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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러브닷컴] 신(神)과 거래한 여자

이원영 |2004.05.13 18:19
조회 2,521 |추천 0

*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새롭게 각색한 글입니다

 


part 1. 신(神)과 거래한 여자


한 여인이 오피스텔 복도를 걷고 있다

160센치 전후의 키
동그란 얼굴형
예쁘장한 얼굴
웨이브 커트 머리
30대 전후의 똑똑한 눈망울을 가진 이지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오피스텔 가장 끝 구석에 자리한 210호에 멈춰섰다
문 앞에 걸린 상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210 러브닷컴]


그녀는 깊은 숨을 몰아쉰다
잠시 망설인 후 몇 차례 문을 두드린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돌아설까 하다가 문을 살짝 돌려보는 그녀
잠겨 있다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건물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건물 앞에 서서 선뜻 돌아가지 못하는 그녀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는 듯 1층 관리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똑똑」

환갑은 되어 보이는 관리인은 사무실 창문을 노크하는 그녀를 슬쩍
쳐다본 후 새삼스레 다시 한 번 쳐다본다
자신을 눈여겨보는 관리인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그녀

「210호 찾아왔는데 아무도 없네요...」
「210호 좀 전에 나가던데요」

여자는 뭐라 말하려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서는데...

「여기 열쇠 받아가요」

관리인의 말에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가씨 오면 열쇠 내 주라고 하던데」

관리인은 돋보기안경을 찾아 쓰며 메모지를 읽었다

「보자... 그러니까 얼굴이 동그랗고 예쁘장하고 머리가 빠마 카트에다가
똘망똘망하게 생긴 여자가 오면 열쇠를 내 줘라...」

관리인은 안경 너머로 힐끗 여자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맞는 거 같은데 열쇠 받아가요」

여자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관리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 어떻게... 저인 줄 알고 있죠...?」
「뭔 말이래? 둘이 애인 사이 아닌가?」
「아뇨...」

그녀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오늘... 처음 만나는걸요...」




「철컥」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문 안을 살펴보았다

사무실의 느낌보다는 자취하는 원룸 느낌의 세팅
기분 좋은 냄새
포근하고 부드러운 인테리어
가운데 놓인 소파는 사무실용이 아닌 가정용으로 여대생이 자취하는 원룸 같은 느낌이다

머뭇머뭇하며 들어와서는 소파 위로 손을 살짝 대 본다
따스한 감촉
큰 맘 먹고 앉아서 이리저리 시선을 보내던 중 소파 앞 유리탁자 위에 오디오

리모컨과 메모지가 올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음악 들으시면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썩 내키지 않는 듯 리모컨으로 전원을 켰다
적막한 공기 속에서 CD 도는 소리가 '윙~' 들리는가 싶더니 경쾌한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이 울렸다

「아~!」

그녀가 살짝 탄성을 낸다
자주 듣는 노래인 듯 차츰 굳었던 표정이 풀려간다
천천히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댄다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음악에 집중하는 그녀
오피스텔 사무실 복도를 걷던 그 순간부터 방금 전까지의 불안한 표정에서 한결

나아졌다
그 때였다

「찰칵」

오피스텔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선다




「허브향이 좋네요」

그가 건네는 잔을 받으면서 그녀는 기분 좋은 듯 향을 맡는다

「저도 그 상쾌한 향을 좋아합니다」

그 역시 향을 맡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다
잠시 말없이 차를 마시고 향을 맡는 두 사람
그녀가 먼저 차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어 보십시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주저하다가 굳은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제 뒷조사를 할 수 있으셨는지요? 아니, 제 말은 뒷조사를 하셔서

추궁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가 처음 인터넷에서 상담을 요청했을 때엔

회원가입정보를 모두 거짓으로... 물론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저로써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아이피도 추적 받을까 두려워 집에서

