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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임게이(i'm gay) - #6

夜記(야기) |2004.04.22 13:51
조회 222 |추천 0

** 노장 그룹 COOL 이 VERY BEST 라는 베스트 앨범을 냈는데 참 대중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많이도 만들었던 가수란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군요. 참 오랬동안... **

 

 

 

CHAPTER 6.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

 

 

 

왠지 얼굴이 따가워서 가늘게 눈을 떴다가 커튼도 치지 않은 창에서 직격하는 햇빛에 질끈 눈을 감았다.

 

‘젠장, 머리도 아픈데… 에? 머리가 아프네? 왜 아프지?’

 

나른한 팔을 겨우 들어 얼굴을 가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해가 중천에 떠서 여름의 조짐이 보이는 따가운 빛으로 마구 내리쳤다.

 

‘근데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 거야? 얼씨구?’

 

움직이기 싫은 몸을 데굴데굴 굴려서 그늘로 들어왔다.

 

‘음, 이제야 좀 살 거 같군. 앗, 등에 배기는 이건 뭐야?’

 

잡은 그것을 힘겹게 눈앞으로 가져와보니 소주병.

야기는 그대로 소주병을 옆으로 굴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소주병? 집에서는 소주 안 마시는데? 몸이 이렇게 무거운 건 술을 마셔서라 치고… 으흠, 이렇게 움직이기 힘들 정도면 꽤나 마셨다는 이야긴데. 간만에 맛이 갈 때까지 마셨나보군. 어제도 옷 벗고 춤췄나? 요즘 들어서는 그렇게까지 마신 적이 없어서 그 버릇 고쳤는지도 모르겠군. 아아, 발가락 끝이 찌리릿. 좋아좋아. 물 마시러 일어나야 하는 것만 빼면 술마신 다음날의 이 나른한 기운은 행복해.’

 

“으음…”

 

턱!

 

‘뭐지? 흠… 내 허벅지에 올라와 있는 건… 좀 무겁군. 어디… 헐, 부드럽다. 뭐지? 내 피부가 이렇게 부드러웠던가?’

 

“……”

“…….!”

“아아악!”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해서 술을 마셨다. 준원이랑 같이 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집을 나왔다가 술을 마시면 좀 나아질까 싶어 홧술을 마시고… 그리고 효윤이를 불러냈었다. 말도 안 되는 꼬장을 부리면서 효윤일 볼러내서 하소연을 하고… 그리고 울.었.다!

효윤이 품에 안겨서 엄청 많이도 울어댔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효윤이한테 하소연을 해댔다. 주구장창, 밤이 새도록-

 

순식간에 다다다 덮쳐오는 기억의 파도에 야기는 신음하며 머리를 싸맸다.

어제 저녁부터 새벽까지의 상황이 서머리 노트처럼 깔끔하고 완벽하게 정리된다.

정말로 필기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

그리고 마지막 기억은…

 

“아아아아악~”

 

그러고 보니 야기의 방이다. 침대도 아닌 바닥에 끌어내린 이불을 감고 누워있었나 보다.

이불을 잡아당기던 야기는 그 끝에 걸린 정체불명의 물체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이불에 파묻혀 보이지는 않지만 저 갈색 머리카락은 어쩐지 야기가 가장 바라지 않는 어떤 상황을 암시해주는 듯 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가만히 이불을 아주 조금 끌어내린 순간 뽀오얀 등이 드러났다.

 

‘등이 저렇게 하얗다는 것은… 그것은… 맨살? 오우, 노우. 설마. 설마!’

 

그러나 저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등, 그리고 맨살. 자신의 머리지만 그렇게 정확하게 판단하지 않아도 좋잖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야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맨살…맨살… 그 말은 곧… 옷을 안 입었다는? 그러고 보니 이불 밑으로 보이는 종아리도 맨살. 왜 온통 다 맨살이냐? 왜! 잠깐, 호, 혹시?’

 

“꺄아아악!”

 

‘왜 나도 다 벗은 거야? 이 상황에서 그게 대체 뭘 암시하는 거란 말이야?’

 

패닉에 빠진 야기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깼어?”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것은 효윤이어선 안 됐다.

야기의 시뮬레이션으로는 거기에선 사랑스런 준원이가 수줍은 미소와 함께 햇빛을 받아 뽀얀 얼굴로 다가와야 했건만. 로맨틱한 헐리우드식 정석을 은근히 바라던 야기로서는 이 뜻밖의 사태에 넋을 잃었다.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으로 간신히 효윤이에게 시선을 맞췄다.

 

“으, 응. 일어났네.”

“어제… 너무 많이 취했었어.”

