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麗)는 한 궁벽한 작은 나라였으나 능히 이를 막아냈으며, 제 나라를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적국의 군사를 격멸하여 거의 다 없앴으니, 이는 을지문덕(乙支文德) 한 사람의 힘이었다.'
이 구절은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에서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을 평가한 글이다.
수장(隨將) 우중문(于仲文)이 지휘하는 30만 5천여명의 대군이 고구려군의 총공격으로 몰살되어 살아 돌아간 병사가 2천 7백여명뿐이었던 살수대첩(薩水大捷)이었으니,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전공(戰功)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부식은 고구려를 '궁벽한 작은 나라'라고 지칭했다. 과연 그럴까? 최근의 연구는 김부식의 견식이 좁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전쟁은 '궁벽한 작은 나라'인 고구려의 결사항전(決死抗戰)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강대국 고구려와 신흥통일제국 수나라의 16년간 네 차례에 걸친 치열한 접전(接戰)이었다. 즉,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툰 두 강대국간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건국된 중원 왕조는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중화관(中華觀)을 국가 이념으로 하고 있었다. 고구려 역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훈적비(勳積碑)에서 보이듯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에 지금의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여수전쟁(麗隨戰爭) 무렵만 해도 고구려는 한반도, 중국 대륙, 일본 열도, 그리고 중앙아시아 일대의 상인들이 모여 무역을 하는 조양(兆陽)까지도 세력권에 넣으면서 경제적인 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중원을 통일하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覇者)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정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고구려 역시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수서(隨書)는 당시 고구려의 평원태왕(平原太王)이 이에 대비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나라는 서로 첩자를 보내 상대방의 전력을 탐색하고 사신을 보내는 외교전(外交戰)을 펼쳤다. 이런 외교전을 펴는 한편 수나라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개축해 북방을 대비하고, 대운하를 건설하여 군수 보급로를 준비했다.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음은 물론이다.
이런 긴장감 도는 정세에서 먼저 공격을 개시한 것은 뜻밖에도 고구려였다. 598년 영양태왕(嬰陽太王)이 말갈족(靺鞨族) 전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 지방을 선제공격한 것이다. 수(隨)의 전력을 살펴보려는 파상공세였다. 수황(隨皇) 문제(文帝)는 즉각 30만 대군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했으나, 장마와 전염병을 만나 아무런 성과 없이 퇴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살아남은 군사가 열에 하나둘밖에 안 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패전(敗戰)을 숨기려는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 누락일 가능성이 크다.
첫번째 고구려 정벌에서 실패한 이후 문제는 태자인 양광(楊廣)에 의해 살해되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즉위한 양제(煬帝)는 더욱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하고 612년에 전투요원만 113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살수대첩(薩水大捷)은 바로 두번째 여수전쟁(麗隨戰爭) 중의 가장 큰 전투였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들은 강이식(姜以式), 고지순(高支純) 등의 필사적인 수성전(守城戰)에 막혀 요동성(遼東城) 함락에 실패하였고,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으로 추정되고 있는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기발한 전략에 말려들어 30만의 별동대가 전멸되는 패배를 당했다.
그 뒤에 양제는 613년과 614년에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해야 했다. 문제(文帝)와 양제(煬帝), 2대에 걸친 수(隨)의 고구려 정벌은 완벽한 실패로 끝났고, 승전국(勝戰國)이 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강자로서 그 위치를 더욱 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