멀리 떨어진 피씨방을 이용하기 까지 했는데... 어떻게 제가 누군지 알고

뒷조사를 하실 수 있었는지 정말 궁금해요」

그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신뢰할 만한 미소를 지었다

「뒷조사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렇죠? 저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제가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제 뒷조사를 할 수 있겠어요?」
「맞습니다. 전 오늘 의뢰인을 처음 보는 것이고 사전에 그 어떤 것도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 외모를 아셨죠? 아, 물론 제가 지금 하는 질문이 비정상적

이고 이상하다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정말... 제 외모를 아신 거잖아요? 경비 아

저씨가 말한 그대로의 외모를 제가 가지고 있었는데... 제가 한번도 제 외모에 대해

설명 드린 적이 없었는데... 우리가 전화 통화를 딱 한 번 하였던 것이고」
「네. 공중전화로 딱 한 번 전화 주셨죠」
「그런데...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아셨고... 그리고, 경비실에 찾아갈 거

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고... 또, 제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정말 모든 것들이 의문이네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원영(210) 러브닷컴을 운영하면서 오프라인 사무실까지 방문하셔서 사

건을 상담 하겠다고 하신 분은 의뢰인이 처음입니다. 연애, 결혼, 사랑은 사람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러한 상담들은 대부분 노출을 꺼리기 때

문에 인터넷의 익명성을 빌려 이뤄집니다. 그런데 의뢰인께서는 절 직접 찾아오

겠다는 의사를 밝히셨죠」
「그건... 제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심각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반드시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먹은 만큼 상대를 신뢰할 수 있

느냐가 중요하겠죠? 상담을 요청하지만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긴

하느냐... 이 사람을 신뢰하고 모든 문제에 대해 가감 없이 털어 놓을 수 있느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선택한 이유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이

아무 연고도 없는 나를 어찌 알고 내가 안고 있는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느냐...」
「......」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로써는 의뢰인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실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뢰인이 오겠다고 하신 시간에

오피스텔을 일부러 비웠습니다」
「아......」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의뢰인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만으로도 자신의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

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문제를 꺼내지 않은 이상 언제

든지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과연 의뢰인

의 의지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고 싶어서 문을 잠그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만

약 의뢰인이 문제해결의 의지가 강하다면 경비실을 통해서라도 제 부재를 확

인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로써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요...」
「글쎄요. 과연 지푸라기라면 의뢰인께서 잡았을까요?」
「네?」
「만약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면 그 흔한 연애상담 사이트에서 고민을

올려 답변을 듣는 것으로 만족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인터넷에는 수많은 상담

사이트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의뢰인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강하게

원합니다. 그렇기에, 지푸라기가 아닌 단단한 동아줄이기를 바랬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뢰인이 문제해결을 위한 좀 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했고,

저 역시 의뢰인의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죠」
「......」
「의뢰인은 경비실을 찾아와서 제 부재를 확인했습니다. 전 의뢰인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이 때, 저 역시 의뢰인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제 능

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뢰인의 생김새를 메모한 용지를 관리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제 외모는... 어떻게 아셨죠...?」
「전 예전부터 목소리의 울림을 통해 상대방의 외모를 유추해 내는 일에 관

심이 많았습니다. 꽤 신뢰할만한 과학적인 방법이죠. 이전의 전화를 통해 의

뢰인의 목소리를 들어본 결과 의뢰인의 중성적이면서 안정적인 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음이 또박또박 하고 스스로 정리된 이야기를 하려

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이런 경우, 교육수준이 높은 이지적인 여성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말하는 것만 들어도 배운 티가 난다고 하는 경우죠. 이지적인

여성의 경우, 목소리톤이 하이톤인 경우는 얼굴형이 갸름한 경우가 많습니다.
얼굴형이 둥근 사람들은 대부분 중저음의 톤이 납니다. 입 안의 울림 역시 턱

선이나 혀의 형태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십중 팔구는 둥근형의 얼굴에서 나오

는 울림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얼굴형이 둥근 사람 중에서 고음을 내는 사람

