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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녀의 후회 각색한 소설

0000 |2025.03.07 12:54
조회 3,821 |추천 1

 


지수는 차곡차곡 쌓여 있던 서랍 깊숙한 곳에서 결혼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결혼식 당일, 그녀와 현우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사진 속 중앙에 서 있었다. 하얀 웨딩드레스와 깔끔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두 사람의 얼굴에는 행복과 설렘이 서려 있었다. 사진 구석에 적힌 날짜는 십 년도 전에 멈춰 있었다. 손끝으로 사진의 프레임을 따라 쓰다듬었다. 차갑던 유리 표면이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 열기로 서서히 닿기 시작했다.

 

그렇게 참았던 눈물이 또 다시 솟구쳤다. 목에서는 한숨과 눈물이 뒤섞인 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지수는 그 사진을 들고 침대에 앉았다. "끝났구나" 입 밖으로 나오는 자신의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그것이 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말로 뱉지 않으면 여전히 이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이미 서류상으로는 부부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 어디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현우의 존재가 붙들려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된 걸까?” 지수는 조용히 작은 소리를 냈다.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이 왜 이렇게 끝나버렸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떠올리려 했지만, 기억은 파편처럼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싸웠던 날들의 장면, 항상 차가운 얼굴로 변해버린 현우, 아이의 웃음소리조차 무겁게 내려앉던 집안 분위기… 그리고 마침내 서로를 바라보지 않게 된 날들…

 

'결혼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유리창으로 만든 집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작은 금이 하나 생기면 보이지 않았던 듯 넘기다가, 결국 어느 날 모든 창문이 산산조각 나는 그 집처럼.

 

그녀는 현우가 떠난 후의 아파트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떠올렸다. 현우의 물건들은 거의 다 남아 있는 상태로 떠났다. 남겨진 옷장 속 옷, 아직도 그의 냄새가 묻어나는 담요. 하지만 그 물건들은 어딘가 기능을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더 이상 함께 쓸 수도, 함께 살 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수는 그것들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아이러니하게 이미 다른 의미조차 없어진 상태였다.

 

특히 현우의 빈 자리가 가장 선명했던 순간은, 저녁이거나 새벽이었다. 낮에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일을 하며 몸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어두워질수록 그녀의 시간에서 공허함이 더 빨리, 깊게 찾아왔다. 밤이면 지수는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초점 없이 벽을 바라보곤 했다. 조용한 집, 아무도 없는 식탁, 그리고 그녀 몸에서 떨어지는 불투명한 냄새까지. 그것들은 현우가 있을 때에는 결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혼자가 되는 일이 이렇게 무거운 거였나…” 아직도 그녀는 깨닫는 중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는 결혼 앨범을 천천히 덮고, 주변을 둘러봤다. 침대 머리맡은 건조하게 쌓인 먼지, 찬장 구석에 놓여있던 두 잔의 커피 머그…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도 그녀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잠시 현우의 마지막 말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 더는 안 되겠어. 서로 너무 많이 상처 줬잖아". 그는 차갑게, 마치 혼자 긴 시간을 고민하고 끝낸 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뒤 방을 나섰다. 지수의 머릿속에 남은 기억은 그가 문을 닫으며 한번도 돌아보지 않던 뒷모습뿐이었다.

 

그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계속해서 멈춰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창밖으로는 깊은 밤 안에 뒤엉킨 네온사인이 번쩍거렸고, 고요한 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창문에 머리를 기댄 그녀는 바깥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다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말… 이게 끝인가?”

 

그 질문은 공허한 마음 속에서 나오지 않은 후회였고, 다가올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네, 이 카드로 결제하겠습니다".

 

지수는 계산대를 바라보며 쌀과 라면이 담긴 자그마한 장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과거에는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고 물건을 대충 담곤 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마음에 드는 옷을 살 때도, 아이들 장난감을 살 때도, 남편 현우와 함께 슈퍼마켓을 돌 때도 이리저리 따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장바구니는 더 작아졌고, 종류도 단출했다. 지수는 점점 가격표부터 확인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전에는 세일이나 1+1이라는 문구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그녀였다.

