 역시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로 나누는 것을 정통으로 가결했던 것이다. 특히 호노리우스 이후의 로마 교황들은 이 교리에 대해서 반대를 분명히 했다.

 단성론 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고, 또한 동서 제국의 분리와, 로마 주교(교황)와, 다른 주교들 사이의 갈등 등의 원인으로 더욱더 복잡해 졌다. 단성론은 680-681년에 열린 제6차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마침내 정죄되었으나, 그 신앙은 콥트 교회(Coptic church), 야곱파 교회(Jacobite), 또한 어떤 의미에서 아르메니아 교회(Armenian)를 통해 계속 살아 있었다.

 

 단성론자(單性論者, Monophysite)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두 본성, 곧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있다는 교리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의 본성만 존재한다고 가르친 사람 또는 가르침으로써 비난을 받은 사람.

 4~6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교리에 몇 가지 상이한 전통이 생겨났다. 칼케돈 공의회(451)는 그리스도가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으로 인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교리를 받아들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나뉘어 존재하므로 실상 그리스도는 두 인격이라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 교리를 반대한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신학적으로 단순한 수사 유티케스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 유티케스는 448년에 그리스도는 성육신한 후 단 하나의 본성만 가졌으며, 따라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인성은 일반사람의 인간성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가르친 혐의로 정죄받았다. 신학뿐만 아니라 정치와 교회세력 간의 대립관계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디오스코루스(454 죽음)를 파면시킨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에 한몫을 했고, 그를 지지하며 그의 가르침이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루스의 정통교리와 일치한다고 주장한 교회에게는 단성론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스도 단성론자라는 이름은 다양한 신학자들과 집단들에 붙여졌는데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538 죽음)는 이 용어가 자기 모순을 안고 있다고 거부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디오스코루스와 세베루스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보통사람의 인간성이 본질적으로 같은 실체라는 점을 부인했다는 점에서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친밀하게 연합되어 있음을 더 강조했다는 점에서 정통교리를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근대에 와서는 단성론자로 분류되던 대부분 교회들(콥트 교회, 시리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인성론을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정교회, 개신교 교회들이 기본적으로 정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스도 단의설(Monothelitism)

 

  칼케돈공의회(451)에서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이 이단(異端)으로 단죄된 뒤에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 이 사람들을 교회로 복귀시키기 위해 칼케돈 결정을 재해석(再解釋)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 하나가 7세기 초엽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세르기우스(1세)에 의한 것이다. 당시의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세르기우스에게 명하여 638년 《에크테시스Ekthesis》(칙령)를 초안하게 하여 그리스도 단의설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 단의설은 제3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680-81)에서 부정되고, 그리스도 양성설(兩性說)의 당연한 귀결로서 그리스도 양의설(兩意說)이 인정되었다.


 
단의론자(단의론자, Monothelite)

 

 정통교리와는 달리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의 의지만 가졌다고 주장했던 7세기의 몇몇 그리스도교인. 이들은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신성과 인성 두 본질이 있다는 확고하게 설정된 교리를 기반으로 그리스도 인격의 통일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했다.

 이 논쟁은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그리스도는 오직 한 본성만 갖고 있다고 가르쳐 파문을 당하고 박해를 당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단성론자들, 혹은 유티케스 추종자(Eutychians)들을 교회와 제국으로 다시 불러오려고 한 데서 시작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622년 아르메니아에서 세베루스파 단성론자들의 지도자에게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 두 본질은 한 인격 안에 뚜렷이 구분되어 있지만, 하나의 의지(thelema)와 하나의 작용(energeia)만 갖고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세르기우스는 이 교리를 강력히 지지하였고, 이 문제에 관한 황제의 고문 역할을 했다. 638년에 헤라클리우스는 《신앙에 관한 진술 Ekthesis》을 발표했고, 이로써 그의 입장을 공식화하였다. 이 책은 매우 격렬하고 광범위한 논쟁을 유발했고, 결국 헤라클리우스의 계승자 콘스탄스 2세는 648년 이 문제에 관한 논의룰 전면 금지시키는 칙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64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서방교회의 하의가 있었지만 이 칙령은 논란을 잠재웠다.

 668년 콘스탄티누스 4세가 황제가 되었을 때 이 논쟁이 다시 일어났고, 680년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총회를 소집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로마에서는 아가토 교황의 주도로 주교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아가토 교황은 하나의 본성에는 반드시 하나의 의지가 있으며 따라서 두 본성에는 두 의지가 있다. 인간의 의지는 다만 전능한 하느님의 의지에 일치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 뿐이라고 하였다. 콘스탄티노플 3차 공의회는 단의론을 정죄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에는 두 의지와 두 작용이 있음을 주장했다.

