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상우와 강릉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온 수영은 '그 곳으로 떠나자. 아니, 다녀오자.'고 결심했다. 그 곳 데스벨리.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다는 '죽음의 계곡'...
먼저, 여행사에 들려서 비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여행사 직원은 아직 미혼이란 얘기에
"그럼, 비자가 나오길 힘들겠는데요." 했지만 수영이의 재직증명서와 재산 내역이 적힌 종이를 보더니
"가능하겠네요." 한다.
대사관에 인터뷰를 신청했더니 20일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지.'.
인터뷰를 위해서 화사한 차림으로 대사관에 간 수영에게 직원은 간단히 몇 가지를 물어보고 비자승인을 해 주었다. 대사관 직원도 미혼인게 좀 걸리는 듯 했지만 수영이 명의의 아파트와 통장내역을 보더니 비자 승인을 해 주었다. 비자는 3일 후에 집으로 배달되었다. 그 사이 할인점에서 가방과 여행에 필요한 몇 가지를 준비했다. 비행기도 비자가 도착한 다음날로 미리 예약을 해 두었다. 이제 한 가지 일만 남았다.
하지만 만나서 말할 자신은 없었다. 공항에서 전화를 걸기로 했다. 밤새 연습을 하고 또 하고 ....
12월 20일 오후 5시 25분 비행기
공항에서 비행기표를 받고 상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영이구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도 바빠서 연락을 못 했는데... 수영이가 전화하길 기다리고 있었지."
"아저씨.." 수영이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저, 공항이에요."
"공항?"
"저 미국가요.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 해서요. 갑자기 일이 그렇게 됐네요. 가기 전에 저번 내 주신 숙제 풀고 가야할 것 같아서요."
"..."
"죄송해요. 아저씨. 아저씨를 많이 좋아하지만 아직은 자유롭고 싶네요."
"..."
"오래 있다가 오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거예요. 제가 다녀와서 전화 드릴게요."
"음, 그래라." 상우의 목소리가 차가워져 있었다.
전화를 끊고 수영은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계속해서 변기물을 내렸다. 우는 소리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서...
기내에서도 30분 간격으로 'excuse me."를 연발하면서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다. 옆자리의 인도인이 화장실에 다녀오면 빨개져 있는 수영이의 눈을 이상스럽게 쳐다보았다.
비행기는 9시간을 달려서 샌프란시스코공항에 도착했다. 라스베가스공항으로 가면 더 가까운데 학원 원장선생님이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시켜 준 가이드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사람이어서 이쪽 공항에서 내렸다. 가이드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샌프란시스코에 숙소를 잡았다. 상우가 몹시 보고 싶었다. 보지 못한다면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몇 번을 호텔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를 계속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가이드와 일정을 잡았다. 학원 원장선생님의 먼 친척인 가이드 윤희는 수영의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비자는 1주일의 짧은 체류기간을 주었다. 아마도 미혼에 혼자 여행인 수영이 혹여 불법체류자가 아닐까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더니 1주일의 짧은 기간을 주었다. 하지만 수영에겐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저, 다른덴 별 관심 없는데... 저 데스벨리만 보면 되는데요.."
"그래도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캘리포니아에 왔는데 많이 보고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수영씨 의견을 최대한 존중할게요." 웃으면서 윤희가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 곳 샌프란시스코를 보고 내일 데스벨리로 떠나죠.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 이틀이면 충분하거든요. 너무 타이트하게 일정을 잡으면 힘들어 할것 같아서 그렇게 잡았는데 괜찮으시죠?"
"고마워요. 그럼 4일 후로 비행기 예약 좀 해주실래요?"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게요? 아, 체류일자를 짧게 잡아줬죠. 하여튼 미국은... 비행기 예약은 제가 알아서 해드릴게요."
"고마워요. 아,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는 제가 그냥 다녀볼게요. 사실, 많이 돌아다닐만큼 컨디션이 좋은것도 아니구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제가 힘들면 전화할게요."