“그, 그랬어?”

“집까지 와서 쓰러져서 다행이었지.”

“내가 귀소본능이 좀 강하거든, 하…하…”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에 소름이 돟는다.

야기는 뭔가 불길한 예감과 격렬한 두통을 함께 느끼면서 효윤의 벗은 어깨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살결이 떠올리게 하는 어떤 기억, 절대로 믿고 싶지 않은 행위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듯 드문드문 얼굴을 들이민다.

정말로 기절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이 말도 안되는 기억에서 도망칠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할 터였다.

 

소리쳐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그건 자신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야기는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망연자실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한 것은, 자신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진실 앞에서 야기는 소리없이 절규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야기의 얼굴을 슬픈 눈으로 효윤이 바라본다.

그래도 혹시 했건만 이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노크소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상큼한 얼굴로 들어오던 준원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야기와 효윤도 얼어붙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 사람은 숨결마저 잃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마법을 깨뜨린 것은 준원의 손에 들려있던 쟁반이었다.

쟁반이 떨어지고 그 위에 올려놓았던 컵이 박살 났다.

그와 동시에 뜨뜻한 물이 야기와 효윤에게까지 튀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준원이었다.

달아나듯 방을 빠져나가는 준원을 야기가 따라간다.

알몸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준원을 쫓는 야기의 등을 보고 효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탐낸 죄는 이렇게 크다.

그래도 한번만 돌아봐 주었더라면… 그랬다면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 것을.

효윤은 아픈 몸을 일으켜 자신의 옷을 챙겨 입었다.

움직일 때마다 얼얼하게 울리는 둔탁한 통증으로 탓을 돌리고 조금 울었다.

 

“준원아, 내가 설명할게. 설명할 수 있어.”

 

간신히 가운을 걸치고 준원의 팔을 잡아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집밖으로 뛰어나갈 것 같은 준원을 붙잡고 야기는 애원했다.

 

“설명? 무슨 설명? 네가 게이가 아니란 거? 그 동안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거? 무슨 설명이 필요한데?”

 

팔을 뿌리치며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준원의 이성을 잃은듯한 모습에 야기는 겁이 덜컥 났다.

얼어붙은 준원의 눈동자. 그 눈에서 발사되는 한기에 심장이 궤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이대로 준원이 가버리면 끝이라는 절박함이 야기에게서 용기를 끌어내 주었다.

 

“거짓말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다 이유가 있어… 그러니까…”

“거짓말에 무슨 이유가 있니? 나를 속이겠다는 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으면 말해봐. 나를 속이려고 했던 거야, 아니야?”

“그, 그건…”

“이거 놔. 변명 같은 거 듣기 싫어. 그 동안 재밌었겠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놓고 아주 즐거웠겠어.”

“아니야!”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저렇게 차가운 눈을 하고 다그치는 준원이를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상보다 몇천 몇 만배는 더 무서웠다.

원망과 분노가 섞인 준원의 눈은 감히 맞받지 못할 정도로 이글거렸다.

 

“그런 게 아니야… 제발 내 말을 좀 들어줘. 내가 거짓말을 한 건…”

“그만해! 제발 그만 둬. 듣고 싶지 않아.”

 

준원은 고집스레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마치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상처 받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웅크려 머리를 감쌌다.

작은 짐승이 상처 난 연약한 살결을 가리듯이 준원은 너무도 무력해 보였다.

야기는 차마 준원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야기는 자신이 준원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힘겹게 쌓은 사람과의 관계, 준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만든 그 관계를 자신이 망치로 두드려 깨버린 거다.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가장 준원이 안심할 때를 노려서 일부러 그런 것처럼.

높이 쌓아 올리기를 기다렸다가 정점에 섰을 때 휘둘러지는 운명의 낫처럼.

 

자신은 준원을 배신했다.

결코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미 충분한 고의였다.

이렇게 상처받을 줄은 몰랐어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야 했다.

준원이 말했지 않은가.

 

당한 사람만 불쌍하다고.

절대로 절대로 용서 못 한다고.

 

이렇게 가장 충격적인 방법으로 준원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준원을 충분히 이해하고 설득하려고 했다. 차근히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생각이었다.

그래서도 안 된다면 달게 처분을 받으려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이렇게 책폭탄을 날리는 건 상상의 어떤 부분에도 없었던 일이다.

 

그렇게 한 사람은 배신의 아픔으로, 또 한 사람은 진실의 복수로 한참 넋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후 준원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가려는 야기를 준원의 눈이 가로막았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고 으르렁대는 기분이 들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마. 듣지 않을거야.”