은 애교 섞인 톤이 많이 나는, 목소리만 이쁘다고 표현하는 여성분들이 많이 해

당되고, 중성이거나 허스키톤의 경우엔 의외로 예쁜 얼굴이 많았습니다. 그

래서 외모가 예쁜 여인일 거라 추리했습니다」

「......」
「그리고, 제가 자체적으로 표본을 조사했을 때, 이런 톤 컬러의 목소리들이 작은

키의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얼굴이 동그랗고 키가 작은 여자분 중에서

이지적인 분위기의 여자분들은 대부분 머리를 커트로 합니다. 작은키에 긴 생머

리는 키를 더 작게 보이는 까닭도 있지만 남성들의 맹목적인 긴 생머리에 대한 동

경에도 커리어 우먼다운 반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굴형이 둥글기에

무작정 짧은 커트는 부담스러울 것이고, 대개 웨이브 커트를 미용실에서 권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절대적인 건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나름대로의 ‘감’ 입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으시군요」
「감사합니다」
「제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요?」
「모차르트는 ‘시대가 낳은 이단아’ 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로써는 뉴에이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정서에 비춰 상당히 멜랑꼴리하고 낭만적인, 그리고,
화려한 색채의 멜로디를 만들어냈죠. 그의 삶 역시 화려했고 파격적이었고 말입니

다. 그러나, 그는 결단코 그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클래식이라는 고전주의 당

시의 환경 안에서 충분히 만족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말인즉슨, 아무리 자

유롭다 해도 그 틀 안에서 결코 탈출하진 않았고 그의 음악 역시 그러했다는 반증이죠」
「그렇군요...」
「의뢰인 역시 자신이 이제까지 받아 왔던 교육과 환경 등을 고려해 보면 보수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남들이야 어쨌든 자기가 배워왔고 겪어왔

던 환경을 벗어난, 정도에 지나친 행동을 스스로 제약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받아 온 교육만큼이나 자유로움에 대해 더욱 잘 알 테고 거기에 대한 갈망도

많았을 겁니다.
이런 경우, 확연히 구분되어지는 바하의 음악보다, 베토벤의 음악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할 확률이 많은 것이죠」
「그렇군요...」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런 추리가 틀릴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는지요?」
「물론,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대부분이 틀렸다면 제 능력으로는 의뢰인의 상담을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그대로 돌아가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겁니다. 혹, 반 정도만 맞았다고

한다면 의뢰인이 이 곳에 찾아와서 앉아 있을 것이고, 앉아 있다면 제 설명을

듣고 반 틀린 것을 상회하고도 남을 신뢰를 보여 줄 테니까 저로써는 이래저래

시도해 볼 만한 모험이었죠」

잠잠히 그를 쳐다보는 그녀는 마지막으로 살짝 미소를 머금고 한 마디 덧붙였다

「만약 제가 예쁘지 않았다면 창피해서라도 돌아갔을지 몰라요」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 명문여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비서로 채용된 재색을

겸비한 여자였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공무원의 아버지로 인해 남부럽지 않은 생활환경과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여인이었다
학창 시절 소개팅을 통해 가볍게 만난 남학생들이 있었지만 별 관계가 없었고,

졸업하는 해에 선배의 소개를 통해 만난 남자와 3년이라는 시간동안 열렬하게

사랑을 하였다. 그러나, 어느 연구결과 말마따나 사랑의 호르몬이 다 끝나간다

는 그 3년째에 둘에겐 권태기가 찾아왔고, 남자의 대학원 여후배의 접근으로

인해 둘은 결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남녀간에 있을 수 있는 일들은 전부

있었다. 아기도 가졌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다니는 남자의 사정과 결혼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 여자 둘 다 아기를 낳을 생각이 없어서 별 생각 없이 아기를

지웠다
남자와 헤어진 후, 그녀는 (그 당시엔 별 생각 없이 지웠던 아기에 대한) 뒤늦은
죄책감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괴롭게 살았다. 잠을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아가에
대한 기억이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평생 혼자 살겠다고 결심도 해 보고, 아가를
입양하여 혼자 키워 보겠다는 생각도 해 보던 그녀...

