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내 가슴의 무늬

누렁이 |2006.11.16 16:09
조회 32 |추천 0

내 가슴의 무늬

박후기

비가 그치자
나무들은 있는 힘껏 잎을 부풀렸다
성긴 나무의 뿌리는
부활절 사제의 분주한 발길처럼
햇빛의 설교를 땅 속에 퍼뜨렸으며
바람 앞에서 잎들은 성호를 그었다
죽은 잎은 쉽게 떨켜를 놓아버렸지만
죽은 형의 애인은 끝까지 죽은 형의
관짝에 매달렸다 땅바닥에 뒹굴었다

스무 살 여린 내 눈물이
군용 소보루빵의 푸른곰팡이로 피어났고
숨죽인 초소 뒤편
발목까지 바지를 풀러 내린 풀들의 수음이
은밀했다 바람에 뒤집혀 반짝이는
은사시나무 잎사귀들, 그토록
수많은 충고를 담아두기에 내 귀는
너무 천박했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저 혼자 튀겨나가는
폐타이어 화단의 봉숭아씨
나도 팍, 터지고 싶었다 그러나
터진 열매 껍질처럼 빈주먹 말아 쥔 채로
이리저리 얻어터지며 원위치 하던 나는
후두둑 후두둑 후박나무 잎사귀
비 맞는 소리 눈물겹던 그 여름의
나무 밑을 잊지 못했다

십일월은 쌀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쓸쓸하게 널브러진 갈색의 잎들
오그라들고 한때 부풀었던
그 많은 시간들
더는 뒤돌아볼 수 없음이여

나무들
딱딱한 가슴 속
섬세한 울림으로 새겨지는
둥그런 생의 기록
아, 무엇을 쓸 것인가
얼룩진 무늬들, 덧없는

- 작가세계 2003년 여름호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