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입술을 강력하게 만든 친구......
흔히 말을 잘하는 입담이 좋은 사람들 주변에는 항상 많은 친구들이 모인다. 어디서 주워 왔는지 기발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 사람의 경이롭고 재치 있는 입담에 배꼽을 빼고 웃고 떠들다보면 지루한지 모르고 시간이 흘러간다. 어떤 사람들은 개그맨하고 살면 항상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개그맨도 나이를 먹는다. 늙은 개그맨이 제 나이에 맞는 웃음을 개발하지 못하면 시청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받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말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의 주변에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친구들은 나의 입담이 천부적인 소질로 생각했다. 나 역시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한 천부적 재능이 발견된 것은 아닌가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한국문학 단편집과 추리소설을 비롯하여 공포 및 SF와 무협지, 음란물?과 만화나 영화 등을 많이 보고 읽고 있었다. 즉, 나의 입담은 천부적인 ‘이빨’이 아니라 소위 ‘책빨’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당시의 친구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기다리던 모습을 떠올리면 즐거운 추억이다. 어쨌건,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싫지 않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 시절, 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이웃집 소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독서의 방향에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녀는 아침 등교 시간의 버스정류장에서 항상 책을 읽고 있었는데, 대부분 시집이나 소설로 기억한다.
예나 지금이나 책을 읽는 여자(남자)는 지적이고, 고고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내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까지 느껴지는 그녀에게 다가서려면, 나 역시도 오락물 중심의 독서에서 벗어나야 했다. 친구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어설픈 농담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다가 본전도 뽑지 못하고 망신만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독서의 뱃머리를 돌려, 시를 포함하여, 전혀 흥미를 주지 않는 고리타분한 고전소설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그녀는 하루에 독서량이 얼마나 될까?’를 가늠해 보았다.
그녀가 시집 한 권을 읽으면 나는 두 권, 그녀가 두 권의 소설책을 읽는다면 나는 네 권을 읽으리라 작정했다. 짐작하겠지만, 나는 그녀보다 많은 시와 소설책을 읽고 당당하게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에게 독서량을 묻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차마 묻지 못하고 혼자만의 경쟁심으로 독서를 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독서는 좋아하던 야구와 축구도 흥미를 잃게 만들고, 오락게임도 멀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친구들은 “그런 책도 읽었냐?”, “그 철학자도 알어?”라며 호기심과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왔다. 나의 입담에 강력한 엔진이 장착된 셈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시를 쓰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다. 물론 나의 마음을 담은 그녀만을 위한 시였다. 가을에 떨어진 낙엽을 주워서 책갈피에 넣어 말렸다가, 그 위에 흰 물감으로 시를 옮겨 적고 비닐코팅을 해서 선물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내가 이런 영악한 음모를 계획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내가 자신의 독서 경쟁자라는 사실도 전혀 눈치 챌 수 없었겠지만, 어쨌건 나의 경쟁자를 몰래 혼자 바라보는 것은 당시 유일한 설렘과 즐거움이었다. 언젠가 그녀 앞에서 시를 낭송하며, 유명한 시인들과 소설가 및 철학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짐짓 지적인 척 뽐내는 자신을 상상하며 독서에 열정을 쏟았다.
드디어, 나는 본격적인 대입수험생이 되기 전 겨울,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처럼 비장한 각오와 굳은 결심을 하고, 마침내 흰 눈이 내리던 날, 그녀에게 나의 시(詩)가 담긴 낙엽을 선물하며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이 무척 부러운 듯 발자국들이 흰 눈을 밟으며 따라다녔다. 비록, 지금 그녀는 떠나고 없지만, 내 곁에는 책을 사랑하는 마음과 강력한 ‘이빨’과 ‘책빨’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오늘 떠나간 옛 추억을 끄집어 이야기 하는 것은, 주변에 새로 출간되는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제대로 된 독서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어떤 책이든 독서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교양도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비용 그리고 노력을 통해 읽고 있는 책이, 적어도 5년이나 10년 뒤에도 여전히 쓸모와 가치가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는 독서는 어떨까? 그리고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읽은 책을 권할 수 있는 고전(古典)에 관심을 지녀보는 것은 더욱 좋지 않을까?
때로 교양과 실용적인 독서 이외에 흥미위주의 독서도 필요하겠지만, 왠지 나이 20대 초중반을 넘어선 건장한 청년이 비디오샵과 만화책방만 오락가락 하면서, 거금을 지불했겠지만, 커다란 그의 가슴에 한 아름 들려 있는 내용물들이 왠지 안쓰럽고 초라하게만 보인다. 어느 대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들었는데, 분명 애니메이션 학과도 아닌데, 오늘도 열심히 독서?를 하다가 집안에서 쫓겨났는지 공원 한 구석에서 앉아 만화책을 넘기며 순진하게 키득거리며 웃어대고 있는 엄청난 체구의 그 총각에 꼭 묻고 싶은 이야기 있다. “혹시, 교양 있고 지적인 여자 친구를 좋아합니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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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친구는 손을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잡아주는 것이다. by 희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