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에필로그-야기 나가다
효윤은 잠깐 야기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새 보고 싶으냐?”
놀리는 말씀을 하시면서도 근엄한 할아버지의 얼굴에 효윤은 피식 웃었다.
늘 저런 얼굴로 말씀하시지만 이제는 그 표정이 뜻하는 바를 적당히 알아 맞추게 된 효윤이었다.
아직도 야기는 할아버지를 어려워하는 눈치지만 -그건 야기뿐 아니라 집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효윤은 의외로 장난기 많은 할아버지가 편했다.
집안에서는 효윤을 두고 철없는 종부가 어르신을 꽉 잡았다며 신기해하는 모양이지만 효윤은 단지 할아버지의 변함없는 가면 아래 숨겨진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된 것 뿐이었다.
친가 외가를 통틀어 조부모님이 안 계신 효윤에게 처음 할아버지를 비롯한 어르신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종가집의 큰 어르신들 하면 다가오는 느낌부터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야기를 따라 집안에 인사드리러 올때는 차 안에서 청심환을 두알이나 먹어야 했다.
덕분에 헤롱거리느라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긴장이 풀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풀려서 그만 할아버지 앞에서 졸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으니…
잊고 싶은 일 순위의 과거건만 집안 사람들은 아직도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한다.
덕분에 시댁에서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를 수가 없지. 모르는 사람들만 만나면 다들 그 이야기 해주느라 바쁜걸.
“음식은 어떠세요? 입에 맞으세요?”
야기가 맡은 ‘부르고뉴’ 강남점은 현재 승승장구중이다.
프랑스 정통을 표방한 레스토랑이 패밀리 레스토랑을 젖힌 건 여기가 처음이란다. 전국에 ‘부르고뉴’가 열 세군데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강남점은 늘 1, 2위를 다투는 노른자위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픈때부터 멤버로 일해왔던 효윤은 지금의 가게를 볼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이상하겠지만 이곳은 유난히도 심했다.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일이 터질 때마다 속이 상해 울기도 많이 울었고 화도 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 그리고 이렇게 좋은 장소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 그리고 그 뒤에서 야기가 얼마나 묵묵히 일했는지도 안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므로.
힘들어하는 야기에게 어깨를 내밀어 지탱해 준 것이 바로 자신이니까.
안 좋은 소문에 시달리던 야기가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저 성실하게 보여준 모습만으로 사람들은 결국 그를 인정했다. 그 이면에서 야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만 야기는 정말로 그 시간들을 견디어 냈다.
그래서 효윤은 이 곳이 좋았다.
야기의 노력과 땀으로 이루어져 이제는 야기와 닮은 이 공간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효윤은 어깨를 으쓱대며 할아버지에게 이 따뜻한 곳을 마음껏 자랑했다.
그런 어린 손부가 귀여우신듯 할아버지는 여느때의 찌푸린 얼굴로 즐거워하셨다.
“몸조심하고.”
“명심할께요. 그나저나 비가 와서 어떡해요.”
“걱정마라. 조군 이제까지 한번도 사고낸 적 없다.”
“아저씨야 보증수표지만 비가 오니까 드리는 말씀이죠.”
“날이 차다. 어여 들어가봐.”
“가시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아저씨, 부탁드려요. 휴게소에 들러서 꼭 쉬고 가시구요.”
비도 비지만 할아버님이 아무리 정정하시다 해도 육십이 넘은 노인이시다.
할아버님을 십년째 모시는 아저씨가 효윤보다야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당부하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인가보다. 다행히 아저씨는 어린 종부가 할아버지 걱정에 잔소리하는 모습이 싫지 않으신지 웃으며 받아주신다. 늘 선한 얼굴로 웃는 아저씨의 목례에 답하며 할아버지의 차가 아파트 밖으로 나갈 때까지 효윤은 자리를 지키고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나저나 형은 잘 도착했을까.’
할아버지께서 가게에 들르시고 싶어하시는 눈치길래 점심겸해서 갔더니 야기는 막 나가는 길이었다. 준원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 같았다. 화창한 날이었는데 야기가 나가고 난지 한시간도 안 돼서 비가 내리기 시작해 조금 걱정이 됐다. 고속도로 탈텐데 비가 와서 어쩌나 싶어 발을 구르다가 효윤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웃어버렸다.
