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그림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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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뚝위로 영수가 영순이의 손을 잡고 올라, 못가로 난 길을 걸어오고 있다.
소구루마 한대가 겨우 지날만한 넓이에 흙먼지가 폴폴날고 돌자갈들이 발에 차이는 호젓한 산골길.
왼쪽은 못, 오른쪽은 산이다.
영수는 박박깎은 머리에 쇠똥자국이 보이고 얼굴엔 허연 마른버짐도 피었다. 책보를 삐딱하니 메고, 구멍나서 무릎이 튀어나온 바짓가랭이는 약간 걷어 올리고, 맨발에 시커먼 고무신,약간은 배가고파 보인다.넉넉지 못한, 조금은 궁색한 가정형편이 어른거린다.
"오빠야! 배고프제? 나는 배고파 죽는줄 알았다."
"머할라꼬 기달리노, 니먼저 집에 가제."
"혼차 갈라카이 무섭드라. 못속에 기신산다 카드라"
"기신은 무신 기신, 그라고 기신이 있다케도 낮에는 안나온다."
영수도 어른들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기에 목이 옴추러들어 옆 못쪽을 본다.
하지만 차마 동생 영순이 앞에서 그런티를 낼순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오빠고 남잔데..
올해 학교에 갓 입학한 영순이는 무서운 표정이지만 그래도 오빠가 있어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영수를 본다.
영순이 역시 까치름한 얼굴에 깡충한 단발머리, 조그만 키,헌 짧은 치마에 팔꿈치가 약간나온 독구리를 입었다.
몇권 안되는 책은 책보에싸서 허리에 두르고서.......
"그래, 얼릉가자. 가서 밥 묵자, 엄마가 기다릴낀데"
"오빠, 오늘 학교서 태극기 배았다. 풍금소리 디기 좋더라. 그라고 우리선샘 디기 이쁘데이"
길모퉁이 두어 구비를 도니 저앞 골밭에서 곰배네 할배가 지게를 받혀놓고 무슨 씨앗을 뿌릴라는지 밭을 고르며 돌을 줏어내고 있었다.
"할배요, 점심 잡샀니껴?"
"오야, 학교 갔다오나? 너 아부지도 잘 있제?" 얼릉가서 밥먹어라. 배 고플따."
"수고하시소. 할배요"
영순이는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지만 오빠하고 같이 있어 무섭지도않고 좋아서 강중강중 뛰며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영수는 지금 삼학년이다. 그래서 아직은 밴또를 안싸가지고 가는데, 청소를하고 오다보니 오늘은
다른날 보다 좀 늦었다.
머릿속엔 온통 밥생각밖엔.....아 배고파라.
아직 먼산 높은곳 음지엔 덜녹은 눈이 약간 보인다.
"저게 갈매봉이제?"
"......." 영순은 못들었는지 대답이 없다.
사방을 둘러 봐야 보이는건 산과 쬐끄만 밭떼기들 그리고 풀덤불들 뿐,별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끔 산중턱 숲속에서 "꽁꽁"하는 꽁들의 울음소리뿐......,너무 조용하다.
왼쪽 못뚝 기슭으로가면 쫌 가깝기는 하나 가파를뿐아니라 길도 거의 없고 녹두자갈이라는 아주작은 바위부스러기로 되있어서 잘못하다가는 못에 빠지는수도 있다.어른들도 그쪽으로는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쫌 멀드라도 오른쪽 이 길로 다닌다.
이길은 못골사람들이 장에도 가고 학교도 가는 나들잇길이고, 또 못아래 큰말 사람들이 나무하러
가는길이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못골 뒷산 넘어 절에가는 사람들이 찾기도한다.
특히 매일 이길을 오가는 사람이 한사람있는데, 그사람은 다름아닌 우체부 아저씨다.
사십이 쬐끔넘고 햇볕에 그을려 얼굴색은 좀 검고 주름이 약간 잡혔으나 늘 싱글벙글 웃으신다.
맨날 빨간 자전거핸들에 가죽가방 삐딱히걸고 제비모양 모표달린, 순경같은 모자를 쓰고 편지나 신문등 별걸다 갖다준다.
못골에는 집 수는 많지않지만 그래도 사람사는 동네니까.
가끔은 몇일치 신문을 한몫에 갖다 주기도한다.
