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날이 참 맑았습니다.
아직 다 피지 못한 겨울눈이 보이는데 요즘 날씨에는
어쩐지 반소매 옷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계절은 계절이라 바람을 쐬러 나오는 길에
안에는 반소매 회색 티셔츠를 입고 겉에는 까만 니트도 걸쳐 입었습니다.
내가 자주 들르는 가게에서 캔커피를 샀습니다.
언젠가 혜화역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대와 처음 캔커피를 마시던 날,
그대의 손이 늘 고르던 습관처럼 그 캔커피를 꺼내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겠지요,
음료수 하나를 고르는 데도 몇분을 고심하던 내게도
으레 마셔온 듯 그 캔커피를 고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커피를 한 손에 쥐고 틈틈이 목을 축여가며 몇 걸음을 더 옮긴 곳에는
새로운 엽서가 자주 들어와서 내가 좋아하는 문구점이 있었습니다.
그 문구점에 들러 오늘은 엽서가 아닌, 편지지를 하나 샀습니다.
종로의 영화관이 모인 길을 걸으면서였는지,
길 옆 팬시점 진열대에 놓인 어떤 인형을 보면서 그대가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말하던 기억이 났습니다.
마침 그 캐릭터 그림이 그려져 있는 파란 바탕의 편지지가 눈에 띄어
그 편지지를 골라보았습니다.
다시 문구점을 나와 조금 더 걸으려니까
매일 지나다니던 동네의 골목길에 새로운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는지, 엄마가 단골로 다니시는 어느 미용실이,
까만 바탕에 흰 글씨이던 옛 간판을 내리고
짙은 고동색 글씨에 낙엽무늬까지 입은 새로운 간판을 달았습니다.
전엔 '새치와 꺼먹머리' 라는 이름이
다소 촌스러워 보이더니 새로운 옷을 입은 간판에서는
어쩐지 그 이름도 정겨워졌습니다.
그 미용실과 제과점 사이에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빌라에는 언제 그렇게 자랐는지
푸른 담쟁이덩굴이 족히 3층은 될 것 같은 높이까지 자라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잎마다 햇빛까지 내려
그 녹색의 잎이 한결 더 싱그러워 보였습니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
미처 내지 못한 연체료가 있어 피해다니곤 하는
비디오 가게 쇼윈도에도 새로운 영화 포스터가 붙었습니다.
오늘은 그 비디오 가게 쇼윈도 앞에 서서 자꾸 웃음이 났습니다.
언젠가 컴퓨터 속의 작은 대화방에서
내가 여자 주인공이 되고 그대는 남자 주인공이 되어
몇 마디 대사를 주고받던 그 영화가 기억이 나는지요.
바로 그 영화의 포스터가 비디오가게 창에 붙어서는
나의 발목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심코 들어가 그 테잎도 찾아 보았지만
벌써 다녀간 누군가의 손에 들려갔는지
5개나 되는 그 테잎들은 빈 곽에 '대여중'이라는 스티커만 붙이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연체료만 내고 괜히 생돈을 쓴 것 같아
못내 씁쓸한 웃음을 웃으며 나와야 했습니다.
그렇게 동네를 두 바퀴쯤 돌았나 봅니다.
집에 들어가는 길목에 놓인 나무 벤치에서 잠깐 걸음을 쉬었습니다.
그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지하철역에서 내려 시작되는 그 길로부터
이 벤치에 도착할 때까지 한 10여분쯤을
나는 그대와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는 습관으로 채우곤 했었지요.
여기까지 다 와서도 선뜻 끊지 못하던 전화기를 들고
한 편으로는 통금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한 편으로는 아쉬워 마지 못하는 그대의 목소리에
마음 졸이며 잠시 앉아가던 기억이 향기롭습니다.
지난 안타까운 마음을 접어 나는 다시 걸음에 실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들어오면서
이상하게도 오늘 걸음이 무거웠던 것만 같아 마음이 따라 무거워졌습니다.
아마도 아침에 눈을 뜨면서 준비한 첫말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내내 궁금했던 그대의 한 끼 식사에 대한 염려와,
잠시 걷는 동안 그대의 기억들이 다녀간 빈 자리의 채울 말들이
미처 그대에게 도착하지 못한 무게를 내 하루의 끝에 놓아두었나 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늘 이렇듯 적당한 정도의 그대의 무게가 있어
하루의 숨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어느 날, 그대의 무게가 흐트러질 틈도 없이
숨을 무겁게 하는 하루도 있었지만
그런 날이라고 굳이 숨을 고르느라 힘겨워하지는 않습니다.
조용히 그대와 함께 듣던 음악에
한 줌씩 한 줌씩 그대의 무게를 덜어내다 보면,
어느새 그대는 내일 나의 아침에 내려줄 햇빛 한 자락이 되었습니다.
벌써 밤이 깊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나의 하루를 찾아와 준 그대에게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아침에 첫 눈을 뜨는 순간에 만난 그대의 얼굴로부터,
움직임이 닿는 곳마다 일어나는 그대가 보내 준 기억으로부터,
하루를 마감하며 맺는 말속에 담은 그대의 이름으로부터
나의 하루는 한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넘쳤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가 잠시 여행을 떠나던 그 길목에 나와
그대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기다림이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합니다만
사랑, 그 처음의 모습에도 채 익숙해지기 전에 찾아 온 기다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 하루의 끝에 놓이는 무게의 크기도
어쩌면 기다림에 그을은 마음이 어느 즈음에선가 털어놓은
잿더미의 크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늘 그만큼의 무게를 가지기에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겠지요.
그래서 나에게 그대의 무게는 이렇게 행복이라는 찬사가 되고,
그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게 하는가 봅니다.
오늘도 이만큼의 무게를 덜어낸 기다림에 마음 뿌듯하게 돌아갑니다.
그럼 그대...
하루의 모든 피로와 한숨이 모이는 시간,
아무쪼록 편안한 잠자리에 들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