"제가 바다를 끼고 달리는 코스를 잡았어요. 사막만 보고 가시면 너무 서운하실 것 같아서요. 저기 바다 보이죠? 저기가 태평양이에요. 수영씨가 저길 건너서 온거죠?"
"고마워요. 여러가지로 신경써 줘서... 정말 멋지네요." 수영은 지금 상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상우와 같이 갔던 그 바다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젠 사랑하는 사람으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그가 더욱 그리웠다. 숙소에서 용기를 내어서 상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저씨, 저에요. 수영이요."
"어, 그래." 상우의 목소리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건 왜일까?
"지금 바쁘세요?" 수영은 당연히 아니라고 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조금 바쁜데.. 지금 손님이 계시니까 나중에 전화를 할래?"
"네..." 전화를 끊었다.
'아저씨.' 상우가 이렇게 전화를 받은 적은 없었다.
'내가 미국에 온걸 잊었을리도 없는데...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정말 사막뿐이죠?" 윤희가 말했다.
"네. 정말 끝없는 사막이네요."
"근데 왜 이 곳이 그렇게 오고 싶으셨어요? 미국하면 가 볼 곳이 많은데.."
"그냥 이 곳을 다녀가야 할 것 같았어요. 언젠가 신문에선가 이 곳에 가면 사막화가 이루어 지는 곳이 있대요. 사막 안의 사막 그 곳이 보고 싶었어요. "
"아, 거기요. 이 길로 가면 거길 지나가요. 한 30분쯤 달리면 되는데.. 근데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아직은.."
"정말 멋있네요. 저 혼자 좀 걸을게요."
"네."
수영은 차에서 내렸다. 100미터쯤 자갈길을 걸으니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땅이 나왔다.
'나는 왜 이 곳에 오고 싶었을까?'
수영은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았다.
'그래 이건 나야. 사막 속의 사막.. 그래 나는 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거리를 온거야. 내가 보고 싶어서...'
수영은 잠시동안 상우를 잊고 자신만 생각했다.
'근데 왜 나야? 왜 나냐구? 내가 뭐 얼마나 나쁘게 세상을 살았다고? 왜 나인가 말야. '
지난 2월 우연히 들른 병원에서 임파선암이란 결과를 들었을 때 수영은 담담했다.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암이 전신에 퍼져 있어서 치료가 어렵다는 얘기를 할 때도 그래서 1년 6개월정도의 기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를 할 때도 약물치료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치료의 전부라고 했을 때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듣는 듯 담담했다. 하늘을 원망하거나 누굴 원망해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 서서 수영은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왜, 나는 행복하면 안 되냐구요?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어요. 그 사람의 아이도 낳고 싶고, 같이 여행도 다니고.. 같이 영화도 보고.. 소박하게 살고 싶단 말예요." 수영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흘끔흘끔 쳐다보았지만 상관없었다. 울음은 마음 속 응어리들을 풀어주는 도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더니 속이 시원해졌다. 무언가 답을 얻은 것 같았다.
'그래, 다시 시작해 보는거야.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
수영은 돌아가는데로 상우에게 모든 걸 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잠시동안이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실함이라는걸 수영은 너무도 먼 곳에 와서야 깨달았다. 더 이상의 여행은 무의미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열이 있더니 집에 들어서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병원에 연락해서 앰블란스를 불렀다. 잠깐 입원했다가 퇴원해야지 했는데 보름이 지났다. 조심하란 주치의의 말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상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저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 새해를 맞이했구나.'
"어, 수영아. 수영이도.."
"만나고 싶은데 시간 있으세요?"
"그래, 점심이나 같이 할까? 나도 할 얘기 있는데.."
"나 결혼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는데 상우가 수영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네?" 수영은 놀라서 들고 있는 커피 잔을 놓치뻔 했다.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