이때쯤이면 오실때가 됐는데하며 앞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빨간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오고
있었다.
"아재요, 오늘 우리 편지는 없니껴?"
"아..!, 영수라? 오늘은 없따. 담에 오그덜랑 내 퍼뜩 같다 주께. 얼릉 가봐라, 너 어무이가 삽짞
밖에서 기다리드라."
"야. 그라마 수고하이소, 아재요." "오오야."
사람없는 빈길을 따릉 따릉하며 아저씨는 내려갔다.
"얼릉 가자. 엄마가 기다리드란다"
"그래, 오빠야"
두 남매는 먼지 폴폴나는 길을 겨끔내기 깨끔발을 뛰며 가고 있었다.
양지 바른곳엔 벌써 파릇파릇 새싹들이 돋고 있었다.
냉이도 보이고 가끔 보이는 민들레도 곧 꽃을 피울라나 보다.
멀리 시대네 밭둑엔 이팝나무가 희끗희끗 꽃을 피우고있다.
몇일 않있으면 아주 근방이 하얄끼라. 수북한 쌀밥그릇 처럼....
모퉁이 몇개를 돌아 동네 입구 나지막히 왔을때 영순이가 뜬금없이
"오빠, 고기 잡으까?"
"야가, 니 지금 뭐라카노. 요새 고기가 어딘노? 여름에 비가 마이 오마 그때나 도랑으로 고기가
올라오지"
"그라마 고기는 치아뿌고 참꽃 꺾으로 가까?"
"참꽃은 안죽 덜핐고, 또, 참꽃있는데는 아 잡어먹는 참꽃문디 있다카드라. 그르이 고마 암 소리
말고 퍼뜩 집에가자"
"그으래.."
영순이는 좀 섭섭했지만 오빠를따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덕배기위, 싸리바자의 삽짞밖에서 엄마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한손을 눈위 이마에 부친채...
"영수야.영순아 인제오나? 얼릉 온나. 배고프제?..."
"어엄마.."
하며 영순이는 책보를 털럭거리며앞서 뛰어오르고 있었다.
"야야 조심해라, 엎어질라"
엄마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있던 한돌이가 영순이 뛰어오자 좋다고 꽁지를 흔들며 바람같이 달려 내려와 영순이에게 안기며 혀를내밀어 손을 핥는다.
"야가 왜이카노, 글꾸 좋나? 조 뒤에 오빠야도 온다" 하며 토닥여주니 한돌은 아주 길길이 뛰며
좋아 어쩔줄 몰라한다. 오전내내 꽤나 심심했나 보다.
"한돌아,그르꾸 좋티나?"
"얼릉 씻고 밥묵어라, 내 퍼뜩 밥채리께"
"그란데 아부지는?"
"응, 아부지 조 밑에 밭에가싰다. 무꾸하고 배차 좀 숭갔으마하고 밭고랑 골구로 가싰다."
"참 영수야 내 이자뿌렀다. 그라마 씻기전에 밭에 아부지한테 가가 점심 잡수라 캐라"
"야아.."
"오빠야 같이가자"
하고 영순이 따라 나서니 영수는
"니는 고마 여 있그라. 내 퍼뜩 같다 오꾸마."
"에이.. 나도 갈낀데"
영수는 그냥 삽짞밖으로 냅다 뛰었다. 책보는 그냥 봉당위 멍석바닥에 벗어던져놓고..
그러자 영순이옆을 빙빙돌던 한돌이가 언제 봤는지 부리나케 달려 따라 나왔다.
약간 내리막길이라 정신없이 달리는데 뭔가 쭉 미끄러진다는 아찔한 생각이들며 그냥 딩굴었다.
정신을 차리니 입안이 찝찌름했고 무르팍도 욱신거렸다.
아마 길바닥의 잔잔한 돌맹이에 미끄러지며 어딘가에 부딪혀 코피가 나나보다.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니 진짜로 코피가 난다. 눈앞에는 아지랭이가 보이고.... 한돌이 손바닥을 핥는다.
마치 지가 잘못해 영수가 엎어져서 다친것처럼.
코를 한번 팽풀고 고개를 뒤로재켜 좀 있었다. 코피는 곧 멈췄다.
