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04 노트북과 침대늘보
신혼집은 6평 남짓한 작은 원룸, 그 안에 데스크톱 두 대를 놓기엔 공간이 부족했다. 내 PC 하나만 넣게 되었고, 아내는 퇴근 후 PC를 할 수 없다고 노트북을 사달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바로 움직였다. 제품을 비교하고 가성비를 따져 윈도우까지 직접 설치한 후 선물로 건넸다.
그 이후 아내는 결혼전 처럼 침대 위에 엎드린 채로 노트북을 하고, 나는 책상 앞에 앉아 PC를 했다. 그러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물 좀 갖다줘~ 고마워~ 땡큐~”, “휴지 좀~” 신혼 초의 작은 부탁들이었고 나는 아내에게 침대늘보라고 농담을 던지고 흔쾌히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횟수가 누적되면서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혹시 내가 노예인가? 아내가 결혼한 진짜 이유는 나라는 사람보다도, 그냥 ‘시키기 편한 사람’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느 날 또 뭔가를 부탁해 원하는 걸 건넨 후,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네가 해.” 그러자 아내는 말했다. “일어난 김에 해주면 안 돼? 지나가는 길이잖아.” 그 순간, 또 나만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그런 말들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내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또또~ 또 삐졌어~” 그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때가 있었다.
2014-11-26(수) 혼인 신고
결혼식 이후 우리는 혼인신고를 일부러 미뤘다. 신혼부부 청약 자격 때문에 시기를 조율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아내는 내게 아무 말 없이 혼인신고를 마쳐버렸다.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내집마련 때문에 나중에 신고 하자고했는데 아내는 내 이야기를 무시하고 신고를 했다.그 사실을 들었을 때, 실망감이 크게 밀려왔다. 부부란 이름으로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했지만, 중요한 결정은 혼자 내리는 모습에 마음이 멀어지는 듯했다. 결국 청약 기회도 날아갔고, 나는 그렇게 우리의 첫 ‘공식적인 협의 없는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2014-11-28(금) 콘서트 예매
결혼 후 아내는 종종 연예인 신준○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전부터 신준○씨를 좋아했다고 했다. 추억을 회상하며 웃는 모습은 마치 소녀 같았다. 처음엔 장난처럼 들렸지만, 그 빈도는 제법 잦았고, 그 열정은 진심 같았다. 심지어 장모님도 신준○을 잘 알고 계셨다.
어느 날 아내는 말했다. “준○오빠 콘서트 예매해줘. 같이 가자. 우리가 부부라고 소개도 하고 싶어.” 나는 그 말에 웃으며 예매를 해주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열정도 함께 품어주는 게 사랑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콘서트 날짜는 회사 송년회와 겹쳐버렸다. 결국 나는 함께 가지 못했고, 아내는 친구와 함께 콘서트에 다녀왔다.
그날 이후로도 가끔 아내는 콘서트 이야기며 준○오빠와의 추억을 나에게 들려준다. 나는 조용히 들어주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이야기들이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나와의 비교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내의 준○오빠와의 추억을 아무말 없이 들어주면 가끔씩은 그와 나를 비교하면 말한다. 그러면 "준O오빠와 결혼하지 왜 나랑 결혼했냐 “준○오빠는 다른 여자랑 결혼했으니까 내가 당신이랑 결혼했지.” 그 말은 농담처럼 던져졌지만, 내 마음엔 묘한 씁쓸함이 남았다. 내가 아내의 ‘현실적인 선택지’였다는 듯한 그 말이, ‘꿈은 꿈이고, 현실은 너야’라는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 후,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참 묘한 타이밍이었다. “그거 알아? 우리 결혼기념일이 준○오빠 결혼기념일이랑 똑같아.” 아내는 무심하게, 마치 운명이라도 된 듯 웃으며 말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고, 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라 믿었던 이 날이 아내에게는 ‘준○오빠와 같은 날’로 기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어딘가 모르게 허탈하고 씁쓸했다.
그녀는 운명처럼 말을 했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퇴색된 기념일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만든 추억이 아닌, 다른 남자의 그림자에 살짝 가려진 날. 그날 이후로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면 나는 묻지 않아도 떠오른다. ‘이 날은 나만의 날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떠올리는 날인가?’ 사랑은 함께 걷는 길이라 배웠지만, 그 길에 그림자가 둘이면 때때로 한쪽은 시린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