시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나보다.
절대로 화해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야기와 준원이 만나게 될 날이 오는가 하면 자신이 이렇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야기의 안위 걱정을 하게 된다. 전의 효윤이었다면 웃는 얼굴로 보내놓고도 뒤돌아서서 불안해 했을테지.
야기가 준원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효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야기는 그녀를 생각했다.
보고 있으면 부러워 샘이 날 정도로 야기는 준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도 지금 효윤의 마음엔 어떤 의심도 없다. 어느새 자신은 야기를 이렇게 믿을 수 있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라도 야기는 내 사람이라고 말할 자신이 생긴 것일까.
그리고 그도 그러리라는 것을 이렇게나 확고하게 알 수 있는 걸까.
빗발이 점점 거세어진다. 동전알 만한 빗방울이 베란다 창에 부딪혀 부서져 흐른다.
아무래도 비가 더 내릴 모양이다. 효윤은 오랜만에 만나는 비가 반가워 손안에 따끈한 찻잔을 쥐고 의자에 앉아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 비를 감상했다.
비는 특별한 기억을 불러온다. 그날, 참담함과 체념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날의 저녁에도 이렇게 비가 내렸다.
효윤은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는듯 조금 이마를 찡그렸다가 천천히 찻물을 머금었다.
CHAPTER 11. 에필로그- 1년하고도 얼마 전, 비내리다
아무리 단념하자 마음을 먹었어도 사람 마음이 의지대로 될 리는 만무.
방에 도사리고 앉은지 딱 한달이 되는 날이다.
효윤은 어딘지 현실감이 없는 머리로 멍하니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거짓으로라도 부모님의 마음을 달랠 위로는 불가능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가 야기의 멱살이라도 잡고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의연한 척 착한 척 물러나왔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다.
구질구질해도 좋고 더러워도 좋으니 그 밤을 구실로 야기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야기한테 매달려서 지긋지긋해할 때까지 안 놓을 수도 있었다.
미련이면 어떻고 죄의식이면 어떤가.
가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렇지만 그래야지 싶어 벌떡 일어났다가도 이내 주저앉고 만다.
자신은 교활한 인간이라서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일 같은 건 역시 무리다.
다른 걸 다 포기하고서라도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니까.
협잡꾼이 되어 가질 수 있는 건 껍데기뿐이니까.
그걸 알았던 거다. 야기가 그날, 그 여자한테 매달리는 것을 보고 질려버렸다.
아무리 해도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지레 포기해 버리는 게 편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야기한텐 준원이 그랬고 효윤한텐 야기가 그런 사람이니까.
매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거기에 있는 한 자신은 야기를 가진다 해도 절대로 만족하지 못할 테니까.
그럼에도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꽃은 하루에도 열두번씩 효윤에게 불길을 지폈다.
달려가 책임지라고 소리치고 매달리고 싶게 만든다. 껍데기면 어떠냐고, 언젠가는 자신을 봐줄 날이 있을 거라고. 그는 그렇게 모진 사람이 못 된다고 스스로를 충동질한다.
용기가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효윤에게 그런 용기는 없었다.
한평생 야기의 등을 볼 자신도 없을 뿐더러 그의 마음 한곳에 간직된 무언가를 끊임없이 질투할 추한 얼굴을 가릴 에너지 또한 없었다.
그래서 이 모양이다.
이렇게 방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이 불길이 잡히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누가 미운지 모른다.
그것이 자신인지, 야기인지, 그도 아니면 준원인지. 목적도 없이 마냥 기다리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기를. 누구에게 해야할지도 모르는 기원을 하며 효윤은 그렇게 꼬치안에 틀어박힌 벌레처럼 스스로의 몸을 더욱 둥글게 말았다.
“효윤아?”
노크 소리와 함께 효윤의 엄마가 들어왔다. 효
윤은 아무렇지도 않은척 웃는다. 이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니까.
이런다고 해서 엄마가 속아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웃어보이는 것만이 미안함을 가릴 최소한의 예의다.
“커피마시자.”