이년 여 동안 고통의 세월을 지낸 그녀는 현재의 남편을 만나서야 길고긴 어둠의

터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장래가 유망한 내과 의사였다. 동기들이 대학병원을 떠나갈 때도

그는 높은 성적으로 홀로 대학병원에 남았고, 교수에게 총애를 받는 전문의로

성장했다.

 

그는 실력 뿐 아니라 집안에서는 효자였고 그녀에게는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다
중매로 만난 지 두 번째 만에 전격적으로 프로포즈를 했고 불과 두 달 만에 결혼을

하였다
결혼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애기간이 짧았다라고 생각하지 말아 줘. 평생을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게 해 줄 테니까」


그는 자신의 말대로 연애하는 연인들처럼 결혼생활을 했다. 지옥 같은 기분으로

살던 그녀가 처음으로 맛보는 구원이었다. 그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는

점차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잊어갔고, 드디어 결혼한 지 반 년 만에 그의 아기를 가

지게 되었다

아기를 가졌음을 그에게 알렸던 날, 그는 장미 300송이를 그녀 앞에 선물했다

「한 달을 30일로 계산해서 10달 300송이야. 당신을 닮은 장미같은 딸을 낳아 줘」

3대 독자인 그의 입에서 나온 ‘당신을 닮은 딸’이라는 말은 그녀에게 벅찬 감동이

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위해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교수인 자신의 스승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일년 스케줄이 가득 찬 여교수는 자신의 애제자의 아내를 흔쾌히 환자로

받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낙태나 유산 한 적 없죠?」

첫 진료 당시, 그녀는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 여교수의 질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네... 없습니다...」

그녀는 결코 그런 일이 있다고 말 할 수 없었다. 의사는 환자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는 남편의 스승... 도저히 낙태를 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사정을 알 바 모르는 여교수는 그녀의 작은 머뭇거림을
세세하게 살피지 못했고, 그녀는 그 날 이후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는데...


그 불안의 정체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오늘 우리 병원 산부인과에서 난리가 났다」

오붓하게 앉아 저녁을 먹던 중 그가 뜬끔없이 말을 꺼냈다

「어...? 무슨... 난리가 났는데...?」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물었다

「오늘 분만한 여자 중에서 과거가 지저분한 여자가 있었나 봐. 결혼하기 전에

놈들이랑 놀면서 애를 밴 여자 같은데, 결혼 하면서 남편한테 그 사실을 숨겼나 봐.

근데, 남편에게 속인 것까지는 좋은데 이 여자가 의사한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

았나 보지. 오늘 애를 낳는데 태반이 안 떨어지니까 의사가 당황해서 낙태한 적 있

냐고 마구 추궁했지. 남편까지 분만실에 들어와 있었는데 말이야. 의사가 난리치니

까 할 수 없이 그 여자가 낙태한 적이 있다고 말했지... 이야... 그 남편 심정이 어떻

겠어... 그 경삿날에 아내가 더러운 여자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야...」

「왜 여자가 더러운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후회했다

「어? 왜 더럽냐고? 당연히 더럽지! 얼마나 난잡하게 놀았으면 애를 임신해!
그래 놓고선 애를 지워! 그렇게 무책임한 여자가 안 더러워? 정말 파렴치한 여자지」

그녀는 다리가 풀리면서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 했다. 그러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당신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아?」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 그가 물었다. 그녀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요즘... 예전에 겪었던 그 지옥을 다시 겪고 있어요... 아니... 예전보다

더 지독한 지옥에서 시달리고 있어요... 저는 어쩌면 좋죠... 만약... 저 역시

아가를 낳을 때 그렇게 된다면... 남편이 눈치 채게 된다면... 역시 그렇게 되겠

죠...? 전 천벌 받아 마땅한 여자이니까... 신은 저를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저 역

시 그렇게 되겠죠...? 저 역시...」


그녀는...
이제까지 꿋꿋하게 참았던 오열을 터트렸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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