 

경고하듯 말한 준원은 지치고 아픈 표정이었다.

그 고통의 흔적이 너무 생생해서 야기는 정말로 아무런 말도 걸 수가 없었다.

준원은 야기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찰칵, 방문 잠그는 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야기는 바보처럼 또 울었다.

준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야기는 준원의 방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최악의 방법으로 알려졌지만 그래도 진심만은 이야기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자기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준원이 집을 나가버릴까봐 아예 방문 앞에 진을 치고 앉아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준원이 방에서 나온 것은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서였다.

저린 발을 억지로 일으킨 야기는 준원의 손에 들린 가방을 보고 절망했다.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한마디 말도 듣지 않고 떠나려는 준원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저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한번이라도 준원과 웃고 싶었던 것 뿐인데. 다시는 전처럼 말 한 마디 못한 짝사랑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었다.

 

처음은 그렇게 단순했었다.

원망할 자격 따위 자신에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그런 마음이 생기니 참 사람이란 간사하기도 하다. 엎드려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하지만 야기는 만일 준원이 들어만 준다면 엎드려 비는 것뿐 아니라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유만이라도 들어 준다면 뭐든 다 해 줄 수 있었다.

이대로 한마디 고백도 못해본 채 떠나보낼 수는 없다. 나중에 야기를 기억할 때 조금이라도 상처가 덜하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앞으로 이 일을 기억할 때 마다 상처가 덧나지는 않도록.

 

“갈 거야?”

“응.”

“아직도… 듣고 싶지 않아?”

“……”

 

준원은 조금 망설이는 듯 했다. 흥분이 가라앉고 차분해진 후라 갈등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야기는 그저 준원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잡을 방법이 없다는 것은 이미 깨달았다.

준원의 마음이 용서하지 못하는 한 잡아둬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서로에게 더 아픔만 가져다 줄 거라는 사실을 괴롭게 인정해야 했다.

 

그래도 한마디만 들어주었으면…

그것만이 이제 야기에게 남은 바람이었다.

그리고 준원은 고민을 끝낸듯 고개를 저었다.

 

“갈게.”

“준원아…”

 

야기의 손이 준원을 잡으려다가 허공에서 멈췄다.

안타까와 보이는 표정을 외면하고 준원은 문을 열었다.

 

“나머지 짐은… 나중에 가져갈게. 열쇠도 그때 돌려줄 테니까…”

 

등을 돌리고 선 야기의 등이 유난히도 여위어 보였다.

너무 작고 움츠린 어깨에 마음이 약해진다.

준원은 이를 악물어 겨우 야기에게서 눈을 돌렸다.

야기에게 한마디라도 더 건네게 되면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준원은 눈을 감았다.

 

반년을 같이 살아왔던 집…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정말 자신의 집 같았던…

눈을 감고도 찾아올 수 있었던 곳. 그러나 그 곳에서 지낸 시간들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온기와 다정함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모조리 다 거짓말로 만든 장소였다니…

기가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준원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돌아보지 않는 야기를 아프게 의식하며 준원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 순간 문틈으로 흘러나온 야기의 목소리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미안해… 준원아, 미안해…”

 

 

효윤은 방안에서 무너진 야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제밤처럼 격하게가 아닌, 간간이 끅끅대는 소리만 아니라면 우는 줄도 모를 작고 아픈 울음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다른 여자때문에 우는 사실 자체도 슬펐지만 이토록 절절한 건 야기가 저신을 위해서는 저렇게 울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엄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여자는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다고.

그때 효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더 행복할 거라고 반박했었다.

아무리 잘해줘도 마음속에 간직한 사랑이 없는 상대와 산다면 불행해질 거라고, 차라리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으로 가득찬 생활을 할 거라고 했었던가.

 

어리석어도 이렇게 어리석었을까.

 

어제밤 야기의 속삭임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았다.

아니, 기회를 탄 건 오히려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야기를 잡을 수 있으리라 조금의 기대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책임지라고 세게 나갈 생각도 했었다.

야기는 착하고 무른 사람이니까 얼마든지 옭아맬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야기의 그 속삭임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못 이기는 척, 술의 핑계를 대고 야기의 옆자리를 훔치려 했었다.

 

이렇게 참담한 패배일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시도도 하지 말 것을.

왜 말했을까. 술에 잠겨서 맛이 간 사람한테 왜 그런 고백을 했을까.

듣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할 사람인데…

아마도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야기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당할까봐 무서웠다. 한편으로는 빼앗아오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열한 방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효윤은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사랑을 차지하려다 오히려 튕겨나오고 말았다.