“응. 비오니까 커피향이 참 좋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비오는 창을 바라보면서 진하게 풍기는 커피향을 음미한다.
좋은 비가 오면 엄마는 늘 이렇게 딸이랑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곤 했다.
그럴 때의 엄마 표정이 너무 좋아 비가 오기를 기다렸던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 딸이 엄마에게도 말 못할 비밀을 가지게 되었고 엄마 역시 짐작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신다. 차마 엄마한테는 털어놓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욱 후회하지 않는다.
그 일을 후회한다면 그야말로 엄마한테는 불효녀가 되는 거니까.
소중히 낳고 길러주신 엄마와 아빠를 한꺼번에 배신하는 일이 되니까.
“우리 딸, 요즘 통 힘이 없어 보여서 걱정이야.”
미소를 띈 얼굴에 조금 고통의 빛이 지나간다.
효윤은 엄마한테 얼마나 죄를 짓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건 좋은데… 너무 걱정시키지는 마.”
“응. 이젠 안 그럴게요.”
“그래, 밖에 나가 햇빛도 쐬고 사람들도 만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더 크게 생각되는 법이야.”
엄마가 찻잔을 챙겨 일어났다. 조
그마한 몸 어디에 이렇게 큰 마음을 숨기고 계시는 걸까.
찡하게 뜨거워지는 코끝 때문에 효윤은 등을 돌린 상태 그대로 잠깐 얼굴을 감쌌다.
눈물샘이 고장나 버린 걸까. 툭하면 눈물부터 난다.
박효윤 인생 20년에 눈물하고는 거리가 멀었었는데…
그 동안 아껴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버리나 보다.
‘나, 엄마 딸로 태어난 걸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
“미안해, 엄마.”
엄마는 잠깐 멈춰섰다가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효윤은 고개를 돌려 엄마와 같이 바라보던 창밖의 빗줄기를 응시했다.
그토록 차가와 보이던 가을비는 이제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다음날로 방을 나갔다. 웅크리고 앉아 있어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달이라는 시간을 자신에 대한 동정과 연민에 빠져 내버렸다.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은 일이었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짓은 그만두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결과와는 상관없이 하고 싶어 한 일이다. 그
밤의 추억은 아마도 효윤의 안에서 아름답게 채색될 것이다.
자신이 그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그리고 효윤은 그 시간을 청춘의 가장 귀한 한때로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고나니 그 동안 어리광을 부린 일이 창피해졌다.
괴로움을 혼자서 이기지 못하고 주위사람들에 폐를 끼치고 알아달라 떼를 쓴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말없이 지켜봐주신 부모님께는 한없이 감사한다.
다행히 새학기가 시작되는 중이라 학교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일주일 정도니까 아직 수업도 제대로 진도를 나가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아르바이트를 그만뒀으니까 이제 시간이 남아 돌겠네.”
신입생이 되어 대학생활을 즐길 새도 없이 바로 시작한 ‘부르고뉴’의 아르바이트 때문에 늘 시간에 쫒겨 살았다. 학생이라는 신분상 런치는 불가능했고 그래서 더더욱 디너타임을 빠질 수가 없었다.
특히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는 일손이 부족해서 시간날 때마다 런치에도 뛰어와야 했다.
겨우 가게가 궤도에 오르면서부터 훈련된 직원의 필요성을 절감한 형이 파트타이머를 모집하고 교육시키기 전까지는 직원들 모두가 비슷한 사정이라 불평할 수도 없었다.
파트타이머들이 제 구실을 하게 되어 가장 기뻐했던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본업이었으니 어땠는지 모르지만 효윤에게는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으니까.
여유가 생겨 좋아했던 것도 잠시, 신입생 때 과내의 그룹에 끼지 못한 효윤은 남는 시간이 별로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시간에 쫓겨 제대로 공부도 못한 1학년때보다 월등한 성적을 받은 것은 여유가 생긴 시간덕분이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공부말고는 별로 할일이 없었다는 비참한 뜻이기도 했다.
“에잇, 학원이라도 다녀야지.”
