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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절한 남자(14)

리드미온 |2004.05.03 20:48
조회 5,676 |추천 0

"동업자한테 속다니요?"

 

그러고 보니 현수가 미국을 간다는 것이 사업 때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무조건 유학이라고 생각했었다.

더구나 중매를 해줬던 사람에게도 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 빨리 집을 내놓고 현금을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 등록금과 생활비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현수도 초면인 나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적어도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한국에 돌아올 기약이 없고 또 학업을 마치고 미국에서 자리 잡고 싶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긴 현수의 나이로 보아 미국에 유학 가기엔 좀 늙은 나이일지도 몰랐다.

 

"제가 올해 31살...무언가 해볼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미국에 가서 큰 일을 벌이겠다 생각했지요.

그러다 마침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며 같이 해볼 생각이 없냐고 했습니다.

그 놈을 믿었던 게 실수지요.

막상 미국 가서 보니까 그 돈 들고 제가 어디서라도 자리 잡으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돈만 날린 거에요?"

 

어쩌면 그 때 현수의 기분이 내가 진우와 맞닥뜨렸을 때처럼 난감하고 당황스러웠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엘에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녀석 연락이 안되더군요.

한인 타운 가서 물어물어 찾다가 알게 된 건 멕시코로 갔다는 거죠.

그것도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어요.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넓으니까 어디 있다고 해도 쉽게 찾을 수 없고 전 이미 한푼 없는 상태였고요.

일주일 가까이 고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오자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이란 것은 참으로 인간에게 가혹하다. 31살에 뭔가 해보겠다고 미국에 갔다면 적어도 희망찬 무언가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더 악화된 상태로 좌절해서 한국으로 돌아오다니....

 

"무엇보다 레종이 보고 싶었어요....^^"

 

무심한 레종....주인이 그렇게 얘기하는데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 침대 위에서 꾸물거리고 있는지 침대 이불이 봉긋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아..그래도 진우란 남자가 레종은 잘 챙겼어요. 제가 깜빡 속은 것도 레종 때문이었어요. 진우란 남자가 레종 이름도 알고 있고 무지 잘해줬어요. 저보다 더 사료도 잘 챙기고..."

 

"그 녀석...그냥 그런 짓을 할 친구는 아니고 혹시라도 나중에 나와 마주치게 되면 레종 핑계를 대려고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레종을 아끼는 걸 아니까..."

 

그 말에 웬지 나도 모르게 뜨끔했다. 나도 그걸 알고 월세를 깎았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진우란 남자의 말만 믿고...."

 

"그런데도 워낙 진우한테 여자들이 달라붙는다고 해야할까...은경이란...여자가 제가 가장 최근으로 기억하는데..."

 

은경이라면, 전에 이 집에 찾아와서 나의 뺨을 때린 여자다.

아아, 어찌하여 잊으라....

 

"네. 그 여자한테 저 뺨도 맞았어요...!"

 

"네?"

 

"이 집에 찾아와서 박진우를 찾더군요."

 

"결국 그 여자를 찼군요."

 

"그런 것 같았어요. 여자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예쁘고 교양도 있어 보이던데..."

 

"은경이란 여자 정말 괜찮은 여자입니다. 아마 진우한테 무지 잘했을 거에요. 그 여자 집안이 괜찮아서 데이트 비용도 거의 그 여자가 냈던 거 같고, 진우 그 자식이 꿇리기 싫으니까 여길 자기 집이라고 알려줬었어요."

 

어쩌면 이렇게 진실은 은폐되는 것일까?

진우는 은경이란 여자가 허영심이 심해서 호텔이 아니면 안된다고 해서 이 집에 데려 왔다고 했었는데...

그럼 나한테 접근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친구 컴플렉스가 심해요. 학벌 컴플렉스가 있어요. 그래서 똑똑해 보이는 여자들을 무지 밝히죠."

 

그제서야 나는 '영어하는 거 보고 반했다'라는 진우의 말이 떠올랐다.

 

"아..."

 

"아무튼 저도 앞으로는 만나지 않을 겁니다. 여자 문제나 학벌 컴플렉스나 저하고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기까지 치다니...앞으로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나는 적이 아니라 악마와 일주일간 동거를 했단 말인가...

나를 배려하는 듯 회사에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온 날 위해 맥주 한잔을 준비했던 모습은 가식이고

아까 강압적으로 관계를 시도했던 진우의 모습이 본 모습이었다는 것일까...

아무튼 나는 악마와의 동거를 벗어나게 되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현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근데..정말 제가 죄송한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네?"

 

돈이 없어서 월세를 도로 받아야겠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더러 자기가 살아야 하니까 나가라는 말인가?

 

"제가 지금 갈 곳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집에 들어가기엔 그렇고....여기 있자니 민아씨에게 돌려줄 돈도 없고요."

 

"네...현수씨 상황은 알겠는데...."

 

"제가 잠시 여기 있음....안될까요?"

 

"네?"

 

현수란 남자가 나에게 또 동거 제의를 하고 있는 건가?

아님 나가라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는 걸까?

 

"민아씨한테 나가라고 하기는 정말 죄송하고....당분간은....."

 

정말 이럴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누군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마음은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이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럼 저랑 같이...??"

 

현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어쩌란 말이냐......

 

"걱정 마세요. 저 민아씨한테 피해도 안 줄거고요. 저 회사에 다시 취직하면 대출이라도 받아서 3천만원 드릴 거고요."

 

이 상황에서 난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레종을 핑계로 월세를 깎았던 것처럼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좋아요. 그럼요. 현잰 제가 이 집 주인이죠?"

 

"네. 그렇죠."

 

"그럼 제가 님에게 월세를 받을게요. 제 집에 들어온 셈이잖아요."

 

"네?"

 

"싫으시면 당장 3천만원 주세요!"

 

웬지 남의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것 같으나 낯선 남자와 사는 데 웬지 그 정도는 안전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방금 진우와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또 다시 동거라니....

 

"아...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현수는 쉽게 승낙했다.

 

"그리고 또 조건이 있어요. 우리의 동거는 절대 비밀이고요.

식구나 친구들 절대 집에 데려오지 않기로 해요.

현수씨와 저는 선본 사이라 가족들에게 들키면 곤란하고요.

친구들도 들락거리다 보면 말이 새게 되죠."

 

나는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철저하게 관계를 규정하고 챙겨둘 것들은 챙겨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또 한 가지...언제까지 갚으실 거에요? 끝이 없는 동거를 할 순 없잖아요."

 

나는 위기에 처할수록 강해지는 사람인가...이 상황에서 생각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일단 6개월....제가 회사에 취직하고 대출하고 월급하고 해서 3천만원 만들어 보지요."

 

웬지 6개월...이란 말이 신빙성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한 말이니 지키길 바랬다.

 

"그럼, 라꾸라꾸 침대 쓰실 거죠? 이제 현수씨가 제 세입자가 되는 거니까..."

 

"네네...."

 

자신의 집에서 입장이 바뀌었는데 현수는 얼굴이 밝아졌다.

아마도 미국에서 당한 일 때문에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단지 머무를 곳이 생겼다는데 꽤 안심하는 눈치였다.

 

"자..그럼 전 낼 출근해야 하니까 이만 잘 거고요. 제가 잘 땐 스탠드를 쓰세요. 불키지 마시고요."

 

"네..."

 

다소 내가 건방져 보이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낯선 남자와 동거를 하는데 이 정도의 호기라도 없으면 어떻게 버티랴 싶어서 잘했다 싶었다.

나에겐 일주일 만에 두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되는 엉뚱하고 당황스런 스물 아홉 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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