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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저울질/공영식

페몬 |2004.04.14 17:31
조회 141 |추천 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무의미한 저울질>>________


무서운 꿈.?캄캄한 밤, 끝이 보이지 않는 진창길, 늘어진 좀비들의 행렬,

그 가운데에 나? 등골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흑기(黑旗)의 짓눌림보다 무겁고,

뒤룩뒤룩 시체의 눈알보다 소름끼치는 오한이 신경세포 위를 기어 다닌다.

그것은 끝없는 길, 영원에의 두려움. ‘끝이 없음’보다 더 절망적인 공포가 어디 있을까.


‘그 왜 있잖아, 예전에 같이 일했었던……’

다저녁때 친구 녀석의 전화를 받고 버스에 올라탔다. 억지로 기억해낸 후배의 휴가.

그래, 그런 아이도 세상에 살고 있었지. 토요일답게 거리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낮과 밤의 이질적인 풍경, 수백 번을 지나다닌 길, 왠지 낯선 건물들, 잠을 설쳐서인지

아니면 환몽의 여운 탓인지 나는 유폐된 유리상자 속에 한 마리 다람쥐로 놓여졌다.

유명한 패스트푸드 로고 앞에 도착했다. 바쁜 척 동동거리며 손목시계를 쳐다본다.

‘아직도 몇 바퀴가 남았군. 어서 돌아라, 이 녀석아.’

나는 소일거리를 찾다가 포기하고 지루한 몸짓으로 애인을 기다리며 애꿎은

전화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가씨들 틈에 끼여 교통순경처럼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친구와 함께 근처의 호프집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간단한 대화만 주고받은 채 말없이

맥주를 홀짝거렸다. 십 년을 함께한 친구. 아니, 친구라기보다 이제는 형제 같은 사람.

누군가가 우리를 유심히 지켜봤다면 저 두 사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봐,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말이 필요 없는 사이란 그렇게 오후 2시의 양 커플처럼

나른하다. 이런 말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교감의 권태라고나 할까? 질리도록

서로를 잘 알아서(잘 안다고 어림짐작해서) 의외성을 스스로 차단시켜버린 평행선

상의 거리. 슬프게도 그것이 관계의 본질적인 종착점이다.


해병대 특유의 도토리머리를 한 후배가 나타났다. 예쁘장했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워졌다. 웃기는 말이지만 정말 해병대다웠다.


친구와 나는 잔을 부딪치며 적어도 십만 번은 더 들었을 해병대 일기에 흥미로운 척

귀 기울였다. 예우를 다해서. 녀석의 말대로라면 그곳은 여전히 지독하게 끔찍한

곳이었는데, 얼마나 맺힌 게 많았는지 독기 가득한 눈을 번뜩거리며 쉴 새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이었다. 하지만?여느 해병대원이 다 그렇듯이? 자신을

비하하는 흉악한 말투나 군을 겨냥한 노골적인 혐오에서도 은근한 프라이드가 느껴

졌다. 나로선 골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이해 못할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들었다. 살아있다면 올해 열아홉 살이 되었을 그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고 한다. 유서도 없는 갑작스런 죽음. 죽기 전날

여자친구와 다툰 것 때문이었을까? 좀 엉뚱하긴 하지만. 나와는 별로 친분이 없는

아이였지만 단지 얼굴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경주마들이

힝힝거리며 뇌 주름 사이를 마구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 이작품은 도전하는 젊음을 후원하는 기업 사파이어에서 후원해 주셨습니다.


후배와 친구는 ‘그깟 일’로 자살한 망자를 안주거리로 삼아 마구 씹어댔다. 죽을

용기로 살 일이지 라던가 불효자식, 약해빠진 놈 따위의 쓸데없는 참견을 늘어

놓으면서. 그렇다, 그건 정말 쓸데없는 참견이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살아있는 것이

죽음보다 낫다는 거지? 왜 죽을힘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거냐고. 자동차에 치여 돌아

가신 분은 천국에 가고 자살한 놈은 지옥에 가야 마땅한가? 참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자살예찬론자는 아니다. 살고자하는 욕구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예수 할아버지만이 어찌할 수 있는? 맹목적인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당연히 잘 살아가는 것이 순리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을 뒤늦게 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그런 사람들이

안주거리가 되어야 한다면 왜 저 유명한 예술가인 헤밍웨이나 쳇 베이커는 스스로

삶과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선택받은 자들처럼 추켜 세우냐는 말이다. 심지어

예술가들에게 자살이란 ‘치열한 고뇌 끝의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 내지는 ‘초탈의

견지에서 바라본 유일한 탈출구’로까지 비춰지는 것이다. 그렇게 상황이 비틀어진

데에는 소위 평론가라는 사람들의 잘못이 크다. 실제로 나는 악평을 먹고 살던

예술가나 배우가 죽은 뒤에는 신격화되는 것을 많이 봤다. 유쾌한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에 의하면 평론가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작가가 어서 빨리 죽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지 않는가.


몰이해의 트랩에 걸려든 사자들이 재미삼아 손목을 그어버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감정을 배신할 실연의 아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배고픔, 죽을 때까지

육체를 옭아맬 병마, 그런 엔딩 없는 착각의 드라마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바로 영원에의 공포가.


역설적이게도 죽지 못하는 이유 또한 사후의 혹시 모를 영원성 때문이다. 원초적

본능을 무시한 채 애써 목을 매달았는데 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면, 혹은

영원히 그 짓을 반복해야 한다면 영혼은 아마 구제될 수 없는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관점에서 끝이란 오히려 희망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순간의 궤적들이 모여 삶을 이루고 그 끝점에 죽음이 있을 뿐, 근본적으로 둘 사이에

우열은 없다. 다만 생의 가벼움과 영원의 무거움 틈새에 막연한 물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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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a href=www.famousmonster.co.kr> www.famousmosnter.co.k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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