뭐든 해서 남는 시간이 없도록 할 테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 가고 싶었던 데, 다 다닐 거라고. 1년 넘게 죽어라 일한 돈도 쓸 시간이 없어 그대로 남겨두었다.
프랑스에 가보고 싶었는데… 여행이나 다녀올까. 아니, 차라리…
“어학 연수라도 갈까.”
효윤은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길게는 못 있어도 1년 정도는 버틸 것 같았다. 그리고 외로움 곳에서의 그 시간이면 고통에 무뎌지는데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문득 생각해낸 계획은 순식간에 당위성을 가지고 효윤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스케치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대학에 들어와서는 제대로 느긋하게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간신히 시험 대신 내는 작품을 완성한 것 말고는 정말로 오래 손을 놓았었다.
어차피 졸업하고 나면 프랑스로 유학이라도 갈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그럴거면 미리 가서 분위기를 익혀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언어도 일년 정도 배우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고 말야.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급속하게 마음이 기울었다.
여전히 자신은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씁쓸한 기분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약한 인간인지 깨달아야 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픈데 아프지 않다고 거짓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더 이상 괜찮다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효윤은 당장 유학원으로 달려갔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의 생활이라는 건 상상만으로도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조금 무리하면 1년 반도 가능할 것 같다.
1년으로 안 된다면 조금 더, 그리고 그걸로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못 잊는 수밖에.
언젠가 잊혀질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학기는 언제 시작하죠?”
“연수는 당장이라도 가능해요. 프랑스어에 아예 문외한이시라면 초급부터 다녀야 하니까 되도록 빨리 가셔서 분위기에 적응하는 편이 좋구요. 아니면 여유있게 다음 학기 시작에 맞춰서 가셔도 상관없어요. 삼개월에 한번 학기가 시작한다고 생각하시면 대충 맞을 겁니다.”
“어학원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가요?”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저희가 추천하는 곳은 기숙사가 딸려 있으니까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까지는 거기에 계시는 편이 도움이 될겁니다. 현지에서 생활하려면 아무래도 정보가 중요하니까요.”
상담을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장 휴학을 하고 날아가면 시간이 얼추 맞았다.
효윤은 정보지를 한 웅큼 안고 유학원 문을 나섰다.
마음은 벌써 프랑스로 날아가는 느낌.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효윤은 앞날을 설계했다.
야기를 잊는 일 말고도 할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를 걸었다.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걷고 있으니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아직 날이 더워서 효윤은 벤치에 앉아 손부채로 바람을 불렀다.
새삼 자신이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정념으로 괴로워하던 때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겠지. 누구를 지우고 새로 담는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조금 우스웠다.
그날 저녁. 효윤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연수 이야기를 꺼냈다.
조금 놀란 엄마와는 다르게 아빠는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효윤의 말을 듣고 계셨다.
“꼭 가야겠니?”
걱정스러워 하는 엄마의 얼굴에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나 효윤은 애써 웃었다.
“가고 싶어. 어차피 요즘 그림도 잘 안 되고… 학생일 때 나가는 게 훨씬 유리하대. 이왕 갈 거라면 미리 가서 둘러보고 싶기도 하고. 언어 문제도 있으니까 기회 될 때 가두면 좋잖아.”
“그래도…”
뭔가 더 말하고 싶어하는 엄마를 아빠가 말렸다.
자식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방임주의셨던 아빠다. 원하는 것은 하게 하되 안 되는 일은 절대 안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계신 아빠를 효윤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빠는 효윤의 편을 들어주었다.
“가고 싶으면 가야지. 그런데 말이다.”
아빠가 효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효윤은 조금 긴장하면서 아빠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가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네 스스로가 원해서 가는 것이라면 물론 찬성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네 방으로 도망치건 외국으로 도망치건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하고.”
도망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드릴 수 없는 게 슬펐다.
하지만 이건 도피로서의 도망이 아니다. 다만 조금 여유가 필요한 거니까…
잠깐 숨을 돌리고 혼자 서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다.
“갔다 올게요. 가서 많이 배우고 씩씩하게 지내다 올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믿는다. 아빠랑 엄마는 늘 우리 딸 믿고 있어.”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저는 참 행복해요.
“고마워요. 엄마. 아빠.”
계속 되야 합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