 

파울리키우파(바울로파, Paulicians)

 

 마르키온파 및 마니교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현세를 지배하는 악신(惡神)과 앞으로 다가올 선신(善神)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원론(二元論)을 교지(敎旨)로 하며, 창도자는 콘스탄티누스 시르와누스라고 전한다. 이들은 성서(聖書)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나 구약성서 및 <베드로의 편지>을 거부했다. 또한 물·빵·포도주·기름 등으로 행하는 전례적(典禮的) 효과나 지상의 교회, 교직의 위계(位階)를 부정하였다. 이 파는 당초 비잔티움 제국 내에 정치적·군사적 반란을 일으켰으며, 콘스탄티누스 3세, 유스티니아누스 2세 등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9세기 후반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여 그리스·소아시아에서 흥성했으나 872년 바실리우스 1세의 원정대에게 제국(帝國) 주변으로 추방당했고, 일부는 대(對)불가리아 국경 경비원으로 배치되었다. 이 파의 교설(敎說)은 10세기 초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보고밀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보고밀파(Bogomiles)

 

  10-15세기에 발칸 제국에서 융성했던 이원론적인 종파. 이 종파는 특히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의 한 종파인 바울로파(파울리키우파)로부터 받아들인 이원론적인 신(新)마니교 교리와, 불가리아 정교회를 복음적인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지역적인 슬라브 민족의 운동이 혼합되어 10세기 중반에 불가리아에서 생겨났다. 보고필파라는 이름은 이 종파의 창시자인  보고밀(그리스 명은 테오필로스) 사제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그밀파라고도 한다. 이원론적인 우주관에 기초를 둔 보고밀파의 중심교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를 마귀가 만든 것이라고 보아 성육신을 부정하고 물질을 은혜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을 거부했다. 또한 세례, 성만찬, 정교회 조직 전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물질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다. 보고밀파의 도덕적 가르침 역시 이원론적이어서 그들은 인간의 기능중 인간을 물질과 접촉하게 하는 것, 특히 결혼·육식·음주를 정죄하였고, 철저하고 엄격한 금욕 생활을 지킴으로써 '완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고밀파를 가장 맹렬하게 반대했던 사람들도 그들의 윤리적인 금욕생활이 철저했음은 예외 없이 인정했다. 11, 12세기에 보고밀파는 비잔티움 제국에 속한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서방교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 널리 퍼져 가난한 농부들과 직공들, 심지어 귀족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일으키며 가타리파(카타리파)로 이름을 떨쳤으나 로마 교회의 지속적인 탄압과 도미니크회·프란체스코회 등의 출현으로 13세기 말 거의 소멸하였다. 보고밀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장했으나, 1100년 경 그 도시의 저명한 보고밀파 신자들이 재판에 회부되고 감옥에 갇혔으며, 그들의 지도자 바실은 공개화형에 처해졌다. 12세기 후반에 보고밀파가 서쪽으로 전파되자 세르비아의 통치자 스테판 네마냐는 보고밀파의 확산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 총회를 소집해야만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보고밀파가 보스니아로 뻗어갔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보고밀파는 다소 변형되어 파타리아 신앙 또는 보스니아 신앙으로 알려졌는데, 보스니아의 통치자들과 귀족들은 이 신앙을 기꺼이 받아들여 국가적 운동으로 전개했고, 1150년경부터 프랑스·이탈리아의 카타리파 또는 알비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3세기 초까지 남부 유럽의 이원론적 공동체들은 흑해에서 대서양 연안까지 하나의 연대조직을 형성했다. 이 종파가 탄생했던 나라인 불가리아에서 보고밀파는 14세기  말까지 강력한 힘을 유지했다. 그러나 불가리아 당국이 수 차례의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보고밀파의 교리를 정죄했다. 오스만 제국이 남동부 유럽을 정복한 후에 많은 보고밀파교도(특히 보스니아에 있는 신도)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발칸 지방의 민간신앙에 흡수되면서 보고밀파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발칸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이 종파운동은 지금은 남부 슬라브족의 민간전승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흩어져 있는 기이하게 조각된 묘비에서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헤시카즘(Hesychasm)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신을 명상함으로써 거룩한 고요함(그리스어로는 Hesychia)을 추구하는 수도 생활의 한 유형. 인간이 영혼·정신·신체 등 전인적으로 몰입하는 이 기도는 '순수한' 기도, '지적인' 기도, 또는 예수의 기도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헤시카즘의 뛰어나 저술가들 중 한 사람인 성 요한네스 클리마쿠스는 "호흡할 때마다 예수를 기억하라. 당신은 헤시키아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13세기말에 헤시카즘 수사인 성 니세포루스는 훨씬 자세한 '기도방법'을 만들어내어 보다 완전한 집중력을 기르고 '호흡에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 중에 눈을 '신체의 중앙'에 고정시키라고 초심자들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14세기 전반에 이 방법은 칼라브리아 사람 바르람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그는 헤시카즘 수사들을 '옴팔로프시코이'(배꼽에 영혼을 가진 사람들)라고 불렀다. 아토스산의 수사이자 후에 테살로니카 대주교가 된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1296-1359)는 헤시카즘 수사들을 옹호했다. 그에 따르면, 교회의 성례전으로 성화된 인간의 몸은 기도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인간의 눈은 그리스도가 변모된 바로 그 날 타보르산에 나타난 적이 있는, 창조되지 않은 빛을 볼 수 있다.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일련의 교회 회의(1341, 1347, 1351)에서 팔라마스의 가르침들을 확증했다. 오늘날에도 동방 그리스도교도들은 헤시카즘의 영성훈련을 받으며, 1782년 《필로칼리아 Philokalia》라는 헤시카즘 총서가 발간되면서 헤시카즘이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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