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은 기분좋게 일어났다.
모든 일에 긍정적인 것이 수완이 가진 장점이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어서
긍정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고서는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켰다.
뉴욕에 있을 때 친구의 컴퓨터로 본인이 직접 만든 팝송 CD였다.
노래를 틀어놓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이리저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제의 정 다희라는 여자.
그 여자의 말을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수완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어디까지 알아보았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사실이었다.
남들은 외동딸이라고 행복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녀에게 있어 외동딸이라는 사실은 순간순간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인생은 온전하게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우울한 생각에 빠지자 수완은 괜한 노래 탓을 하며,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CD로 바꾼다.
그녀의 노래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가볍게, 아무 생각없이 듣다보면 기분이 나아지고는 했다.
"띠리리리리리 띠리리......"
그녀의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 벨소리도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이다.
발신 표시 창에는 '러버'라고 적어져 있다.
"왜요?"
"좋은 아침인데...... 어제는 피곤해 보이더니 잘 잤어?"
동식의 말에 수완은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요?"
"아침에 출근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잠시만......
오셨습니까? 네, 하하하...... 감사합니다. 꼭 주례서 주시는 겁니다."
수완은 부풀어 가던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이것 역시 연극의 일부분인 것이다.
수완은 약간의 기대를 걸어버린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미워지는 것을 느낀다.
"이따 점심이나 같이 하지.
오늘 별다른 일정 있는거야?"
"아뇨. 없어요."
"그럼, 이따 내가 데릴러 갈까?"
"아뇨...... 제가 나가죠. 회사쪽으로 시간 맞춰서 갈께요."
"좋아. 그래......
참, 정 다희씨가 이번에 우리쪽 통역으로 3달간 일해주기로 했어.
정 상무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나하고 일은 다르지만 아무래도 부딪힐 것 같아서......
궁금할까봐 이야기 하는 거야."
"하나도 안 궁금해요. 이따보죠."
수화기 저편에서 수완의 귀에 다희의 소리가 들려온다.
"빨리 들어오세요. 이제 곧 회의 시작해요.
준비 다 되었거든요."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이따 와서 연락줘."
옆에서 다희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다.
"사랑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들어갑시다. 다희씨."
"그럼요. 그걸 곧이 믿을만큼 어리석지는 않아요."
수완은 이미 끊어져 버린 전화기에 대고 말을 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서운한 감도 없지 않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오래전의 일 같다.
대학때 교양 과목으로 들었던 '미학(美學)'이라는 과목에서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녀는 과감하고 시니컬하게 그 대답을 종이 반쪽에 적었다.
그러나 결과는 F였다. 결국 그 과목을 다시 들어야 했다.
교수님은 달랐지만......
수완은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세상에는 그리움의 미학도 있는거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
가질 수 없어서 더욱 그러는 거겠지.'
동식과 회장님, 정 상무, 정 다희, 그리고 몇몇의 중역들과
이번에 새롭게 시작하는 해외 수출 프로젝트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동식의 옆자리에 앉은 다희는 자꾸 동식의 주의를 끌기 위해 묘한 자세로 앉아있다.
짧은 치마에 다리를 꼬고 앉아 더욱 올라가 버린.......
동식은 어이가 없었다.
그 여자의 계산이 동식의 눈에도 보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러 온 것인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온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가끔씩 동식을 쳐다보면서 묘한 웃음도 흘린다.
슬슬 동식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수완이 걷잡을 수 없이 보고싶어 졌다.
'이런, 젠장......'
다희가 그의 의자 팔걸이 쪽으로 손을 뻗는다.
참다못한 동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좀 쉬었다하죠."
회장을 바라보며 동식이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제 겨우 30분 정도 밖에......"
회장님이 입을 여신다.
"그래, 좀 쉬지. 동식이 너 내 방으로 잠깐 들어와라."
다희가 묘한 웃음을 흘린다.
회장실로 들어서자 회장이 동식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다희 때문이냐?"
"......."
"넌 어떠냐? 수완이쪽이냐? 다희쪽이냐?
복도 많구나. 쟁쟁한 여자들 사이에 끼어서......."
"정 다희씨를 이번 프로젝트에서 빼 주십시오."
회장은 심각한 얼굴로 동식을 쳐다본다.
"빼면?"
"네?"
"빼면 그 여자가 순순히 물러난다고 하더냐?"
"......"
"아마 더 물고 늘어질꺼다.
네 나이가 몇인데 내가 해결해야 겠냐.
알아서 해라. 지금은 프로젝트가 시작되서 뺄 수 없다.
정 상무도 생각해줘야지.
흠...... 수완이는 어떠드냐? 아무렇지 않더냐?
일 하나는 잘 하는 사람인데...... 이것도 일이잖느냐."
동식은 약간의 실망을 한다.
'어제 일이 단순히 일이기 때문이었군. 참나......
질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무슨 생각하는게냐. 수완이와 잘 해결해 보거라.
나는 손 떼었으니...... 자, 회의하러 들어가자."
동식은 회장을 따라 들어가는 동안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