아침의 곤한한 야기의 얼굴, 당장이라도 패닉을 일으킬 듯한 안색에서 벌써 알아버렸다.

아니, 처음 깨어나 효윤을 보는 표정에서 이미 알아버렸다.

 

원망스럽고 화가 났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진 것.

야기의 마음을 뚫고 들어간 조금의 틈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는데 저 무정한 남자는 자기 사랑만 중요하다.

효윤의 존재도, 어제밤의 일도 저 남자의 머리 속에선 완벽하게 무시되고 있었다.

 

아침에 그 여자, 야기의 사랑이라던 준원을 본 순간 효윤은 패배를 자인해야 했다.

그때 일어나서 나가버렸어야 하는데…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눌러앉았다가 이 꼴을 당해야 하는 건지.

그래서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나 보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착각이라도 지니고 떠날 수 있었는데.

 

“내 팔자는 왜 이러냐.”

 

효윤은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하늘을 향한 채였다. 여기서 울기란 죽기보다 싫다.

아무리 비참하고 초라해도 절대로 울지는 않겠다고 결심하고 벌인 일이니까, 울지는 않을 거다.

 

“쳇, 누구는 공주고 누구는 향단이야?”

 

준원에게 애걸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저렇게 가슴 미어지게 우는 것보다는.

그래도 반한 것이 죄라고 자기도 모르게 야기가 측은해지는 걸 보면 참 못 말리겠다.

상처받은 사람이 왜 가해자를 걱정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좋아해서라지만 오체투지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끊임없이 부르는 준원의 이름, 한시도 쉬지 않고 속삭이는 미안하다는 말.

야기가 얼마나 준원을 좋아했는지 짐작이 되어서 효윤은 서글펐다.

저런 사람의 마음을 훔치려 했던 자신이 정말 어리석었다.

하나만 보고 하나만 향해 달려가는 외골수를 왜 눈에 담아버린 걸까.

그리고 왜… 바보 같은 짓을 했던 걸까. 그 일만 아니었어도 먼 훗날 웃으며 오늘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곁에 있어서도 안 되겠지.

 

미련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아직도 야기는 조각이라도 붙들고 품고 싶을만큼 탐나는 존재였다. 앞에 버티고 서서 기어이 자신을 보게 만들고 싶고 당연한 듯 옆자리를 차지해 살아갔으면 했다.

 

하지만…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일까. 마음이 여기 없는 사람, 속을 다 남한테 빼준 껍데기를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왜 나를 봐주지 않느냐고 평생 악다구니 쓰며 괴로워 할 자신은 없다. 그래서… 물러나는 거다. 아무리 좋아도 온전히 내것이 안 된다면 차라리 놓아주는 것이 서로에게 편한 길이다. 마음이야 지옥을 걸어도 기필코 가져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붙든 손에 힘을 빼지 않으여 할테지만, 그래서 남는 게 과연 무엇일까.

 

“사람 잘 만난 줄 알아. 나, 정말로 책임지라고 바락바락 소리지를 수도 있었어. 형 잡고 끝까지 안 놓으려고 했어. 그러면 형은 착한 사람이니까 어느 정도 내 자리도 인정해 줬을거야. 그거라도 얼마나 매력적인 유혹이었는 줄 알아? 다 내가 너무 착하니까… 그러니까 형 놓아주는거야. 알기나 해? 바보 깡통로봇.”

 

효윤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정말로 가야 한다. 더 이상 있어봤자 어리석은 미련만 잔뜩 남는다.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대 잖아. 조금 더 빨리 갔으면 좋았겠지만… 나도 내 사랑한테 변명 정도는 해야 하니까… 지금도 그렇게 늦은 건 아니야.”

 

중얼거리며 효윤은 다시 한번 야기의 방을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와 본 곳,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곳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효윤은 야기와 같이 있었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어느 순간에든 돌아보았을 때 잊혀지지 않도록, 좋은 기억으로만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효윤은 천천히 보이는 모든 것을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어제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살아갈 많은 날들 중 어제밤처럼 아름다운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을 테니까.

 

“후회 안 해.”

 

거울을 보며 효윤은 웃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야기가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등에 대고 효윤은 조그맣게 속으로 이별을 고했다.

서운하고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것 역시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선택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기에.

후회하지 않으니까… 절대로…

 

‘형 너무 아파하지 마. 잘 되라고는 못 빌겠지만 준원씨랑 이대로 끝이 아니도록은 빌어줄게.”

 

효윤은 문을 열다말고 다시 한번 주방쪽을 돌아보았다.

현관의 벽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효윤의 눈에는 야기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안녕…”

 

그리고 문이 닫혔다.

 

 

계속 되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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