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19일, 서울 사당동.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날, 아버지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있었단다.
처음부터 그 아이의 세상은 불완전하게 열렸다.
부모는 그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이혼했다.
그 후로 아이는 탁구공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외할머니 집, 큰이모네, 작은이모네, 엄마 집, 아버지 집.
주소는 계속 바뀌었고, 초본엔 전입 기록이 서른 번이 넘게 남았다.
같은 해에 한 학교에 다니면서도
두세 번 전학을 가야 했던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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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이라는 이름의 전장
초등학교 시절,
그 아이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단 한 번도
안전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집은 늘 어수선했고,
그 중심엔 폭력적인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손은 무서웠다.
그 손은 날마다 아이의 몸과 마음을 때렸다.
“왜 이렇게 맞아야 하지?”
아이의 마음은 수없이 물었지만,
입 밖으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울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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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너져가는 공간
열세 살 무렵, 집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몇 명은 함께 살았고, 아이는 그들을 ‘누나들’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누나들’은 또 다른 소음과 냄새, 불안을 데려왔다.
밤은 길었고, 낯선 기척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도 그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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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기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도망쳤다.
그날 이후, 집 안에 있던 여자들은
먹을 것과 저금통을 챙겨 떠났다.
하나둘, 모두가 사라졌다.
그 아이는 그들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 나는 이렇게 버려지는구나.”
그리고 그것은,
처음으로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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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립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만 외딴 홍천의 전원주택에 홀로 남겨졌다.
며칠을 굶었다.
배는 고팠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허기짐은 몸을 넘어 마음까지 파고들었다.
속이 울리고, 머리가 흐려졌다.
기억은 점점 사라졌다.
어떤 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깜깜한 방 안,
풍산개의 무심한 숨소리만이
가끔 귓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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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라지는 존재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
그 아이는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갔다.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그 질문도 곧 사라졌다.
남은 것은
텅 빈 허기와
지워져 가는 기억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