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 몇 번째이신가요?"
그 질문 하나만 들어봐도 앞으로 이 남자가 나에게 할 말이 이미 끝을 알고 있는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예상되었다.
내가 처음이라고 하든 백번이라고 하든 상관 없이
'별로 선보고 싶지 않은데 집안의 권유로 나왔다. 이왕 이렇게 만난 거 편안하게 얘기나 하다 가자...'
이런 식으로 얘기할 것이 뻔했다.
나는 오렌지 쥬스가 반쯤 남겨진 컵을 만지작 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나와 이 남자 만큼이나 마음에 없는 선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있는 듯 했다.
모두들 어느 영화 감독의 엑스트라 지령이라도 받은 듯 비슷한 옷차림에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으리라...
어찌 보면 주인공이 없는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겠지만 보는 사람은 얼마나 지루할까 싶었다.
어느 남녀를 클로즈 업해도 아까 본 그 남녀들인지 혹은 그 전에 본 남녀들인지 비슷한 옷차림에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금방 하품을 하다 잠이 들 것이 뻔한 내용이었다.
나는 선이 몇 번 째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적게 본 것도 아니었고, 또 세어 볼 만큼 애착도 없었다.
26살까진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27살부터 엄마와 아빠의 성화에 못이겨 선을 보러 나왔으니 그냥 선을 볼 만큼 보았다고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선을 보러 나와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적당한 대답과 적당한 질문과 적당한 메뉴를 주문했고 적당한 이별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선을 주선한 사람에게는 적당한 감사의 표시와 결혼할 마음은 없다는 뜻도 전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나섰는데 엄마의 대답은
"얘가 워낙 일에 미쳐 있어서요. 나이가 들어도 남자 같은 건 모른다니까요. 호호호....어서 시집 보내야 하는데..."
저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과연 엄마는 내 모습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엄마도 나름대로 대외적으로 딸의 이미지를 조작해주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분명 내가 26살에 헤어진 남자 친구 때문에 술마시고 만취한 상태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온 것을 똑똑히 보았을 텐데...
엄마는 과연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까?
아무튼 나는 오늘 이 맞선 남과 한 시간 안에 헤어지고 내 독립을 위해 집주인을 만나러 가야했다.
몇번 째 선이냐고 묻는 질문에
'그냥...그렇죠..뭐..'
이렇게 말꼬리를 흐려가며 대화를 질질 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세어보진 않았고요. 이미 몇 번째 선인가는 중요하지 않죠."
나는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얼마나 심심한 질문을 했는지 알려 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머리 속은 온통 어제 찾은 적금 3천만원과 1시간 후에 내가 인터넷으로 보아 두었던 집을 직접 보기로 한 것에 들 떠 있었다.
부모님 모르게 나는 독립을 꿈꾸고 있었고 그것을 이제 저지를 단계가 된 것이다.
독립만 하게 된다면 이런 시시껄렁한 선 따위는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리라.
오호, 그렇다면 이 남자가 나의 마지막 맞선 남이 될지도 몰랐다.
"아...그러시군요. 저도 실은 부모님이 하도 나오라고 해서요."
내 예상은 어찌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는지....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보면 선본 남녀도 눈이 맞아서 바로 여관으로 직행하던데...
진정 그것은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란 말인가.
나에게는 어떻게 그렇게 극적인 상황은 한번도 없는 건지...
최소한 극적인 상황까진 안가더라도 호감을 가질 만한 상대라도 없는 건지....
"네. 그럼 마마보이신가 보네요. 자기 주관도 없이..."
나는 될대로 되라..라는 심산으로 마음대로 얘기해 버렸다.
"마마보이라기 보다는 부모님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드리자는 거죠."
그래도 이 남자 마마보이라는 말에는 기분이 상한 듯했다.
"아. 그럼 효자시군요?"
"언제나 그런 식인가요? 상대방의 말을 비꼬는 버릇이 있으신가 보군요."
이 남자도 만만치 않다. 내가 비웃고 있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인내심도 별로 없는 남자군....
"그래도 심심한 대화보단 비꼬는 대화가 더 재밌지 않아요?"