 

“죄송합니다. 이 카드가 사용이 불가능하시네요".

 

계산대 직원의 목소리에 지수는 얼어붙은 듯 멍하게 카드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대부분의 생활비를 해결하는 통장이 연결된 카드였다. 당황한 손길로 지수는 지갑을 열어 다른 카드를 꺼내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 그녀의 머릿속에는 숫자들만 떠다녔다. 가계부, 수입, 지출, 그리고 통장의 잔액…

 

“이 카드면 될 겁니다,” 그녀는 간신히 말을 꺼냈다.

 

결국 결제는 겨우 완료되었지만, 지수는 자신이 물건을 들고 걸어나오는 내내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마음 한켠에 깊은 부끄러움과 혼란이 자리잡았다.

 

길거리에 들어서자 장바구니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쌀 몇 킬로그램과 라면 몇 봉지만 담았을 뿐이었지만, 지수는 그것을 드는 일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몰랐던 삶의 '무게'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던 현우의 급여는 일정하게 쌓인 벽돌로 지은 집처럼 그녀를 안정감 속에 살게 했다. 하지만 그 벽돌이 하나 둘씩 빠져나간 지금, 모든 책임은 지수 혼자 감당해야 했다.

 

“월세도 밀렸지…”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기료와 가스비 고지서가 쌓였던 그녀의 책상 위는 이미 수많은 숫자로 뒤덮여 있었다. 매달 새로운 고지서가 날아올 때마다 그녀는 그것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위축되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그녀 스스로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사치스러운 카페라떼를 내려놓았고, 다음번에는 아마 아이의 학원비를 두고 고민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었는데…”

 

결혼 생활이 조금씩 틀어질 때 그녀는 다시 다잡으면 괜찮아질 것이라 믿었다. 현우와 말다툼이 잦아지고, 각자 집에 들어와도 서로 외면하기 일쑤였던 시간에도 그녀는 그저 이렇게 사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정리될 문제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이혼은 결코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여정이 아니었다. 그저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이미 모든 것이 날카롭게 깨져버렸고,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 삶은 자신이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한가운데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오자 텅 빈 집안의 고요함이 그녀를 반겼다. 아홉 살 딸 예린은 학교 수업 후 학원에 있었고, 집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낮 시간의 외로운 적막감은 언제나 지수를 괴롭혔다. 아이는 어른보다 어쩌면 더 쉽게 현실에 적응할지 몰랐다. 예린은 처음엔 엄마 아빠가 더 함께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시간을 두고 울고 화냈지만, 요즘은 그냥 고요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수는 그 차분함이 더 그녀를 힘들게 했다.

 

가스렌지 위에는 남아있는 찌개 냄비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며칠 전의 식사에서부터 남아있던 것으로, 한 번도 다시 데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냄비를 들어 싱크대에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나날이 지수는 자신이 점점 지워져가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세상을 헤쳐나가던 삶의 동반자가 사라진 지금,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공간은 오래된 배처럼 느껴졌다. 작은 구멍 하나로 시작된 틈새는 결국 배 전체를 빠르게 가라앉게 했다. 그녀는 그 배를 떠나온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가라앉는 배 안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밤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저녁 준비를 하려 식탁 위에서 재료들을 꺼내다 말고, 지수는 한숨을 내쉬며 도마 위에 손을 얹었다. 예린이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물어볼 질문이 생각난 것이다.

 

“엄마, 아빠는 이번 주엔 집에 올까?”

 

그럴 때마다 지수는 “아빠는 바쁘잖니. 나중에 보자".라고 둘러대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예린의 밝은 눈빛 속에서 숨겨진 나쁜 감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빠를 그리워하면서도, 더는 기대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수의 어깨를 더 무겁게 했다. 그녀는 혼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앞으로 예린에게 어떤 가정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을 알려준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니었을까? 한 조각으로 쪼개져버린 집의 잔해를, 그녀와 예린 둘만이 붙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수는 식탁 앞에 앉아 겨우 한마디를 속으로 내뱉었다.