그래도 무르팍은 얼얼하고 쓰라렸다. 괜히 화가나서 한돌이를 한데 맥여 버렸다. 펄쩍 뛰며 피하던 한돌이는 흘끔흘끔 눈치를 보며 꼬리를 내린체 따라왔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절뚝거리며 밭뚝끝에서 "아부지 점심 잡수소" 하고 소리치니 밭고랑을 고르시던 아버지가 뒤돌아
보시며
"오야, 영수라. 하마 학교 갔다 왔나?" 하시며 괭이를 놓고 밭둑으로 나오시더니
"니 낯이 왜그렇노? 누 하고 싸웠나? 어허 이 무르팍은 또 왜 글노?"
"아이시더, 뛰 오다 엎어졌니더"
"아이고 조심해가 댕기지 뭐가 글쿠 급하노, 고마 내한테 엎애라" 하시며 등을 돌려 대신다.
"괴안니더, 내도 삼학년이시더"
"엎애라카마 엎애라 고마"
"아 괴안니더" 하며 영수는 절룩거리며 아버지를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어흠""어흠 쯧쯧" 혀를차시며 앞서시고 한돌이도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따라왔다. 꼬리도 흔들지 않고.....
삽짝문에 들어서며 아부지는
"보래이 아 어마이야, 아까징끼 어딧노? 그거 찾아가주고 영수 무르팍에 쫌 발러조라, 엎어졌단다,"
"아이구 야야 조심 쫌하지 뭐가 급해 그래 뛰댕기노?" 하며 엄마는 빨간약을 찾아 발라줬다.
"쪼매 따가불낀데 참어라, 그라고 입으로 솔솔 불어라"하시며..
약을 바르니 따끔거렸으나 입으로 불때는 시원했다.
네 식구는 멍석깐 봉당바닥에 둘러앉아 때늦은 점심을 먹는다.
점심이래야 배추씨레기 몇개 들어간 멀건 갱죽. 쌀알이 몇개나 들었을까.
봉당위 서까래와 먼하늘의 구름도 비친다.
반찬이래야 또 뭐있노, 군네나는 묵은 짠지와 장물 그리고 찬물..
달그락..후루룩...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그동안 한돌이는 지은 죄라도 지은듯이 마당 한구석에
엎드려 무심히 주인들의 식사 모습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밥달라고 꼬리도 못치고...
"다암 장에가서 배차씨하고 다른 씨갑 쫌 사야 될낀데" 하고 아버지가 정적을 깼다.
"글씨 뭘가주 가노??"
"닭이나 한마리 가주가 팔어야제"
"아부지 나도 새옷 하나사조, 다른 아들은 새옷 입었든데" 눈치 없는 영순이 옷사달라 조른다.
"오야, 그래 우리 영순이 옷도 사조야제. 후유..."
"아 좋아라, 빨간거, 이쁜 단추 달랬는거. 응 꼭이야"
"그래, 그래야제" 얼핏 스치는 아부지 얼굴의 그림자를 영수는 봤다.
아버지는 몇번이나 피다 껐던 담배꽁초에 신문지 종이를 덧데말아 불을 붙히고는 못건너 먼산을 바라 보셨다. 검으스름한 얼굴엔 주름살이 는다.
엄마는 얼른 부엌으로가고 영수는 대충 숫가락을 놓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밖에서 아부지의 혼잣말이 들린다.
"소아지라도 한마리 사 키와야 중학교라도 보낼낀데, 뭘로..후.."
적막한 오후의 정적이 흐른다.
부엌에선 엄마의 훌쩍임이 들리고, 마당가 영순이는 새옷 생각에 기분이좋아 콧노래 흥얼거리며 깡충거리지만 한돌이는 흘끔흘끔 마당가만 맴돌며 가끔 곁눈질로 아버지의 담배연기를 쫓는다.
햇살은 따사롭고 못의 물빛은 푸르기만하건만.........사방은 쥐죽은듯 고요하기만하다.
툭하고 누군가 어깨를침에 화들짝 놀라 고개들어 정신을 가다듬으니 영수,영순이,아부지,엄마 다
어디가고, 여전히 백두산 천지는 눈앞에 활짝 펼처져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고, 그 앞엔 아버지를 꼭 닮은 머리 희끗 듬성한 볼품없고 왜소한 몸집의 한사내가 앉아 있었다.
2004.5.8 어버이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