나는 이미 이 남자의 울그락불그락 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 언제나 내가 조신한 얼굴로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미소를 띠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나와 상관 없는 남자들한테까지도....그러기엔 너무 내 인생에 지쳐 있었다.
"내가 곧 한국을 떠나길 잘한 것 같군요."
주선한 사람으로부터 곧 미국에 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마 그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 너 같은 남자는 미국에라도 가줘야지..한국의 환경을 위해서...
"요즘 한국 여자들 진짜 문제에요. 스스로 남녀 평등하면서 남자를 우습게 보고..."
혹시 저 남자, 여자를 열받게 하는 단어들의 조합을 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여자들에게 '여자들이란...'이런 투로 말하면 대부분의 여자는 이성을 잃어버린다.
도대체 왜 남자들은 여자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여자들이란...말을 쓰며 비약하는지....
"남자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을 우습게 보는 거죠."
나도 물러날 수 없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국 여자에 대해 똑바로 알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제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요?"
남자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했다.
오호, 완전히 내가 KO승을 한 것 같았다.
"우습진 않아요. 그렇다고 재밌는 분도 아니시네요."
나는 이 대화로 그만 이 자리를 정리하고 싶었다. 강남에서 집을 보러 가기로 한 신촌까지 가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잠시만요..."
이 남자 전열을 재정비하려는지 잠시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나는 남은 오렌지 쥬스를 마시며 남자가 자리에 돌아오면 빨리 대화를 마무리하고 약속장소로 가리라 결심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오늘 집 보러 오신다고 했죠?'
집주인이었다.
비록 단지 집주인일 뿐이지만 이렇게 맞선 남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전화를 해주는 건 고맙다.
한마디로 시기적절한 전화다.
'아. 네.'
'제가 지금 외출중이라 혹시 좀 늦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보다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집주인이라면 기다리게 한다고 먼저 전화를 하지 않는게 일반적일텐데...
전화 목소리로 짐작하건데 30대 초반 정도의 중산층에 반듯하게 자란 사람 같았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친절한 통화를 하고 나니 방금 맞선 남과 옥신각신하던 기분도 좀 가라 앉는 듯 했다.
'네. 괜찮아요. 저도 좀 늦을지도...'
'네. 그럼 이따 뵙지요.'
나는 맞선남이 자리에 돌아오면 얼른 약속 장소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걸어오는 맞선 남의 모습이 보였다.
키도 크고 걸음걸이도 경쾌하고 외모는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성격이나 가치관 등은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저런 인간들은 뻔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들이 오냐오냐 키워서 세상의 모든 여자는 엄마와 그 외 다른 여자들도 분리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갖게 된 여자들에 대한 남자의 우월감...스스로는 고상하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여자를 은근히 무시하는 생각을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
"저, 죄송하지만 약속이 있어서요."
앗,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선수를 놓쳐 버렸다.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을 맞선 남이 하고 말았다.
"네. 저도 약속이 있어서요."
나도 이제는 좀 공손하게 마무리하고 싶어서 그렇게 대답하며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혹시 남녀 평등하면서 이런 거 계산은 왜 남자가 하는지 생각해본 적 없으신가요?"
남자는 영수증을 집으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지갑에서 만원 짜리 몇장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내가 참을 수 없는 유형의 남자는 평소에 여자를 무시하면서 돈 얘기만 나오면 여자들이 돈을 안쓴다고 몰아부치는 남자였다.
"됐죠? 계산하고 남으시면 미국 경비에 보태 쓰세요. 그리고 영원히 한국에 돌아오지 마세요!"
나는 마지막 맞선치고는 나름대로 통쾌했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 나와 택시를 탔다.
이제 내 집을 갖고 독립하게 되면 더 이상 맞선 같은 것은 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지금까지는 집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엄마의 뜻에 따라 반강제로 선을 보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우스꽝스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강남에서 신촌으로 가기 위해 진입한 강변북로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물결은 오후의 햇살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 듯 했다. 오늘 맞선남과의 기억은 저 강물에 버리고 내가 독립할 공간을 향해 열심히 달려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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