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바지로 달려가는군요. **
CHAPTER 8. 아픈만큼 성숙해지고
일년의 시간이 흘렀다. 담담한 가을빛이 완연한 날이었다.
갈대로 온 레스토랑을 장식하고 커튼과 소파의 천도 가을을 닮은 황금빛과 어두운 톤의 자주색으로 갈았다. 한층 깊어진 느낌이 드는 것은 인테리어뿐이 아니었다.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킨 야기에게 직원들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야경이 가장 돋보이는 자리를 골라 정성을 다해 장식하고 파티쉐의 솜씨를 한껏 발휘한 예쁜 케잌을 놓았다. 촛불을 켜고 와인을 따른 후 야기는 문에서 망을 보던 직원에게 크게 사인을 보냈다.
직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들어오는 사람은 바로 현욱과 민석, 일년전 가게에 찾아와 야기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인물들이다. 못내 불안한 얼굴로 들어서던 두 사람은 서빙복장을 하고 테이블 옆에 서 있는 야기를 보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눈치 빠르게 그들을 자리로 안내한 직원이 야기와 눈을 맞추곤 윙크를 하고 곧 사라졌다.
“앉으십시오. 손님.”
야기는 생긋 웃어 보였다. 현욱과 민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세팅된 테이블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뭡니까?”
민석이 약간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현욱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동거 1주년을 축하합니다.”
놀란 눈으로 야기를 바라보는 현욱을 재촉해 앉히고 정중하게 의자까지 넣어주었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의 두 사람에게 야기는 와인을 권했다.
“샤또 마고, 97년산입니다. 오늘의 에피타이저인 거위간 테린과 주요리 안심구이에 모두 어울리는 고급와인으로 진하고 달콤한 향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현욱씨와 민석씨가 처음 만난 97년을 기념하는 뜻으로 골랐습니다.”
“형…”
현욱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자, 어서 촛불부터 꺼야지. 두 사람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행복하길 바라며 우리 파티쉐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니까 남기면 안 돼요.”
“고맙습니다.”
민석와 현욱은 떨리는 손을 맞잡고 야기를 보다가 입을 모아 초를 불었다.
그 모습이 영원하기를 야기는 남몰래 속으로 기원했다.
단 둘만의 저녁식사를 마칠 때까지 야기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자리를 지켰다.
두 사람은 다정하고 따스하게 지난 일년과 앞으로의 삶을 이야기했고 야기의 입가에는 어느새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생애 잊지 못할 저녁식사였습니다.”
민석의 치하에 야기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천만의 말씀을.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니 최고의 칭찬입니다.”
“형…”
다가온 현욱이 힘껏 야기를 끌어안았다.
곤란해 하면서도 야기는 현욱을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
“형… 정말 고마워. 지난 번 일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그런데도 나 형을 원망했었어. 정말 미안해.”
“바보 같은 소리. 자, 어서 가. 민석씨가 날 죽이려고 들기 전에 얼른 떨어져라. 나 지금 죽으면 울 사람 많단 말이야.”
“다음엔 우리 집으로 초대할게. 꼭 와줘.”
“물론이지. 기둥뿌리 뽑으러 갈 테니까 준비하고 기다려라.”
자꾸 뒤돌아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가에 서서 배웅하던 야기는 흐뭇한 웃음을 띄웠다. 그 모습이 한결 성숙해진 ‘부르고뉴’와 많이 닮아있었다.
“자아, 이제 정리하고 들어가볼까.”
휴일에 문을 열었으니 뒷정리와 청소는 야기의 몫이었다.
야기의 계획을 들은 쉐프와 파티쉐, 그리고 몇 명의 직원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자원봉사를 해 주었는데 뒷정리까지 맡길수는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휴일도 반납하고 개인적인 일에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기의 인사에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저렇게 맛있게 먹어주면 고마울 뿐이지.”
굳이 나올 필요없다고 말하는데도 기어이 나와서 직접 조리를 해 준 쉐프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마음좋은 아저씨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야기는 도와준 스탭들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화기애애하게 모여 앉아 와인으로 건배를 하고 막 일어서려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쉬는 날이라며 가게는 무슨 일이냐?
“너냐. 그럴 일이 좀 있어서.”
-애들 다 모였다. 얼른 뛰어와라.
“알았어. 먼저들 시작해.”
-새끼, 누가 사장 아니랄까봐 더럽게 튕기네.
“야, 니들은 마음 편한 학생 놈팽이 들이지만 난 먹여살릴 식구가 몇인 줄이나 아냐.”
싫지 않은 핀잔을 주고받으며 접시를 드는 야기를 희정씨가 가로막았다.
“여기는 저희가 치울 테니까 매니저님은 가 보세요.”
“그럴 순 없습니다. 쉬는날 나와서 도와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됐으니까 어서요. 일 못하는 매니저님 계셔봤자 손만 더 가요.”
단호하게 말하는 희정씨의 말에 할말이 없다.
저번에도 설거지를 돕다가 접시를 두장이나 깨먹었으니 반박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일.
야기는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담아 싱글벙글 웃는 직원들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제일 처음으로 용기를 주고 도와주었던 희정씨, 어느샌가 식구들처럼 든든하게 서로를 감싸 안아준 문형씨, 진수씨, 그리고 묵묵히 뒤를 받쳐주신 쉐프와 파티쉐까지…
웃는 얼굴들 뒤로 일년전의 아팠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일년의 시간이 그냥 지나간 것은 아니다.
결국 야기와 대립하다 못해 가게를 그만 둔 사람들도 있고 아직도 뒤에서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야기는 그 모든 사람들을 말없이 포용했다.
살면서 늘 마음에 맞는 사람들만 만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일인지, 그렇지만 보람있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야기는 가게를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준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잊을 수 없는, 어쩌면 평생 간직하고 가야 할 그리움을 떨쳐내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가끔 마음속에서 꺼내 어루만지고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시절의 사랑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추억으로 간직하는 한 애틋함은 늘 야기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일년 전 죽고 싶을만큼 힘들었던 그때, 차라리 가슴을 잘라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팠던 자신에게 일년뒤에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귀뜸해 주었더라면…
그랬다면 그때의 자신은 조금 덜 아팠을까.
아니, 오늘이 온 것은 그때 그만큼 아프고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곁에서 지켜봐주는 사람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견뎌낸 결과이다.
그러니까 그 아픔은 견뎌낼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준원아, 네 덕택에 이야기 사람됐다. 그치?’
솟아나는 그리움을 담담하게 웃음으로 묻고 시동을 걸었다.
즐거운 친구들과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