 

“다시 조각을 맞출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답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아홉 살 딸 예린은 방 안에서 인형을 한 팔로 안고 있었다. 인형의 이름은 루루였다. 낡은 털이 슬슬 빠지기 시작한 루루는 예린이 네 살 때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다 준 것이었다. 그때는 공주의 성 같은 걸 세트로 사면서 예린을 무척 행복하게 해줬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루루는 예린의 모든 순간에 함께했다. 학교에 갈 땐 가방에, 집에서는 침대 옆에, 심지어 여행을 갈 때도 꼭 품에 안고 다녔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빠가 떠난 이후, 예린이 루루에게 훨씬 더 집착하는 것이 보였다. 잠들기 전에 꼭 루루를 끌어안아야 했고,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종종 루루에게 속삭이곤 했다. 지수는 그 모습을 보며 아이가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음을 직감했다.

 

저녁 식탁에 둘만이 앉아 있었다. 쌀밥과 간단한 반찬 몇 가지가 놓인 식탁 위에서 예린은 가만히 숟가락으로 밥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는 오늘 전화 안 해?”

 

지수는 잠깐 뜨끔한 듯 아이를 바라봤다. 예린은 괜히 시선을 피하며 식탁 위 루루의 발을 쓰다듬고 있었다.

 

“음… 아빠 바쁜가 보네. 회사 일이 많으니까".

 

지수는 일부러 밝게 대답하려 했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쪼개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린은 한때 엄마에게 매달리며 소리를 지르거나 짜증을 냈었다. 왜 아빠와 같이 있으면 안 되는지, 왜 아빠가 이 식탁에 없는지 끊임없이 따지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린은 울지 않게 됐다. 대신 조용해졌다. 그 변화가 지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아이는 아빠가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엄마가 상처받을까 봐 조심히 억누르고 있는 것이란 걸 지수는 알고 있었다.

 

아이와의 대화를 마치고, 지수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러 방으로 들어갔다. 예린은 청소하다 말았는지 바닥에 널브러진 스케치북과 크레용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지수가 방에 들어서자 예린은 살짝 웃으며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 나 아빠한테 편지 써도 돼?”

 

지수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편지? 갑자기 왜?”

 

“그냥… 루루도 아빠 보고 싶대". 예린은 진지한 얼굴로 말하며 루루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놨다. “내가 대신 편지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아빠가 우리한테 언제쯤 올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지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수천 마디의 말이 머릿속을 떠올랐지만, 모두 허공 속으로 날아갔다. 편지를 쓴다는 단순한 행동 속에서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아빠를 원하고 있는지 고백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수는 아빠가 그 편지를 읽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예린의 작은 간절함을 어떻게 짓밟아야 할지 몰라 두려웠다.

 

“그래, 한번 써보자. 나중에 아빠한테 보내줄게". 지수는 끝내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밤이 늦어질 무렵, 예린은 여느 날처럼 루루를 꼭 안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지수는 아이를 위해 불을 끄러 방으로 들어갔다가 침대 곁에 놓인 스케치북을 우연히 발견했다. 망설이다 그것을 들추자, 예린이 막 그렸던 낙서들이 보였다.

 

맨 첫 페이지 위에는 작은 그림 하나가 있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예린. 셋이 손을 꼭 잡고 웃으며 서 있었고 위에는 크레용으로 “우리 가족”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지수는 그 그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감정이 덫처럼 그녀를 움켜쥐었다.

 

지수는 예린이 완전히 잠든 모습을 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 아이를 어떻게 채워줄 수 있을까 뭐라도 해줄 수는 있을까'.

