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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삼국의 건국설화에 숨어있는 세가지 이야기.

조의선인 |2009.03.30 20:03
조회 302 |추천 0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는 각기 자국의 건국설화를 지니고 있다. 그 설화(說話)의 내용이나 이야기 구조는 조금씩 다르다. 삼국이 형성될 당시의 정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인데, 건국설화는 창업세력의 지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실을 과장하는 측면이 있고 신비화하고 있으므로 이야기 자체를 믿을 수는 없지만, 그 배경을 파고들어 가면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얼추 짐작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설화는 부여(夫餘)에서 시작한다. 동부여의 국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사를 구하려 했다.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에 금색을 띤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발견하여 해부루는 이 아이를 아들로 삼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지어주었다. 금와는 해부루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국왕이 되었다. 어느날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 쪽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난다. 그때 유화는 천제(天帝)의 아들을 자칭하는 해모수(解慕漱)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해모수는 유화를 궁으로 데려와 출산하게 했는데, 괴이하게도 사람이 아닌 알을 낳았다. 놀란 국왕이 알을 길바닥에다 내다 버리게 했으나 개와 돼지 등 짐승들도 피하고 돌로 내리쳐도 깨지지 않아 할수없이 유화에게 돌려주어 부화하게 했다. 그러자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아이는 영걸스럽고 기상이 높았으며 궁술(弓術)이 뛰어나 주몽(朱蒙)이라 불리게 되었다. 금와왕의 아들들은 이런 주몽이 자신들의 왕위를 빼앗을까 두려워 주몽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주몽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을 갔는데, 도중에 재사, 무골, 묵거라는 사람들을 만나 성씨를 내려주고 부하로 삼았다. 강가에 이르러 추격병들에게 잡힐 뻔한 위기의 순간에는 몰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어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주몽은 졸본(卒本)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정한뒤 자신의 성(姓)을 고씨라 했다.

추모성왕(皺牟聖王) 주몽(朱蒙)의 설화는 고구려가 부여 계통임을 밝혀주고 있다. 부여의 지배계급 내에서 불화가 일어나 세워진 국가가 고구려인 것이다. 주몽 역시 금와왕 계열의 자손일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부여 계통의 다른 독자성을 부여하기 위해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를 조상으로 내세웠다. 주몽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러 가는 길에 만났던 물고기와 자라, 그리고 현인들은 그가 정착하고자 했던 지역의 토착민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특히 재사, 무골, 묵거는 이름까지 분명한 것으로 볼때 토착세력의 유력자를 대표한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주몽의 설화는 북방의 발달된 철기문화와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이주집단이 남하하여 기존 토착세력을 복속시키면서 연맹국가를 형성해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는 현실적인 내용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는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해 졸본부여로 온 주몽의 아들이다. 졸본부여의 국왕은 아들이 없어 주몽을 둘째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비류(沸流)이고 둘째가 온조(溫祚)였다. 그런데 주몽은 북부여에서 두고 온 부인이 낳은 아들인 유리(琉璃)가 찾아오자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에 자신들의 안위가 걱정된 비류와 온조는 열명의 신하와 백성들을 거느리고 한수(漢水) 지역으로 떠났다. 온조는 한수(漢水) 유역에 정착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정했다.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따로 무리를 지어 떠났다. 그러나 미추홀(彌鄒忽)은 물이 짜고 땅이 습해 살만한 곳이 못 되었다고 한다. 비류는 후회 끝에 죽고 백성들은 온조에게 다시 합류하게 된다. 그후 백성이 즐겨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현실성 있는 건국설화는 백제가 상당히 안정된 기반 위에 세워졌음을 말해준다. 지배의 정당성을 설화에 기대지 않고도 충분히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고구려 계통의 국가로서 앞선 나라를 벤치마킹(benchmarking) 할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열명의 신하의 보필을 받아 나라를 십제(十濟)라 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은 백제의 통치체계가 이미 어느 정도까지 구축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해 신라의 건국설화는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신화적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 원설화를 기록한 것이라 여겨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혁거세(赫居世) 설화는 사로국(斯盧國) 6촌의 지명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여섯명의 촌장들이 우두머리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하였다. 그런데 회의를 하다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보니 양산 밑 나정(蘿井)이란 우물가에서 빛이 나고 흰말[白馬]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촌장들이 그리로 가보니 알이 있었다. 그 알을 쪼개니 아이가 나왔다. 촌장들은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였지만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켰다. 아이가 박과 같이 생긴 신성한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박씨로 정하고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지었다. 6촌의 촌장들은 혁거세의 배필을 찾아주고하 하였는데, 알영이란 우물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용모가 엄숙했지만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 그러나 월성의 북쪽 냇물[北川]에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여자아이는 샘이름을 따 알영이라 했다고 한다. 이 둘이 열세살 되던 해에 남자아이는 국왕이 되고, 여자아이는 왕비가 되었다.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7일 뒤에 유체가 땅에 흩어져 떨어지자 왕후도 죽었다고 한다. 이 둘을 합장하려는데 이무기[蛟龍]가 방해해 머리, 팔다리의 오체를 따로 장사지내 다섯 능을 만들었다.

역사학자인 이이화(李離和) 서원대학 석좌교수는 이 설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먼저 양산촌에서 알이 발견된 것은 6촌연맹 중 주도권을 쥐고 있던 양산촌장이 자기 피붙이를 왕으로 추대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권력을 독점할 만큼 힘이 강하지 않았던 양산촌장은 나머지 촌장들에게도 크고 작은 권력을 나눠주는데, 설화의 복잡함은 권력구조의 복잡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왕비인 알영이 나왔던 우물은 고허촌인데, 이는 고허촌장에게 제2권력인 왕비자리를 내어주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건국설화가 이처럼 신화적 성격이 짙은 것은 당시 신라의 사회 발전 정도가 지극히 후진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신라의 건국시기를 삼국 중 가장 빠르게 잡고 있다. 고구려를 기원전 37년, 백제를 기원전 18년, 신라를 기원전 57년에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한서(漢書), 당서(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탄생한 국가가 고구려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맹국가 수준의 건국이라면 신라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부족국가 수준의 건국이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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