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냥 집으로 와버렸다고? 한마디도 안해주고?"
우리 멤버중 학교를 아직 오년째 다니고있는 미호만 빼고 나머지는 다들 소셜 액티비티에 무진장 바쁜터라 이렇데 한꺼번에 모이기가 쉬운일이 아니다.
좀 특이한점은 다른 여인네 클럽처럼 카페같은데서 죽치는걸 다들 싫어하는터라 모이는곳이 어디 옷집이나 서점, 레코드 점이다. 철칙은 음식을 팔지 않는 단순 음료 판매점은 가지 않는다는 ...
"야야~ 그렇게 입만 열면 거짓말인 남자는 생각할 가치도 없는거 아니냐? 내가 전에 말했지?
거짓말도 봐줄순 있어.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베이스드온 러브인 거짓말까지라니까~
걔는 좀 너무하다야~"
각자 취향대로 씨디를 고르느라 갈라져서 개인플레이 한지 한 한시간쯤 되었나?
나는 재즈코너에서 씨디는 안보고 미호랑 떠들어대고 있다.
말했었나? 고미호. 명석한 두뇌와 연애에 있어 냉철한 판단력은 전혀 별개의 것이란것을 몸소 보여주는 이시대 착한 여자 컴플렉스의 대명사.
"언니 나 한심해?"
"한심해! 그런놈을 못끊고 있는거 한심하고, 시간남아돌아 그런놈이나 만나는거 한심하고.답알면서도 꼭 사람들 붙들고 징징짜는것도 한심하고!"
아까부터 레드핫 칠리페퍼스의 무슨 음반을 못찾아 투덜대던 수리가 옆에 와 참견이다.
"야야~ 좋은말 못들으니까 고만하자~"
수리가 와서 이번엔 해리코닉주니어가 잘 안보인다며 투덜대기 시작하자 조용히 미호를 끌어당겼다.
수리의 거침없는 말이 꼭 미호를 종내는 울리니까..
빌리 할리데이의 오래된 앨범을 골라들고 잠깐 상념에 빠졌다.
왜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가?
그리고 왜 나쁜 남자인줄 알면서도 못헤어지는지...?
이건 현명하고 안현명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여자들이 겪는 problem이 아닐까?
어쩌면 괘변같을진 몰라도 이건 여성 본연의 모성애와 관련된 문제인지도 모른다.
돌봐줄 필요가 있는남자에게 더 끌리는.. 또는 자기능력 과대평가증.. 그나쁜남자를 고쳐서 개과천선시킬수 있다는 이상한 자신감으로 부터 생산된 애정..같은 문제는 아닐까?
"아~ 씨발 뭐이렇냐? 덩치는 열라 큰데 있는 씨디가 없네~야~ 가자!"
비교적 조용한 실내를 가르는 칼칼한 수리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귀를 때렸다.
"헉.. 언니 .. 수리언니 요새 왜저래? 욕 너무 많이 하지 않아?"
심약한 미호는 흠칫 내 팔을 잡아댕기며 붙었다.
"쟤 진짜 왜저래? 스티븐가 뭐시긴가 하는 재미교포 양아치랑 붙어다니더니 아주 입이 걸레가 다 돼었다야~"
오로지 댄스뮤직만을 고집하는 강수언니도 옆에 와있었다.
수리는 요즘 힙합음악 프로듀싱을 하는 스티브라는 남자를 만나는 중인데 그이후 아주 입이 거칠어졌다. 도도한 외모와 달리 욕을 해대는 자기를 보고 놀래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는듯.
"언니 냅둬~ 그남자랑 헤어지면 또 제자리로 돌아온대니까..."
오수리의 변덕을 너무 잘 아는 나는 그녀가 어떤짓을 해도 별로 놀랍지가 않다.
"그나저나 언니 진짜 안갈래?"
미호는아까부터 정말 용한 점장이가 하는 점집을 알아냈다며 다음주말에 가자고 졸라대고 있다.
"알았어~ 가 ~ 가~"
심약한 대신 아주 가늘고 질긴 고집을 가진 그녀를 어찌 내가 당할소냐.
"혜초씨~ 전화오자나~"
밤 9시 넘어까지 하는 야근은 늘 그렇듯 피곤하다.
음악을 들으며 하느라 전화벨 소리를 못들은 모양.
모니터에 팝업되는 쪽지를 보고서야 백에서 핸드폰을 서둘러 꺼냈다.
"뭐.. 어디라고? 헉.. 왜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진지한 호빵맨이다.
일단 근처로 왔단 연락에 잠깐 다녀온다고 알리고 사무실을 나서며 엘레베이터에 올랐다.
의아해하며 엘레베이터에 오른 나는 갑자기 픗~ 웃음이 났다.
야근을 하는 여인. 그녀를 깜짝 방문한 남자.
만약에 사랑하는 사이라면 얼마나 감동스러운 작은 이벤트인가.
그러나 지금 호빵맨의 등장에 대한 나의반응은.. 뭐야? 왜온거야? 이정도 ㅡ.ㅡ
"이거 줄려고 여기까지 온거야?"
만나자마자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그가 내민건 까만 비니루 봉다리에 들은 샌드위치였다.
"응.. 우리학교 학생관 매점에서 파는건데.. 맛있어.. 가격도 싸고.."
"어...고.. 고마워.. 그런데 나 배안고픈데..."
사실은.. 그 샌드위치는 그것을 가지고 온 주인이 버스안에서 얼마나 깔아뭉개며 졸아댔는지를 마구 증명해대고 있었다.
굳이 지금 먹으라는 그의 강요를 힘겹게 뿌리치고 잠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그는 제일제당 햇반팀과 신라면 스프팀중 어디가 더 나아보이냐는 진지한 질문을 했고 전혀 문외한인 나는 그런식으로 팀이 나눠있다는 사실만으로 재밌어했다. 그리고 내심 이제 한번의 만남만 남았음을 즐거워했다.
"인제 세번정도 만나보니 어떠하니?"
"뭔소리야? 오늘까지 네번이지!!"
나는 한번을 까먹는 그에게 흥분하며 네번임을 손가락까지 굳이 펴가며 강조했다.
그때.. 내가 잘못본건가.. 순간 호빵맨의 작디 작은 눈에 실망이 스쳐지나간것은?
"그.. 그래.. 오늘까지 네번.."
"글쎄.. 좋은 친구 될것 같은데?"
나는 사귀는건 죽어도 안된다는것을 돌려 말하고 있었고 그후 호빵맨은 입을 다물었다.
"저기..나 일해야하거든? 가볼께"
"어.. 어 그래 미안하다 시간 뺏어서.."
"야~ 그래 잘가고~ 다음번엔 인제 순풍 전집 갖고 와야해~ 알았지?"
너무 분위기가 글루미한것 같아 애써 허풍스럽게 오버해서 큰소리로 호빵맨에게 순풍 얘기를 했다.
"그.. 그래.. 나 갈께~"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거.. 노력한다고 되는걸까?
이 논제는 15이후 끊임없이 연구해왔으나 답은 늘 '노'쪽인듯하다..
그리고 아직도 생각하지만.. 사랑을 결정짓는건 딱 보고 약 1분안에 시작되어지는거 아닌가?
사실.. 그당시 나는 호빵맨을 좋아해보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