 

아이가 단단하지 못한 어른들 사이에서 조용히 깨져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그날 밤, 지수는 문득 떠오른 장면 하나를 기억해냈다. 몇 년 전, 현우가 예린과 공원에서 놀던 순간이었다. 현우가 예린을 번쩍 들어 올리며 공중에서 돌려줄 때, 아이는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때 지수는 행복에 겨워 그 장면을 핸드폰으로 찍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영상을 다시 보는 일은, 가슴 한켠에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에 도려지는 아픔을 남길 뿐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지수는 결국 스마트폰을 들어, 과거 찍었던 가족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행복했던 순간들이 담긴 캡슐 같은 이미지들이, 동시에 너무 먼 기억으로 느껴졌다.

 

“예린이도 나처럼 이 옆자리를 그리워할까…”

 

그녀는 기다리듯 바라봤던 메시지 창에 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다.

 

지수는 아침 일찍 동네 주변을 걸었다. 혼자 하는 산책이 익숙해진 지 꽤나 오래됐다. 이혼 후에는 밤이나 아침에 걷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차분한 아침 공기, 조용히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리고 텅 빈 골목길들이 마음을 무겁게 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어디를 가든,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이혼 후의 상처와 그 상처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눈길이었다.

 

“아우, 지수 씨! 이렇게 아침 산책하셔요?”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동네 주민인 순자 아주머니였다. 언제나 똑부러진 머리를 하고 층마다 돌아다니며 대화하기 좋아하는 분이었다. 지수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네, 오늘은 그냥 마음을 좀 정리하려고요".

 

순자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뭐가 그리 궁금한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주위를 슬쩍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근데… 요즘은 좀 괜찮으신 거죠? 아유, 엄청 힘드실 텐데. 예린이는 그래도 잘 지내나요?”

 

겉으로는 위로처럼 보였지만, 지수는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들으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그녀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이런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에게 직접적인 비난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말투, 표정, 시선은 그녀를 조용히 짓눌렀다.

 

“예린이요? 아이는 뭐 괜찮죠". 지수는 담담한 척 대답했다. “그런데 아주머니께선 혹시 아침에 급한 약속 있으세요? 저도 걸으면서 생각 좀 더 해야 해서요".

 

순자 아주머니는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갔다. 그러나 어딘가 허전한 눈길을 유지한 채 멀어지는 모습은 마치 ‘뭔가 더 알고 싶었는데’라는 말이 걸음걸이에 드러나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놀이터를 지나갈 때, 어린아이들이 기구에 올라 뛰어노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수는 여느 날처럼 주민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몇몇은 무심코 지나쳤고, 몇몇은 조용히 수군거렸다.

 

“저분도 결국 이혼하셨다더라".

 

지수는 그 말이 바람에 실려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자신이 일부러 남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만큼 간섭꾼이 된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얕은 소음은 항상 그녀의 귀가 아닌 가슴속을 때렸다. 마치 전쟁터의 총알처럼.

 

언젠가 아이 친구 엄마에게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저기 죄송하지만, 이건 그냥 궁금해서요… 예린 아빠 분이 그 전에 어디로 이사 가셨다고요?”

 

마치 대수롭지 않은 질문처럼 던져졌지만, 지수는 그 말에서 비난도, 동정도, 그리고 알 수 없는 묘한 우월감마저 느꼈다. 물어본 상대의 표정 속에서 지수는 자신이 결정을 실패한 사람, 잘못된 선택으로 처벌받고 있는 사람, 아니면 적어도 누군가의 눈에 우스워진 존재가 되어버린 모습만 떠올렸다.

 

“그냥 멀리요. 요즘은 바빠서 예린이 보러 오는 것도 어렵다네요".

 

지수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항상 누구에게든 자신이 강하게 버티고 있다고 보이고 싶었다. 아이와 충분히 행복하다고 믿으려 애썼다. 그러나 곧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결혼에 실패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을.

 

지수는 한 번은 친구들과의 모임에 갔다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대학 동창들이 모인 자리에 초대된 그녀는 이혼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모임의 분위기가 잠깐 어색해졌다.

 

“아, 요즘은… 그럴 수도 있지 뭐!” 다들 무심한 척 말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입으로 말하는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이는 동시에 안쓰럽게 바라보았고, 어떤 이는 흥미진진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귀를 기울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속으로 물었다. 편견과 무관심, 그리고 작은 동정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사랑했던 남자와 함께했던 시간은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그녀가 다시금 자신의 가치를 세울 수 있는 날이 올지.

 

그날 저녁, 지수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씩 스스로를 완전히 사라지는 유령처럼 느끼곤 했다.

 

“잘못은 누가 했든 상관없지". 그녀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결국 상처는 내가 받고 흔적은 내가 안고 가는 거니까".

 

그녀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고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흔적이 언제쯤 옅어질 수 있을까? 아니면 영원히 자신의 일부로 남아야만 할까?

 

한참을 그렇게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며 거울 속 자신의 서글픈 얼굴과 마주하고 있었다.

 

지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밤공기가 점차 싸늘해지면서 한기마저 느껴졌지만, 불을 켜려거나 담요를 더 두르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래전 근처 가구점에서 현우와 함께 골랐던 천장 조명의 모양새가 너무도 선명하게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반짝거리는 스테인드글라스 조명. 그 빛 아래서 둘이 웃으며 저녁 식사를 나누던 때가 불쑥 떠올랐다.

 

“이걸로 살까? 너무 화려하지 않아?” 그때 현우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우리 잘 어울리잖아. 집에서도 분위기 좀 내고 살아야지!” 지수가 웃으며 답했던 기억.

 

그 평범했던 대화의 조각들이 이제는 천장에 걸린 조명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뭔가로 다가왔다. 그 빛은 여전히 방을 은은하게 밝혔지만, 그 빛 아래에서 웃고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지수는 조용히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때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고, 온 세상이 그 사랑 하나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서서히 부서졌다. 작은 균열이 생기고 서로의 다름이 예리한 말들과 무심함으로 변하던 그 과정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 했다.

 

사랑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잊은 게 아닐까. 아니면, 이제는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누군가를 신뢰하는 일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 아닐까.

 

그녀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현우의 이름이 저장돼 있는 연락처를 예전처럼 눌렀다. 하지만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다. 이혼 후 몇 번이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에게 "잘 지내냐"는 짧고 간단한 말을 보내고 싶으면서도, 대체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 연락해봤자 뭐가 달라질까'.

 

스스로 타이르듯 생각했지만, 마음은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 '모두가 끝났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아직 그를 완전히 놓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를 놓는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그와 함께했던 시간 동안 보여줬던, 사랑했던 ‘나 자신’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도시의 네온사인과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그 빛 사이로 차들이 지나칠 때마다 창문에 반사된 불빛이 그녀의 방 천장을 아른거리게 했다.

 

예전에 현우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며 도시 야경을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차 안에서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풍경을 바라봤었다. 굳이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그 기억은 따뜻한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다.

 

지수는 이따금 주변에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보라는 말을 들었다. 친구들은 “너도 이제는 사람을 다시 만나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있을 거야?”라고 가볍게 충고했다. 하지만 그 말은 마치 그녀의 내면을 마구 헤집는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다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다시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 자체가 두렵게 느껴졌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더 이상 설렘이 아닌 무엇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을 안겨주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밤이 깊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커피 대신 따뜻한 물 한 잔을 끓였다. 뜨거운 물에서 올라오는 김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여전히 사랑에 대한 갈증은 남아 있었지만, 그 뜨거운 물처럼 가까이 다가가기에 그녀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식어버릴 것 같았다.

 

“사랑은 결국… 끝이 나니까".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한 뒤, 물 잔을 식탁 위에 내려두었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한없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지금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깨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희미한 잔상뿐이었다.

 

잠들기 전, 지수는 다시 침대에 누워 마지막으로 창문을 열어보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밤바람 소리가 텅 빈 방에 가득 찼다. 언젠가는, 지금 이 공허함 뒤에도 다시 누군가가 손을 내밀 날이 오게 될까? 아니면 그녀는 이렇게 혼자만의 삶 속에서 멈춰 서야 할까?

 

다시는. 아마도 다시는. 그녀는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내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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